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 그 페허의 문학과 인간
고은 지음 / 향연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부를 하다보면 길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동안 별 생각 없이 받아들여졌던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길이 보이는데, 그 길이라는 것이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꼬인 실타래와 같은 것임을 깨닫고는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의 심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행 다녀와서 겨우 일주일 동안 책을 읽어놓고는 할 수 있는 푸념치고는 다소 성급한 감이 있지만.

 

어쨌든 이번 고은의 책은 전에 읽은 <이중섭 평전>에 비하면 여러 모로 실망스러웠다. 밀도도 떨어지는 것 같고 관점도 갈팡질팡하는 것 같다. 이 책은 1973년 겨울에 출간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지금은 '낡고' 심지어 '잘못된' 사실들(특히, 6.25전쟁에 대한 서술)도 많은 것 같다. 검열을 인식해서 인지 월북인사들에 대한 반공주의적인 인식이 드러나 있는 것이나 맥아더에 대한 찬양논조는 읽기 불편할 정도였다. 그래서 개정판 서문에서 고은은 자신이 이 글을 쓸 때와 자신은 아주 현저하게 '어긋나' 있다면서 이 책을 재출간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는 향수에 잠기는 것을 싫어한다면서 자신의 과거를 지나치게 가볍게 취급하는 듯...

 

여튼 "문학의 본질에는 반드시 폐허가 있다!"라는 2005년 개정판 서문의 고은의 말은 내 논문의 요지나 다름 없다. 하지만 고은 자신은 그 '폐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만의 잘못이라기보다 근대성을 피상적으로 이해해왔던 '식민지 지식인'의 공통된 한계이겠지만. 6.25 이전의 문학을 성황당 문학으로 본다거나 하는 관점...더구나 고은의 괴상한 문장들을 글을 읽어나가는 과정을 내내 괴롭게 만들었다. 너무나 많은 비문들이 이해 자체를 어렵게 하였다. 이제 당분간 고은의 글은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1920년대 데카당스 문학을 비판하는 관점은 한국 문학사에서 일반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고은에게서도 발견되는데, 심지어 고은은 50년대 데카당스가 더 '구제 불능'의 것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 주목할 부분. <적어도 1920년대 이후의 문제로서 작가의 원형에 심리적으로 자극해온 데카당스가 1950년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관련된 어법으로 등장함으로서 폐허의 동의어인 폐허의 작가를 예술적 충동으로 지속케 한 것은 사실이다> 그 역시 데카당스가 지닌 최소한의 시대적 역할에는 주목한 셈이다. 이처럼 고은이 갈팡질팡 하는 이유는 서구의 데카당스 문학에 비해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하다가도 이 시대의 방황과 패배밖에는 이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을 그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모방은 모방이 아니라, 오히려 당대적 상황에 대한 반응(respond)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뭐가 진짜 데카당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건 이제는 촌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물론 1950년대가 '폐허'였다는 말은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전해주지 않는 말일지 모른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의 현실이 얼마나 피폐했는지를 설명하는 수식어로서밖에 이해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이러한 폐허와 초토에서 예술은 허무를 자본으로 삼아서 생겨났음을 또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과 삶이 지척에 있는 순간을 경험한 이들은 그 자신의 생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예술과 생이 구분되지 않는 지경에서 이들은 퇴폐적인 삶을 향유한다. 이때의 퇴폐는 도덕적인 가치가 붕괴되어 있는 상태로서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갖지 못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다시 질서를 찾아간다. 1950년대의 허무주의는 실존주의의 수용으로 나타났고, 사르트르나 지드의 행동주의적 실존주의로 나아간다. 절대적 가치가 붕괴된 이후 방탕과 퇴폐로 삶을 탕진하던 이들은 동시에 붕괴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 자신을 실존적 기로에 선 주체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1950년대에 길이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몰락하기를 선택했던 이들의 고뇌를 접할 수록 이들의 목소리에 빠져든다. 50년대에는 누구나 예술가였다는데, 그것은 누구나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허무에 대한 인식만으로 생을 지탱할 수는 없지만, 허무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자신이 고독하다고 느끼는 순간에야말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