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국 문화의 상품화?

전통문화와 세계화, 한국 애니매이션은 이 두 개의 모호한 단어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 같다.
[서편제] 등의 영화가 성공한 이후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한창 유행하면서 애니매이션 쪽에서도 한편으로‘한국적인 작품’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중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검정고무신], 정채봉의 동화를 바탕으로 한 [오세암], 한국 전래동화를 소재로 했던 [은비까비의 옛날 옛적에], 고려 혹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했던 [머털 도사 시리즈]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와는 반대로 자국의 좁은 시장보다는 외국, 특히 서양(미국)을 타겟으로 완전히 ‘미국적’인 애니매이션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아예 외국의 작가를 기용한 [런딤]이나 미국 사회를 그대로 떠올리게 하는 [큐빅스]등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한국적’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너무 모호해서 진정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 포인트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과연 어디까지가 우리의 전통일까, ‘한국적’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또 한국적인 무엇을 ‘상품화’시켰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선뜻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작품들이 외국에 ‘먹혔는가’하는 점이다.
[검정고무신]은 외국은 커녕 한국의 어린이들조차 외면했으며, [머털도사]는 일본의 비슷비슷한 퇴마물 애니매이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옛날 옛적에]는 일본에서 숱하게 반복했던 세계 명작동화 애니매이션의 한국 전래 동화판 같은 느낌이었을 뿐이다.

후자의 경우 또한 문제가 심각하다. 지나치게 미국을 의식해 만들어진 작품은 완벽하게 미국적이지도 않고, 이렇다할 개성도 없이 상투적인 작품이 되어 버렸다.
후자의 논리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한국적인 것은 세계에 먹히지 않는다며 부끄럽게도 ‘미국적인 애니매이션’을 계속 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애니매이션은 하나의 ‘문화상품’이다. 문화를 상품으로 판다? 어떻게 하면 자국의 문화를 멋진 상품으로 만들어 외국에 판매하고 외국 수용자들이 그 작품으로 하여금 한국의 문화를 ‘즐길’ 수 있을까?

그러한 예들은 일본 애니매이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애니매이션들은 어떻게 서양을 비롯한 세계에 뿌려질 수 있었을까? 여기서 말하는 일본 애니매이션은 tv 시리즈물을 말한다. 아이들이 매일 저녁 tv를 통해 시청하는 tv 시리즈물은 극장판보다 제제가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tv 시리즈물은 꾸준히 수출되고 있다. 일본 애니매이션이 ‘미국적’인가? 그렇지 않다. 굉장히 일본적인 소재들을 갖고 제작된 것도 많고, 곳곳에 일본 문화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한국적’ 애니매이션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일본 애니매이션 속에 드러나는 일본의 문화들이 우리처럼 날로 들어나지 않고, 보기 좋게 포장되어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서 소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중 [헌터헌터]와 [나루토]라는 두 애니매이션을 비교하면서 그 속에 나타나는 일본의 ‘닌자’ 문화에 대해 말해 보겠다.

2.닌자

닌자란 일본 전국시대때 다이묘의 밑에서 일하던 스파이들을 말한다. 주로 첩보, 암살, 주군의 경호등을 맡았다고 한다.
지금은 많은 애니매이션에서 신비화되어 엄청난 인술,환술,검술 등을 다루는 존재가 되었지만 실제론 그냥 일종의 스파이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 외국인에겐 생소할 수 있는 ‘닌자’는 애니매이션 속에서 멋진 액션과 함께 다시 탄생한다.
우리가 [독수리 오형제]로 알고 있는 작품의 원제도 [과학닌자대 갓차맨]으로 그들도 일종의 ‘닌자’로 표현되고 있다.

이 닌자의 개념은 일본의 여러 소년 만화 시리즈에 도입되지만, 그것이 실제로 ‘닌자’라는 무엇으로 드러나는 일은 거의 없다. 대신 약간의 변형이 가해지고 환타지와 뒤섞여 닌자의 본래 의미나 역사적 가치와는 상관없이 신나는 액션물로서 즐길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 만화로는 대놓고 ‘닌자’를 드러낸 [나루토]와 ‘닌자’를 교묘하게 헌터라는 말로 바꾼 [헌터헌터], 그리고 배경을 바다로 옮겨 해적들의 이야기를 다룬 [원피스], 오컬트 적인 느낌을 가미해 닌자 대신 샤먼들의 대결을 그린 [샤먼킹]등이 있다.

3.나루토 vs 헌터헌터

나루토 (현재 도쿄 tv 방영중 68편까지 방영 )

나루토는 본격적인 ‘닌자물’이다. 닌자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닌자가 되기 위해 숱한 난관을 넘는다는 소위 ‘드래곤볼식’ 구조로 되어 있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나뭇잎 마을의 우즈마키 나루토는 말썽꾸러기에 낙제생이다. 사실 나루토에겐 비밀이 있는데, 어린 아기였을 때 마을을 해치려던 구미호를 호카게가 어린 나루토의 뱃속에 봉인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나루토는 이유도 모른 채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면서 자라난다.
그러나 꼭 호카게가 되겠다는 의지가 굳은 나루토는 점점 성장하여 각각의 다양하고 화려한 기술을 쓰는 여러 닌자 소년들과 싸우게 된다.

애니매이션 [나루토]에서 볼 것은 한가지, 바로 화려한 액션이다. 전설로 전해지는 각종 닌자의 기술들을 화려한 액션으로 즐길 수가 있는데, 비쥬얼적으로도 화려할 뿐더러 다양한 기술들의 종류와, 서로 다른 기술을 가진 닌자들이 머리를 써가며 싸움을 진행해 가는 과정은 마치 스포츠 만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주기도 한다.
또, 각 주연 및 조연 캐릭터들의 트라우마를 확실히 설정해 그들의 그늘진 어린 시절을 건드려 감동적인 연출을 가미한 것도 나루토의 또 하나의 재미다.

[나루토]는 매우 일본적인 애니매이션이다. 아마 왜색이 너무 짙어 국내 방영은 힘들지 않을까 예상 된다.
모든 캐릭터의 이름이 일본 이름이며, 알 수 없는 시대의 환타지 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일본의 중세 같은 느낌을 풍긴다.


실제로 작품 속에 드러나는 많은 인술, 환술 등은 (분신술, 수리창 던지기, 각종 암기 사용 등) 닌자에 관한 자료들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또 라면, 우즈마키 오뎅 등 일본 음식문화나 가옥구조 등 또한 매우 ‘일본적’이다.

그러나 국가를 떠나서 나루토와 그 밖의 수많은 살아있는 캐릭터들의 액션을 즐기며 재미있게 감상하기엔 전혀 무리가 없다.

반면 [헌터*헌터]는 [나루토]에 비해 스토리나 배경 세계관 등에서 볼 때 훨씬 뛰어나고 ‘세계적’인 작품이다. (액션감은 나루토보다 뒤진다)

[나루토]가 일본색을 강하게 띠고 ‘닌자’를 주인공으로 펼쳐진 ‘닌자들의 이야기’였다면 헌터는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두고 전혀 국적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다.
시대는 아마도 중세와 미래가 혼재되어 보이는데, 과학기술은 한편으로 상당히 발달한 시대로 보여지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헌터’라는 단어인데, 이 작품에선 ‘헌터’를 대단한 것으로 놓고, 너무나도 어려운 ‘헌터 시험’이라던가, 갖게 되면 모든지 할 수 있는 ‘헌터 라이센스 카드’등의 개념을 넣어 ‘헌터’를 계속 신비화 시킨다.
그 후에 국적 불문의 캐릭터들이 다양하게 나와 헌터가 되기 위해 싸운다. 헌터 시험이 끝난 후에는 주인공들의 또 다른 활약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것은 ‘닌자’를 ‘헌터’라는 말로 교묘히 바꿔 놓은 듯 하다.
실제로 나루토에서 불려지는 ‘닌자’와 [헌터헌터]에 나오는 ‘헌터’와 기능이나 작업 수행 능력 등은 거의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볼 때 [나루토]보다는 [헌터헌터]가 받아 들여지기 쉬울 것이다.
이 애니매이션 속에서 ‘헌터’의 의미는 그 누구도 작품을 보기 전까지 모르는 것이므로, 작품은 계속해서 초반에 ‘헌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고, 그 설명은 결코 지루하지 않게 교묘한 게임들을 통해 이루어 진다.

또 캐릭터들의 이름을 곤, 크라피카, 레오리오, 키르아, 한조, 미토 등으로 해 무국화 시켰다.

[헌터헌터]의 진정한 재미는 헌터시험이 끝난 이후, 30편을 넘어가면서 시작하는데, 바로 ‘넨’의 개념이다. [나루토]에도 ‘차크라’라는 식으로 비슷한 것이 나오긴 하지만, 이것은 단지 환술을 쓸 때 필요한 일종의 에너지 개념일 뿐이다. 그러나 [헌터헌터]는 훨씬 더 체계적으로 ‘넨’을 설명하고, 그것이 하나의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헌터헌터를 만화책으로 볼 때는 넨에 대한 설명을 수십번 다시 봐야 할 만큼 복잡하고 체계적이다.

[나루터]가 별 생각없이 닌자의 이야기를 재밌게만 풀어갔다면 [헌터헌터]는 보다 조금 더 ‘수출’을 염두해 둔 애니매이션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일본 문화를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헌터 2차 시험의 주제가 ‘초밥만들기’가 나왔는데, 아무도 초밥이 무엇인지 몰라 애를 먹는다는 식의 에피소드는 은연중에 일본 문화를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통 시의 일종인 ‘하이쿠’를 종이에 써서 그것을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엑스트라격 서브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의 ‘이것은 하이쿠라고 하는데 우리 조국에서 자랑하는 문학이지’와 같은 대사는 은연중에 일본의 문화를 소개하려고 하는 부분이다.


4.마무리

일본은 ‘닌자’라는 하나의 역사 속 집단을 소재로 해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애니매이션으로 만들어 세계에 수출했다. 지금 우리 시점으로 보면 어떻게 봐도 세계에 먹히기 힘든 소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신라 화랑을 소재로 애니매이션을 만든다거나 하는 것에 대해 아마도 한국 제작자들은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을 보낼 것이다.
무조건 ‘외국에서 모른다’는 이유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살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윤인완, 양경일의 [신 암행어사]와 같은 작품은 오히려 일본에서 애니매이션으로 만들어지고 있을 정도다.

닌자 뿐만 아니라 일본이 애니매이션으로 만들었던 자국 문화 소재들은 꽤 많다. 사무라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각종 요괴라던가, 일본의 유명한 동화작가의 이야기 (겐지의 봄) 등도 애니로 제작되었다.

우리나라 애니매이션 제작자 및 기획자들은 외국에서 알지 못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그 변명으로 그들은 늘 ‘한국 시정은 좁으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히려 외국에서 알지 못하는 한국만의 문화에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더 ‘재미있는’것들이 존재 할 수 있다.

[나루토]와 [헌터헌터]의 차이에서 나타나듯이 똑 같은 소재를 갖고도 얼마든지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자국의 전통문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고, 엔터테인먼트 요소로 잘 포장해 낸다면, 우리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문화 상품으로써의 애니매이션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3년 여름, 극장가에 울려퍼진 아름다운 핏빛 아리아.
- 2003년 공포영화가 말하려던 억압의 귀환과 그 이미지


세상을 망치 삼아, 자신의 몸에 찍어내리듯, 그렇게 추락하는 여자들.
아무도 없는 외진 곳에 자리한 빨간색 목조 가옥에서 꽈리꽃을 따 먹던 소녀의 영혼.
여우야 여우야 내 소원을 들어줘. 피 묻은 발레슈즈가 콩콩 뛰어가던 모습.
거울 속에서 나를 주시하는, 내 모습을 한 또 다른 그.

2003년 여름을 찾아온 한국의 공포 영화 속 이미지들이다. 올해의 한국 공포영화들은, 실로 다양했고,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갖고 있었다.
[장화 홍련]은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장사가 안된다는 통념을 깨 주기도 했고, 소재나 형식이 빈약했던 불과 몇 년 전과는 달리, 어느 정도는 깊이 있는 메시지와 특이한 소재를 들고 찾아 오기도 했다.

공포 영화가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 2003년을 마감하는 현재, 올해 등장한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아니 보여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우리들은 그 영화들의 어떤 점에 열광하고, 또 실망했던 걸까.

1. 공포영화가 말하려는 것

공포영화는 가장 쉽게 말하면 관객들에게 ‘공포’를 주는 영화다. 관객들은 그 ‘공포’를 겪으며 쾌감을 느낀다. 여기까지만 보면 액션영화나 공포영화는 같은 맥락에 있는 영화 장르일 것이다. 과격한 액션씬이나 긴장되는 추격씬 등을 보며 얻는 쾌감과 공포영화의 짜릿한 공포의 쾌감은 사람마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포영화와 액션영화는 다른 식으로 성장해 왔다. 액션영화가 큰 제작비를 들인 대규모 스케일의 블록버스터형(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개념의 블록버스터)으로 성장하며 많은 대중들에게 콜라와 팝콘을 먹으며 즐길 수 있는 가벼운 대중 문화였다면, 공포영화는 이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주로 공포영화는 저예산으로 제작된 것이 많았고, 다수의 대중 보다는 소수의 매니아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중심에 있는 장르가 아닌 변두리의 장르였으므로, 오히려 더욱 자유롭게 사회의 병폐나 금기시 되는 문제들을 건드릴 수 있었다.

그래서 공포영화는 ‘액션영화’와는 다르게 좀 더 예민하게 사회의 병폐와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하며 그 역사를 이어 왔다.
그렇다면, 그 공포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일까.

우리들은 공포영화를 보고 ‘공포’라는 감정을 느낀다. 이 ‘공포’라는 감정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한국영화연구 강의에서 공포의 근원은 ‘억압된 것의 귀환’에서 온다는 말을 들었다.
즉 공포영화는 공포의 근원인 ‘사회에서 억압된 것들’을 들추어 낸다. 그러므로 그 영화에서 어디서 공포를 끌어 냈는가를 찾아보면 그 사회에서 억압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70년대 미국 영화에서 블루 칼라의 노동자가 괴물로 묘사 되었다거나 그 괴물이 백인 중산층 가족을 위협한다거나 하는 것은 그 사회의 억압이 노동자들에게 있었고, 가장 지켜야 할 가치가 ‘백인 중산층 가족’으로 대변되는 무엇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출처: 이순진 ‘공포영화의 쾌락과 전복성’)
보수주의를 반격하는 80년대 난도질 영화 등도 같은 맥락이다 (출처: 위와 동일)
억압을 강요받던 여성에 대한 이미지도 [캐리] 등의 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그렇다면 2003년의 한국 공포 영화들이 보여주는 공포가 어디서 기인하는 가를 찾아낸다면 이 사회의 억압의 징후들을 알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엔 약간의 의심이 뇌리를 스친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 최근 영화들의 흐름을 보면, 진지하게 개인이나 사회의 문제를 다루거나 작가주의 적인 작품이 등장하기 보다는, 단순히 말초적인 자극을 원하는 어린 관객들에게 서비스하는 정도의 ‘돈이 되는 영화’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이 사회에 대한 통찰 없이, 단순히 관객이 좋아하는 이미지와 스토리를 서비스 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결과를 볼 때, 공포영화들이 올해 한국 극장가에 쏟아졌고, 흥행에 성공하거나 참패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이 관객이 원하는 무엇을 보여주었나 하는 점은 거꾸로 말하면 이 시대의 관객들이 원하는 ‘무엇’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2. 한국 공포영화가 말하려는 것

1998년 등장한 [여고괴담]은 ‘여고’라는 공간을 통해서 교육문제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죽은 아이들은 [전설의 고향]의 귀신처럼 원한을 갖고 자신을 죽인 누군가를 복수하기 위해 나타나지만, 98년 여고괴담의 귀신에겐 자기를 죽인 직접적인 인물이 없다. 다만 그 귀신을 죽게 한 것은 ‘학교’라는 비 인간적인 제도이다.
병든 사회는 고스란히 교실을 병들게 하고 그 안에서 아이들은 숨이 막혀 죽는다.
그들은 시위하듯 나무에 목을 매단다.
여고 귀신의 등장은, 우리가 억압하고 있던 ‘여고생’의 귀환이다. 여고생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는, 독립된 주체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런 여고생을 억누른다. 그것은 남고생에 대한 억압보다도 더 심할지 모른다.
아이들의 의지는 무시되고, 그들은 똑 같은 규격의 책상에 앉아 공부를 강요 당한다.
그 당시 관객의 대부분이 고등학생이거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대학생이었다. 우리들은 그 귀신에게 공포를 느꼈다기 보단, 귀신에 공감했었다. 우리도 똑 같은 환경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우리들 대부분은 옆 반 친구의 자살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999년에 이어진 [여고괴담 2]는 원작보다는 공포의 수치가 대폭 낮아져 과연 공포 영화로 봐야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여고괴담2]는 원작에서 ‘여고’라는 설정만 살리고, 동성애적인 코드를 넣고 앞에서 말한 소녀들의 문화를 마음껏 보여주었다. 그것은 매우 정서적인, 아름다운 영화였다.
[여고괴담2]의 귀신은 1탄과는 사뭇 다른 의미이다. 친구들이 만들어 놓은 두터운 벽에 숨막혔던 그녀는 귀신이 되고, 그녀를 무시하고 욕하던 친구들은 그녀의 귀환으로 인해 두려움에 떤다.
당시 왕따, 이지메 등이 문제시 되었던 것으로 기억할 때, 이것은 자명하게도 우리가 무시했던 소통 불가능 한 ‘왕따’가 귀신으로 귀환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개성적인 공포영화의 틀을 갖추지 못했던 탓인지, 그 이후로 우리나라는 헐리우드나 일본 공포를 따라가는데 급급했다.
[스크림],[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의 슬래셔 무비가 판을 치자 바로 다음해 2000년 여름 극장가에는 그다지 작품성도, 독창성도, 문제의식도 없는 비슷비슷한 슬래셔 무비가 판을 쳤다.

 

[가위],[해변으로 가다],[찍히면 죽는다][하피]등의 작품들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2001년엔 [소름]이 독특한 시도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소름]의 공포의 근원은 추락할 대로 추락한 썪은 아파트의 인물 군상에 있었다.

 

2002년에는 [폰]이 흥행에 성공했다. 원조교제, 대리모,가정을 지키려는 여성의 독한 모습 등을 보여주었고, ‘핸드폰’이라는 현재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이 편리한 기기를 순식간에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나름대로 재밌었지만 [링],에드거 엘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 [엑소시스트]등을 짬뽕했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특히 귀신이 들린 어린 소녀의 광기어린 연기는 헐리우드의 공포 영화에 자주 등장한 악령이 씌인 어린 아이를 연상케 했다.
굳이 찾아 보자면 폰의 억압 대상은 ‘여성’이다. 이 영화의 여성들은 사건의 해결자 위치에 놓인 하지원이나, 지독하게도 모든 것을 꾸민 냉정한 김유미, 원조교제를 하다 살해당했지만 원령으로 살아 남아 복수하는 여고생, 아빠를 얻기 위해 엄마를 질투하는 어린 소녀 모두 ‘무섭다’. 이런 여성의 원한과, 자기를 죽인 사람을 징벌하겠다는 원령의 복수 스토리는 과거 한국 공포 영화나 [전설의 고향], 이곳 저곳을 떠도는 ‘무서운 이야기’에 자주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올해 2003년 여름엔 [장화 홍련],[거울 속으로],[4인용 식탁],[여고괴담 3 여우계단]이 개봉했다. – 조금 늦게 개봉한 [아카시아]는 아직 보지 못한 관계로 생략함-
이 4편의 영화는 각각 다른 것을 이야기 하고 있고, 이전 한국 공포 영화와는 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장화 홍련]의 경우 붕괴된 가족의 모습을 외딴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매우 불안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 속의 귀신의 정체는 ‘엄마’인지, 원래 그곳을 떠도는 지박령인지, 임수정의 ‘환상’인지 조차 모호하다. 이 영화의 초점은 ‘귀신의 정체’에 있지 않으며, 슬픈 눈의 소녀와 깨어진 가정에 있다.
이 영화에서 어떤 억압된 것이 귀환했고, 그것이 사회의 어떤 점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막연하게 아슬아슬하게 유지해 가는 현대의 가족들, 그리고 그것이 순식간에 깨져 버린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그보다 먼저 중요하게 제시된 것은 빨간 피를 묻힌 아름다운 두 소녀와 매력적인 계모, 멍해 보이는 아버지가 나온 예쁜 포스터이고, 작품 속에선 시종일관 아름다운 미장센을 선보인다.
또한 서비스로 등장하는 ‘서프라이즈’한 씬에선 역시 [링]과 비슷한 장면들이 엿보이며, 언뜻 [디 아더스]의 분위기도 풍긴다.

[거울 속으로] 는 ‘거울’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가지고 관객들의 시선을 끈다. 이상의 [거울]이란 시가 연상되는 이 영화는 ‘거울’속 세계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 자료들은 대사 속에 설명적으로 나열 되었을 뿐 스토리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백화점의 이권을 둘러싼 추잡한 싸움으로 상투적으로 끝이 난다.
이 영화 속 귀신은, 그 자본주의 이면에 도사린 더러운 싸움에서 희생된 말없는 약자이다.
그러나 그런 약자에 대한 메시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거울이란 매력적인 소재가 주는 장점을 잘 살리지 못한 점 등이 아쉽다.

 

[4인용 식탁]은 올해 영화들 중 감독의 자의식이 제일 돋보였던 영화였다. 공포영화로써 관객을 끌어가는 힘은 없었지만, 여성의 말을 차단해 버려 소통을 불가능하게 해 버린 사회나, 80년대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두려움, 오히려 여성을 억압하는 모성 신화 등에 대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의 두려움의 대상은 어머니가 버린 죽은 아이들 귀신이며, 기억을 봉쇄해 버린 어려웠던 과거의 시절들이며, 결국 소통의 부재로 투신 자살을 선택한, 떨어지는 여자의 이미지다.
‘4인용 식탁’은 단란한 현대 4인가족의 환상을 대변해주는 상징이며, 유아 살해는 그 단란한 가정에 대한 환상을 접게 만드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사건의 중심이 전지현의 유아살해에 있는지, 그녀의 귀신을 보는 특이한 능력에 있는지, 박신양의 은폐된 기억과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지 알 수 없고, 영화의 드라마는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더 꼬여버린다.

[여우계단]은 여고괴담 시리즈의 힘을 빌려 전 시리즈의 장면들을 반복하고, 역시 [링]이나 [주온] 등에서 보여줬던 장편들을 심하게 모방한다.
‘예술가를 꿈꾸는 소녀들의 경쟁’이라는 매력적인 소재 역시 약한 드라마 속에서 힘을 잃고, 깊이 없는 캐릭터들은 이야기 속에서 제 역할을 찾지 못한다.
귀신 박한별은 사고로 인해 경쟁에서 밀려나게 된 소녀이며, 공격을 받게 되는 소녀는 언제나 2위만을 고수하다가 제일 친한 친구의 사고로 기회를 거머쥐게 된 아이다.
그러나 조소과 학생이나 조안과 같은 캐릭터는 등장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뿐더러 얘기는 점점 산으로 간다.
그러나 감각적인 그림들로 가득한 만화 일기장이라던가, 왠지 신비롭고 아름다운 느낌의 여우계단, 여학생들이 동경했던 기숙사의 이미지, 발레,미술 등과 같은 요소들은 충분히 관객에게 예쁘게 서비스해 준 느낌이다. – 어쨌든 수험에 지친 중고생들은 즐겁게 영화를 본 것 같으니 말이다-

결국 4편의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 무너지는 가족에 대한 이미지 외에는 특별한 메시지를 찾기 힘들다.


3. 2003년의 한국 공포영화

결국 올해의 공포영화들은 공포영화 자체의 기능보다는, 현재 한국 영화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에 집중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몇가지 정리해 보았다.

1) 양식미

올해의 한국 영화들은 화려한 미장센이 돋보였다. 과도하게 잘 꾸며진 세트나 예쁜 의상 등이 그렇다.
그것은 이제 관객들 수준이 영화에서 스토리와 배우 외에 다른 것들까지 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스캔들]은 조선시대의 수려한 한복으로 유럽의 화려한 복식에 못지 않은 화려함과 풍성함을 보여주었다. [지구를 지켜라]에서도 신하균의 연구실(?)이나 그 안의 여러 자료, 스크랩북, 박제 등의 정밀함 또한 대단했다.

이런 경향에 맞추어 공포 영화에도 비슷한 흐름이 보인다.
[장화 홍련]의 붉고 파란 화려한 색감과 아름다운 목조 가옥, 꽃무늬 벽지와 원피스 등은 이전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화려한 미장센을 선보인다. 또 이런 이미지들은 영화속의 불안을 증폭하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여우계단] 또한 기숙사 내부나 여우계단 등 예쁘장한 세트에 신경쓴 흔적이 보인다. 조안의 얼굴 분장은 스토리나 연출과는 별개로 그 자체만으로도 섬뜩하다.

2) 환타지 공간

살아있는 살인마가 등장했던 [가위],[해변으로 가다]류의 몇 년전 영화나 ‘여고’라는 현실적인 배경을 등장시켰던 [여고괴담]과는 달리, 올해 공포영화에선 가상된 공간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공간이 많이 등장했다.
[장화홍련]의 목조 가옥이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여고의 기숙사, 이승인지 저승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의 여우계단, 거울 속의 세계 등이다. [4인용 식탁]의 불모지 같은 느낌의 아파트와 공사중인 교회는 현실적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위에 말했던 양식미와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영화에서 ‘미술’, 특히 ‘프로덕션 디자인’ 분야가 떠오르면서 미술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세트나 소품을 만들다 보니 이런 공간으로 설정 되었다고 추측 된다.

참고 예) 재밌는 건 모두 과거의 기억을 다루거나 아니면 현재를 다루면서도 현실이 공간으로부터 멀어진 곳, 일종의 판타지 공간에서 자기 무대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김지운의 [장화 홍련]의 무대, 박기형의 [아카시아]의 시간은 모두 현재이지만 고립적이고 장식적인 공간 안에 들어가 자기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데 몰두하고 있다. – 허문영, 한겨례 신문 좌담

3) 억압된 구체적인 대상보다는 전체적인 불안감


[드라큐라]. [프랑켄슈타인],[구미호] 등의 작품에선 구체적인 괴물이 등장하고 그들은 무언가를 상징한다.
여성의 한을 많이 다뤘던 우리나라의 공포 영화에서도 원한을 가지고 죽은 어떤 누군가가 귀신이 되어 한을 풀려고 한다.
그러나 올해 영화들에서는 [여우계단]의 박한별을 제외하면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귀신 혹은 괴물이 없으며 있어도 그 존재는 매우 미비한 수준이다.
올해 영화들은 구체적인 무엇에 대한 공포감을 만들어 긴장요소를 주는 방법이 아니라, 영화 전체적으로 알 수 없는 불쾌한 기분과 불안감을 풍겨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을 쓰고 있다.
따라서 관객들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어떤 대상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가진채 계속 불안한 이미지들을 받으며 영화를 볼 수 밖에 없다.
좋게 말하면 위에서 말했듯 미술쪽이나 연출이 발달해 관객의 심리를 잘 끌어 갔다고 볼 수도 있겠고, 나쁘게 생각하면 시나리오의 드라마가 부실해 그것을 메꾸기 위해 불안감을 증폭시켰을 수도 있다.

4) 외국 영화들의 차용, 퓨전?

[폰]에서도 그렇지만 올해 영화들에서는 유독 외국 영화들의 소재나 장면이 많이 등장했다.

[디아더스][식스센스] 등의 유령 이야기, 혹은 유령을 보는 소녀, 그리고 원래는 귀신이었다는 반전이 그러하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링]의 사다코가 그러하다. [주온]과 같은 일본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cctv나 모니터를 통해 등장하는 귀신의 이미지도 [거울 속에서]에서 비슷하게 쓰이고 있다.

어떤 특정한 장면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설정도 외국 영화와 많이 비슷하다.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외진 곳에 일본식 목조 별장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장화홍련에 그런 이국적인 별장이 등장한다. [4인용 식탁] 에 나오는 교회 목사나, 목사가 샤머니즘 냄새를 풍기는 어린 박신양을 데려간다거나 하는 부분도 헐리우드의 고딕 호러와 유사한 분위기가 풍긴다. [거울 속으로]에 나오는 ‘거울’에 대한 자료는 ‘이상’의 시가 등장해도 될 부분에 대신 외국 화가나 작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여우계단의 ‘기숙사’나 – 우리나라엔 실제로 기숙사가 몇 개 없다- 조각상이 된 시체, 피 묻은 발레슈즈 등도 이국적인 소재다.

이는 우리나라의 영화들이 점점 상승세를 타며 외국에 수출되는 것을 감안해 세계적인 소재를 취했다고 볼 수 있지만, 너무 심하게 유사한 장면들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3. 마무리와 예상


한국 영화 점유율이 커지고 영화시장이 늘어났지만, 자국 시장이 작을 수 밖에 없는 우리나라 실정상, 많은 영화 제작사들이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심한다.
그런 실정 속에서도 좋은 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다만 관객층이 너무 어려지고, 그들이 원하는 것이 깊이 있는 성찰이나 개성있는 스타일리스트 감독의 새로운 실험보다는 말초적인 엔터테인먼트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 해피데이]나 [동갑내기 과외하기] 같은 영화들이 흥행을 하기도 한다.
올해 등장한 한국의 공포영화들은 그 중간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성공한 [장화 홍련]은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한 작품이지만 [4인용 식탁] 같은 경우는 너무 자기 안에만 머물렀으며 [여우계단]은 독창성을 잃었고 [거울속으로]는 이야기 수습에 실패했다.

올해의 성공으로 내년에도 후년에도 공포영화는 계속 만들어 질 것 같다.

이젠 공포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도 다른 장르 안에 속한 공포영화가 아니더라도 ‘공포’ 그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생겼으므로, 옛날에 실패했던 슬래쉬 무비들이 다시 등장해도 괜찮겠다. 다만 너무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라면 무방하다 싶다.

또 퇴마록이 처참한 실패를 보여줬지만, 오컬트 느낌의 퇴마물도 재밌으리라 예상된다.
[화산고]의 유령 버전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만화적인 상상력도 재미있을 듯 싶다.

문제는 역시 그 줄타기인 것 같다.
너무 서비스를 고려하면 외국 영화 장면 패러디의 종합영화선물세트나 -아니면 ‘무서운 영화- 의미없는 작품이 되어 버리고, 너무나 억지로 주제 의식을 담으려고 하면 관객에게 외면 당하거나 관념적이고 설명적인 작품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나는 영화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소설도 재밌어야 하고 시도 재밌어야 하고 애니매이션도 재밌어야 하고 노래도 재밌어야 한다. 그 재미 안에 깊이도 포함되면 더욱 재밌을 것이다.

작가와 관객이 두뇌 게임을 할 수 있는 그런 치밀한 시나리오의 너무너무 재밌고 화끈하게 무서운 그런 공포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보고 나면 깨달음 까진 아니더라도 생각 못했던 진실 한가지 쯤은 안고 나오는 그런 영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