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 평전
이경철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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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서정주의 시가 왜 좋은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여기서 좋은 시라고 하면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의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좋은 시'의 객관적인 조건들과는 무관하다. 서정주의 시를 '좋은 시'라고 하는 글을 읽으며 '아, 그래서 서정주 시가 좋은 시구나'라고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서정주의 시를 읽으며 감동을 하는 편은 아니었다.

 

이번에 서정주의 평전을 읽으면서도 초반부터 너무 서정주가 얼마나 위대한 시인인지를 강조해서 거부감이 없지 않았다. 김수영과 김춘수의 양대 산맥 이전에 서정주가 있었다는 평가는 과연 타당할까. 서정주의 삶을 돌아보면서도 한국 현대사와 시사, 그리고 시인의 생애가 얼마나 난맥상으로 얽혀있으며 또한 그에 따라 기존의 평가들이 다소 도식적으로 위에 말한 세 가지 맥락의 역사들을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서정주의 시는 '전통' 서정시라고 분류되지만 사실 그의 초기시부터를 '전통 서정시'의 계보 속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사집>에 나오는 그 징글징글한 이미지들에서는 원시주의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시 모더니즘 시인이나 비평가였던 김기림으로부터 서정주의 시가 극찬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로 분류되는 오장환의 시만 해도 야수파적인 색채가 짙다. 이런 시를 썼던 서정주가 어째서 이후에는 '전통 서정시'라고 명명되는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는가. 이것이 문제적인 것이 아닌가.

 

이와 관련해서 서정주, 하면 늘상 이야기되곤 하는 친일 부역 문제와 전두환에 대한 지지발언 등 '무뇌아적' 정치행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문제만 나오면 문학과 정치는 분리해야 한다거나 분리할 수 없다거나 항상 반복되는 이분법적 논의가 나오는데, 사실 이 문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서정주는 친일 문학자니 그의 시는 가치가 없다고 폄하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도 아니다(특히 서정주처럼 위대한 시인은 이러한 문제로부터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식의, 그러니까 위대한 시인이 아니면 문제삼아도 된다는 식의 논리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성향과 그의 문학적 성향이 어떻게 맞물리고 있는지가 중요하면 이는 최현식 선생님의 연구(서정주 시의 근대와 반근대)를 비롯해 최근의 국문학 연구들이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덧붙여서 드는 생각은 그렇다고 문학 텍스트에서 친일의 내적 논리를 발견하는 방식, 즉 서정주의 전통 서정시로의 회귀, 샤머니즘 지향 등을 바로 파시즘적인 것으로 해석할 때의 문제가 아닐까. 이런 논리로는 서정주의 시를 '좋다고' 하는 이들의 관점과 완전히 양립하게 된다. 한쪽에서는 위대한 시인이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그것이 파시즘의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내가 왜 서정주의 시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않는 걸까, 라는 의문으로 돌아왔다. 이는 다분히 감수성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지만, '전통' 서정시의 게보에 있으며 샤머니즘의 영향 아래 설명할 수 있는 김소월의 시를 읽을 때와 서정주의 시를 읽을 때의 느낌이 (나로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은 이때의 감수성이 어떠한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이런 점에서 여전히 국문학계 내에서도 '샤머니즘'을 어떻게 설명할 지에 대해 논의가 정리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김현만 해도 문지를 창간할 때 샤머니즘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했다가 말년에 가면 전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에 대한 태도를 전환하는 것 같다. 시 연구에서는 샤머니즘이 일종의 만능키처럼 쓰일 때가 많은데, 그러다가도 파시즘에 경도되었던 친일 문학자에 대한 연구에서 샤머니즘은 함께 매도당하기 일쑤다.

 

서정주 평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새 버렸다. 최근에 고은이 쓴 이중섭 평전을 비롯해서 평전들을 읽으며 해당 인물들의 생애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까지 읽어보려고 하고 있는데 재밌는 내용이 많다. 고은이 쓴 평전이 특유의 입담과 생생한 증언들이 인상적이었다면, 이경철의 서정주 평전의 경우 기자 출신이자 현직 시인답게 풍부한 자료와 특유의 문학적 감식안을 만날 수 있다. 논문과 관련해서도 서정주가 쓴 시 <꽃>이 그의 시 세계에 있어서 획기적 전환점을 가져왔다는 부분을 새롭게 알게 되어서 굉장히 감사했다. 앞서 이야기한 시인의 생애와 시 세계의 변화를 연결시켜 보았을 때 이때의 전환점은 결코 작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1943년, 그러니까 서정주가 문학소년의 열정과 패기를 단념하고 매문에 들어서면서 일종의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던 시기였음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전환점은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지점이 있다. 논문에서는 이 부분을 파고들어볼 생각이다.

 

서정주는 이중섭이 그러했듯, 전쟁을 거치면서 정신줄을 놓아 버린다. 헛소리를 듣기 시작하고 의처증이 생겨서 아내와 아들을 때리기도 하였으며, 말이 나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괴로운 시절을 보냈다. 이승만 평전을 허락 없이 발간했다가 그가 겪었던 공포의 시간을 떠올려보면 그가 얼마나 심약한 인간인지를 알 수 있다. 험난한 시기에 시인은 그 자신을 지키기조차 벅찬 것이다. 그러면서도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관청에 취직하기도 지인들에게 부탁해 교사로 지내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과연 그에게 산다는 건 무엇이었고, 시란 무엇이었을까.

 

서정주 시는, 또한 그의 삶은 그래서 나에게 고민을 던져준다. 이념에 빠져서 문학을, 인간을 단죄하는 데 그 누가 찬성하겠는가. 그렇다고 윤리적인 고뇌가 느껴지지 않는 문학 역시 마냥 긍정할 수 있을까. 다만 서정주가 자신의 시에 담아내려 했던, 그 떠돌이의 '에스프리'라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보고 싶다. 이제 다시 서정주의 시를 읽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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