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일반판 - 재출시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스타맥스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봉두난발을 하고 15년동안 tv만 보며 인생을 송두리째 다시 복습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잘못 딸려온 젓가락 하나다. 그는 학교라는 감옥 안에서 16년동안 ‘세상’의 룰을 ‘학습’ 당하고, 이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가공된 평범한 인간이다. 적당히 결혼해서 아이도 한명 낳은, 친구와 술을 마시다 개가 되기도 하는, 말이 많고 참을성이 없지만 그럭저럭 평범한, 그렇게 남들과 똑같은 규격화된 삶을 살다 죽어갈, 그저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어느 비오는 날 보라색 우산의 남자가 자신을 찾아오리란 것을 알지 못했다.

현대사회는 정글이면서 관용과 평화로 위장된 유리세계다. 현대인들은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모든 욕망과 분노와 서글픔과 고독과 시기와 질투도 부정하고 억누르며 ‘쿨’한 모습을 유지해여 하며, 적당히 좋은 집에 살며 좋은 차도 끌어야 한다. 단잠까지 방해받는 아침형 인간을 강요받으며 일과에 시달리다가도 주말엔 문화인이자 웰빙족이어야 한다. 모든 것이 체계적으로 분업되고, 모두의 삶은 획일화 되었다. 우리는 ‘분노’를 감추고, ‘복수’ 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모두가 웃는 얼굴로 울고 있는 삐에로인 세상, 의미없는 거짓된 말과 이미지가 넘쳐나고 두꺼운 노래방책엔 사랑 노래가 가득하지만 정작 소통할 수 있는 단 한명의 친구도 없는 세상, 분노는 있으되 복수는 불가능한 세상이다.
우리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가? 우리들은 기껏 상사의 헤드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퇴근 후 레슬링 도장을 기웃거리거나 여자친구를 빼앗아간 유부남 편집장의 출판사에 취직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서 있다가 점점 그와 똑같은 속물로 변해갈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현대사회에서의 ‘복수’를 다룬 박찬욱 감독의 전작 [복수는 나의것]은 관객들에게 ‘불편’한 영화였다. ‘분노’는 이해할 수 있지만 ‘복수’는 왠지 찝찝했다. 신하균은 장기밀매업자에게, 또 송강호는 신하균에게, 배두나 배후의 사나이들은 송강호에게, 복수의 화살을 날리지만, 그들의 복수에는 목적지가 없어, 화살은 허망하게 서로의 심장을 뚫고 모두가 자폭한다.
하지만 [올드보이]의 복수극은 약간 다르다. 전작이 복수를 날 것 그대로 내온 회였다면, [올드보이]는 노릇하게 구워내어 빨간색, 보라색의 진한 신화 소스를 뿌려 내온 스테이크다. 관객들은 레스토랑의 미장센에 취하고 사랑이라는 와인의 맛도 음미하고 개그도 툭툭 뿌려서 편안하게 영화의 맛을 감상한다.
이야기 전반에 걸쳐 나열된 신화적인 상징과 이미지들, 그리고 전체적으로 과도한 색감이나 광각렌즈의 빈번한 사용 등은 이 영화에 환타지를 부여하고 휴지처럼 들어가는 ‘유머’는 관객들의 긴장을 이완시켜준다. 그래서 관객들은 이 영화를 마치 신화처럼, 하나의 우화나 동화처럼, 옛날 옛적에 어느 나뭇꾼이 자기 누나를 죽인 사냥꾼에게 복수를 했더라는 전설의 고향처럼 그렇게 편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한 환타지를 걷어내면, 남는 것은 세상과 단절된 한 남자와 세상을 대신해 대표로 복수당한 또 한 남자의 이야기다.
우진은 올림푸스산처럼 높은 건물 꼭대기 펜트 하우스 신전에서, 자신과 똑같은 ‘오대수’를 점지한다. 오대수는 붉은 격자무늬의 네모난 자궁안에서 15년동안 ‘재구성’되어 어느 햇살 좋은날, 옥상에서 탄생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오대수가 아니며,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분노로 가득찬 몬스터일 뿐이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금기를 깨트릴 운명을 주고, 대수는 결국 신화처럼 정해진 운명의 길을 그대로 밟게 된다. 자신의 분신을 남긴 이우진은, 모든 분노와 고통과 슬픔을, 그리고 자신도 마저 풀지 못한 어려운 숙제를 오대수에게 전가시키고 고된 삶을 끝마친다. 이제 오대수의 유일한 소통자인 이우진은 죽고 없다.
그는 자기의 이야기를 풍문으로 만들어 버린 ‘타인’에게 자기의 그 고통을, 단절과 금기된 욕망과 상실의 고통을, 그대로 들려주고 위안받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자, 너희라면 할 수 있을까?’ 우진의 마지막 문제. 이제 대수의 답안을 채우면 된다.
기억을 지우는 최면이 성공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 장면의 최민식의 묘하게 일그러진 그 미소는 이렇게 써내려가고 있는 듯 하다.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어도 ’사랑할‘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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