하얼빈 (30만 부 기념 에디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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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구절

14 공의 노고가 컸다....메이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토는 짐작할 수 없었다. 메이지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이것은 의례적인 덕담이 아닐 것이라고 이토는 생각했다......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이은을 데려온 정치공작의 성공을 치하하는 것인지....혼란한 정세를 놓고 꾸짖는 말인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메이지가 하려는 말은 이것이었구나.

이토는 메이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말 이면의 의미를 찾으려고 계속 유추하고 예상하고 가늠해본다.

 

63 어떠한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내밀한 죄들을 다들 깊이 지니고 있을 터인데, 그 죄는 마음에 사무치고 몸에 인 박여서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죄를 온전히 성찰하거나 고백할 수 없을 것임을 빌렘은 알고 있었다.

246 고해성사 때마다 마을의 죄는 풍토병처럼 거듭되었다. 똑같은 죄는 자고 새면 날마다 생겨나서 일상화 되었다. 뉘우침의 힘으로 새로워져서 다시는 죄를 짓지마라.

자신의 의식 수준 안에서만 성찰 가능하다. 진정한 성찰은 어렵겠구나.

 

64 빌렘은 마음이 다급할 때 느리게 움직였다.

급할수록 더욱 천천히

68 성정이 고우면 속마음이 더 힘들다.

92 우리는 적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105 이번 여행으로 경의 시심이 맑아지지길을 바란다. 풍류 속에서 경륜이 무르익겠구나.

.... 폐하의 당부대로 망가진 시심을 회복하려 한다.

시와 풍류의 중요성

121 강인한 정신은 반듯한 외양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몸을 바르게 하라. 지금 처해있는 자리가 인간의 근본이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 강인한 정신은 반듯한 외양으로 나타난다.

172 순종의 슬픔의 의전은 화려하고 엄숙했다. 그 슬픔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가식이라 하더라도 가식이 지극하면 진짜 슬픔과 구별하기 어려웠고, 구별하기가 어려워지니 마음이 편안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그를 위하기보다는 내 마음 편함을 달래기 위함이기도 하다.

189 유리한 정황을 들이대지 않았고 불리한 정황을 아니라고 우겨대지 않았다.

234 피고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힘주어 말했다. 진술은 유불리를 떠나 있었다.

안중근의 군더더기 없는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의 담백함, 이 담백함은 자신의 유리함을 떠나 있으므로 가능하다.

211 나는 이토를 반드시 죽일 결심으로 우라지에서 하얼빈까지 왔지만 경계가 엄중해서 죽일 수 없으면 발포만이라도 해서 나의 의견을 말하고 자살할 생각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다. -우덕순- 우덕순의 신념과 소신

 

248 자신의 입으로 나가는 말을 자신의 귀로 들으면서 말이 통제되지 않는 위기를 느꼈다. 긴말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스스로 조이면서 빌렘은 강독을 끝냈다.

빌렘의 자의식

252 안중근은 선고를 받기 전부터 자신의 일대기인 안응칠의 역사를 쓰고 있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217일부터 동양 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안중근의 마지막 정리와 성찰들

이 모든 것은 저의 모자람이고 저의 복입니다.

 

303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 주었다.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304 관념과 추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날것의 힘으로 일어서서 말들끼리 끌고 당기며 흘러가는 장관을 보여주었는데 저 남루한 세 단어가 그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즐거움은 잠깐뿐이고 연필을 쥐고 책상에 앉으면 말을 듣지 않는 말을 부려서 목표를 향해 끌고 나가는 노동의 날들이 계속되지만, 이런 수고로움을 길게 말하는 일은 너절하다.

 

305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306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느낀점: 김훈의 문장을 처음 읽었다. 익히 최고의 작가라고 들어온 터라 약간의 기대가 있었다. 그는 어떻게 안중근의 서사를 풀어가고, 또 어떻게 한 인간 내면의 깊이를 담아낼까? 지난번 안중근의 뮤지컬 영화 영웅을 보고 섬세한 묘사 없이 덩어리로 표현된 작품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책에 대한 기대는 더 컸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나는 메마름을 느꼈다. 이곳에도 등장인물의 감정의 표현이나 내면의 깊은 사고의 흐름은 거의 담겨있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도 하지 않았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직감했다. 어떤 미사여구의 형용사나 부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얀 방에 아주 간소하게 최소의 가구들만 덩그러니 들여놓은 느낌이었다. 그 안에 어떤 미적 감각이나 군더더기는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메마른 마음으로 내용을 읽어가다 나는 어느덧 그의 글 패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것도 가미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담백한 채소를 먹듯이 한 입 한 입 음미해 갔다. 채소 그대로 본연의 단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 주었다.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관념과 추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날것의 힘으로 일어서서 말들끼리 끌고 당기며 흘러가는 장관을 보여주었는데 저 남루한 세 단어가 그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세상의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직관적인 앎으로 서로의 마음이 전해지고 울림이 깊어질 수 있음을 알았다.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권총 한 자루로 홀로 맞서 동양의 평화를 외친 그의 살아 숨 쉬는 몸을 함께 느꼈다. 그것이 전부다. 이 단순한 한 줄로 그 깊이와 너비를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아직 믿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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