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차가운 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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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차가운 손

 

인상 깊은 구절

 

p61 그들 중에 누구라 한들, 나는 그 사람에게 적의를 품을 수 없었다. 단지 그는 나와 똑같이 비겁했을 뿐이다. 나와 똑같이 거짓을 말했을 뿐이다. 그날 저녁 나는 그 누군지 모를 사람의 거짓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모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진실만을 환멸했다.

 

p62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 낼 수 있으며 - 소화해내야만 하며 - 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p73 더이상 자신을 방어할 수도 은폐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이 그때 내가 알게 된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진실은 불쌍한 것이었다. 저렇게 누추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눈가에 번쩍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나는 마치 낯선 이물질을 보듯 그 눈물을 올려다 보았다. 눈물 역시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임을 그때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p88 조각의 어떤 점을 좋아하느냐고 누군가 물어오면 나는 간단히 손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두 손으로 뼈대를 세우고 흙을 주무르는 순간만은 모든 것의 껍질을 꿰뚫어보기 위한 집요한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열띤 신체적 몰입을 필요로하는 그 예민한 작업을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빚어내는 삼차원의 견고하고 육체적인 형태를 통해서만 간신히 이 세상과 연결되어 나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에게 조각이란 해독할 수 없는 생의 비밀들을 두 손으로 빚어냄으로써 마치 그것들을 체득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일종의 최면요법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p168 네 손이 성스럽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돼.

그게 어디가 됐건, 자기 몸에 성스러운 것을 가졌다는 건, 수호신을 가진 것과 같은 거 아닐까

 

p240 못을 빼도 못 자국이 남는다는 말처럼 말야. 다 극복했다 해도 그 자린 여전히 남아있게 마련이지. 한데 그 여자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과거가 사라지는 것 같더란 말야. 이를테면 내가 언제나 추구해왔던 상태, 현재 속에서 충만한 상태가 되더란 얘기야. 과거의 힘이 완전히 정지된 느낌 속에서 그 우아한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면 그 여자의 말할 수 없이 특별한 개성들이 내 못 자국을 가만히 덮어주는 걸 느낄 수 있었어.

 

p315 정말 꺼내진 것 같은 기분이었어.

네가 날 꺼냈고.... 또 난 널 꺼낸건가?

만일 우리가 꺼내졌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다시 들어갈 수 없다면......저 부서진 석고 껍데기 속으로.

 

나는 그녀의 알몸을 거기 반쯤 포개어진 나의 벌거벗은 몸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때 왜 내 눈이 뜨거워졌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집요하게 내 몸을 감싸고 있었던 일생의 긴장이 조용히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느낀 점

조각가 장운형은 어려서부터 기만적인 주위 사람들을 관찰해왔다. 잘린 손가락을 숨겨왔던 외삼촌,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집안의 재산을 보고 결혼한 교수 아버지 그리고 누구보다도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운형은 진실이란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는 예술 활동을 통해 진실을 찾고자 갈망한다. 많은 사람들이 혐오감을 던지는 뚱뚱한 L양의 손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하고 그녀의 석고로 뜬 몸을 안식처로 느낀다. 완벽해 보이는 E도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관심을 갖는다. 운형은 그녀의 몸에 석고 작업을 하던 중 손을 감추려던 그녀가 화가나 어릴 적 손가락이 여섯 개여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은 사실을 폭로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꺼내졌음을 느낀다. 장운형도 E가 그의 몸에 석고를 부어 상처를 입으며 그 틀에서 나온다. 둘은 자신의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진다. 장운형은 E의 손가락이 제거된 자리를 정성스럽게 품어주고 따뜻한 정사를 나눈다. 그리고 둘은 어디론가 실종된다.

 

진실은 누추하고 공허하다고 느끼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이 숨겨온 진실을 밝히며 서로에게 치유된다. 자신의 그림자, 숨기려고만 애쓰던 어두운 부분들을 드러내고 그것이 수용될 때 치유되고 한 단계 성장한다. 자신의 어둠을 함께 들여다보고 기꺼이 안아줄 그 한 사람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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