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국 문화의 상품화?

전통문화와 세계화, 한국 애니매이션은 이 두 개의 모호한 단어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는 것 같다.
[서편제] 등의 영화가 성공한 이후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한창 유행하면서 애니매이션 쪽에서도 한편으로‘한국적인 작품’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중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검정고무신], 정채봉의 동화를 바탕으로 한 [오세암], 한국 전래동화를 소재로 했던 [은비까비의 옛날 옛적에], 고려 혹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했던 [머털 도사 시리즈]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와는 반대로 자국의 좁은 시장보다는 외국, 특히 서양(미국)을 타겟으로 완전히 ‘미국적’인 애니매이션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아예 외국의 작가를 기용한 [런딤]이나 미국 사회를 그대로 떠올리게 하는 [큐빅스]등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한국적’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너무 모호해서 진정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 포인트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과연 어디까지가 우리의 전통일까, ‘한국적’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또 한국적인 무엇을 ‘상품화’시켰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선뜻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작품들이 외국에 ‘먹혔는가’하는 점이다.
[검정고무신]은 외국은 커녕 한국의 어린이들조차 외면했으며, [머털도사]는 일본의 비슷비슷한 퇴마물 애니매이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옛날 옛적에]는 일본에서 숱하게 반복했던 세계 명작동화 애니매이션의 한국 전래 동화판 같은 느낌이었을 뿐이다.

후자의 경우 또한 문제가 심각하다. 지나치게 미국을 의식해 만들어진 작품은 완벽하게 미국적이지도 않고, 이렇다할 개성도 없이 상투적인 작품이 되어 버렸다.
후자의 논리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한국적인 것은 세계에 먹히지 않는다며 부끄럽게도 ‘미국적인 애니매이션’을 계속 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애니매이션은 하나의 ‘문화상품’이다. 문화를 상품으로 판다? 어떻게 하면 자국의 문화를 멋진 상품으로 만들어 외국에 판매하고 외국 수용자들이 그 작품으로 하여금 한국의 문화를 ‘즐길’ 수 있을까?

그러한 예들은 일본 애니매이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애니매이션들은 어떻게 서양을 비롯한 세계에 뿌려질 수 있었을까? 여기서 말하는 일본 애니매이션은 tv 시리즈물을 말한다. 아이들이 매일 저녁 tv를 통해 시청하는 tv 시리즈물은 극장판보다 제제가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tv 시리즈물은 꾸준히 수출되고 있다. 일본 애니매이션이 ‘미국적’인가? 그렇지 않다. 굉장히 일본적인 소재들을 갖고 제작된 것도 많고, 곳곳에 일본 문화들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한국적’ 애니매이션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일본 애니매이션 속에 드러나는 일본의 문화들이 우리처럼 날로 들어나지 않고, 보기 좋게 포장되어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서 소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중 [헌터헌터]와 [나루토]라는 두 애니매이션을 비교하면서 그 속에 나타나는 일본의 ‘닌자’ 문화에 대해 말해 보겠다.

2.닌자

닌자란 일본 전국시대때 다이묘의 밑에서 일하던 스파이들을 말한다. 주로 첩보, 암살, 주군의 경호등을 맡았다고 한다.
지금은 많은 애니매이션에서 신비화되어 엄청난 인술,환술,검술 등을 다루는 존재가 되었지만 실제론 그냥 일종의 스파이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 외국인에겐 생소할 수 있는 ‘닌자’는 애니매이션 속에서 멋진 액션과 함께 다시 탄생한다.
우리가 [독수리 오형제]로 알고 있는 작품의 원제도 [과학닌자대 갓차맨]으로 그들도 일종의 ‘닌자’로 표현되고 있다.

이 닌자의 개념은 일본의 여러 소년 만화 시리즈에 도입되지만, 그것이 실제로 ‘닌자’라는 무엇으로 드러나는 일은 거의 없다. 대신 약간의 변형이 가해지고 환타지와 뒤섞여 닌자의 본래 의미나 역사적 가치와는 상관없이 신나는 액션물로서 즐길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린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 만화로는 대놓고 ‘닌자’를 드러낸 [나루토]와 ‘닌자’를 교묘하게 헌터라는 말로 바꾼 [헌터헌터], 그리고 배경을 바다로 옮겨 해적들의 이야기를 다룬 [원피스], 오컬트 적인 느낌을 가미해 닌자 대신 샤먼들의 대결을 그린 [샤먼킹]등이 있다.

3.나루토 vs 헌터헌터

나루토 (현재 도쿄 tv 방영중 68편까지 방영 )

나루토는 본격적인 ‘닌자물’이다. 닌자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닌자가 되기 위해 숱한 난관을 넘는다는 소위 ‘드래곤볼식’ 구조로 되어 있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나뭇잎 마을의 우즈마키 나루토는 말썽꾸러기에 낙제생이다. 사실 나루토에겐 비밀이 있는데, 어린 아기였을 때 마을을 해치려던 구미호를 호카게가 어린 나루토의 뱃속에 봉인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나루토는 이유도 모른 채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면서 자라난다.
그러나 꼭 호카게가 되겠다는 의지가 굳은 나루토는 점점 성장하여 각각의 다양하고 화려한 기술을 쓰는 여러 닌자 소년들과 싸우게 된다.

애니매이션 [나루토]에서 볼 것은 한가지, 바로 화려한 액션이다. 전설로 전해지는 각종 닌자의 기술들을 화려한 액션으로 즐길 수가 있는데, 비쥬얼적으로도 화려할 뿐더러 다양한 기술들의 종류와, 서로 다른 기술을 가진 닌자들이 머리를 써가며 싸움을 진행해 가는 과정은 마치 스포츠 만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주기도 한다.
또, 각 주연 및 조연 캐릭터들의 트라우마를 확실히 설정해 그들의 그늘진 어린 시절을 건드려 감동적인 연출을 가미한 것도 나루토의 또 하나의 재미다.

[나루토]는 매우 일본적인 애니매이션이다. 아마 왜색이 너무 짙어 국내 방영은 힘들지 않을까 예상 된다.
모든 캐릭터의 이름이 일본 이름이며, 알 수 없는 시대의 환타지 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일본의 중세 같은 느낌을 풍긴다.


실제로 작품 속에 드러나는 많은 인술, 환술 등은 (분신술, 수리창 던지기, 각종 암기 사용 등) 닌자에 관한 자료들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또 라면, 우즈마키 오뎅 등 일본 음식문화나 가옥구조 등 또한 매우 ‘일본적’이다.

그러나 국가를 떠나서 나루토와 그 밖의 수많은 살아있는 캐릭터들의 액션을 즐기며 재미있게 감상하기엔 전혀 무리가 없다.

반면 [헌터*헌터]는 [나루토]에 비해 스토리나 배경 세계관 등에서 볼 때 훨씬 뛰어나고 ‘세계적’인 작품이다. (액션감은 나루토보다 뒤진다)

[나루토]가 일본색을 강하게 띠고 ‘닌자’를 주인공으로 펼쳐진 ‘닌자들의 이야기’였다면 헌터는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두고 전혀 국적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다.
시대는 아마도 중세와 미래가 혼재되어 보이는데, 과학기술은 한편으로 상당히 발달한 시대로 보여지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헌터’라는 단어인데, 이 작품에선 ‘헌터’를 대단한 것으로 놓고, 너무나도 어려운 ‘헌터 시험’이라던가, 갖게 되면 모든지 할 수 있는 ‘헌터 라이센스 카드’등의 개념을 넣어 ‘헌터’를 계속 신비화 시킨다.
그 후에 국적 불문의 캐릭터들이 다양하게 나와 헌터가 되기 위해 싸운다. 헌터 시험이 끝난 후에는 주인공들의 또 다른 활약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것은 ‘닌자’를 ‘헌터’라는 말로 교묘히 바꿔 놓은 듯 하다.
실제로 나루토에서 불려지는 ‘닌자’와 [헌터헌터]에 나오는 ‘헌터’와 기능이나 작업 수행 능력 등은 거의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볼 때 [나루토]보다는 [헌터헌터]가 받아 들여지기 쉬울 것이다.
이 애니매이션 속에서 ‘헌터’의 의미는 그 누구도 작품을 보기 전까지 모르는 것이므로, 작품은 계속해서 초반에 ‘헌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고, 그 설명은 결코 지루하지 않게 교묘한 게임들을 통해 이루어 진다.

또 캐릭터들의 이름을 곤, 크라피카, 레오리오, 키르아, 한조, 미토 등으로 해 무국화 시켰다.

[헌터헌터]의 진정한 재미는 헌터시험이 끝난 이후, 30편을 넘어가면서 시작하는데, 바로 ‘넨’의 개념이다. [나루토]에도 ‘차크라’라는 식으로 비슷한 것이 나오긴 하지만, 이것은 단지 환술을 쓸 때 필요한 일종의 에너지 개념일 뿐이다. 그러나 [헌터헌터]는 훨씬 더 체계적으로 ‘넨’을 설명하고, 그것이 하나의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헌터헌터를 만화책으로 볼 때는 넨에 대한 설명을 수십번 다시 봐야 할 만큼 복잡하고 체계적이다.

[나루터]가 별 생각없이 닌자의 이야기를 재밌게만 풀어갔다면 [헌터헌터]는 보다 조금 더 ‘수출’을 염두해 둔 애니매이션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일본 문화를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헌터 2차 시험의 주제가 ‘초밥만들기’가 나왔는데, 아무도 초밥이 무엇인지 몰라 애를 먹는다는 식의 에피소드는 은연중에 일본 문화를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통 시의 일종인 ‘하이쿠’를 종이에 써서 그것을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엑스트라격 서브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의 ‘이것은 하이쿠라고 하는데 우리 조국에서 자랑하는 문학이지’와 같은 대사는 은연중에 일본의 문화를 소개하려고 하는 부분이다.


4.마무리

일본은 ‘닌자’라는 하나의 역사 속 집단을 소재로 해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애니매이션으로 만들어 세계에 수출했다. 지금 우리 시점으로 보면 어떻게 봐도 세계에 먹히기 힘든 소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신라 화랑을 소재로 애니매이션을 만든다거나 하는 것에 대해 아마도 한국 제작자들은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을 보낼 것이다.
무조건 ‘외국에서 모른다’는 이유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살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윤인완, 양경일의 [신 암행어사]와 같은 작품은 오히려 일본에서 애니매이션으로 만들어지고 있을 정도다.

닌자 뿐만 아니라 일본이 애니매이션으로 만들었던 자국 문화 소재들은 꽤 많다. 사무라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각종 요괴라던가, 일본의 유명한 동화작가의 이야기 (겐지의 봄) 등도 애니로 제작되었다.

우리나라 애니매이션 제작자 및 기획자들은 외국에서 알지 못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그 변명으로 그들은 늘 ‘한국 시정은 좁으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히려 외국에서 알지 못하는 한국만의 문화에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더 ‘재미있는’것들이 존재 할 수 있다.

[나루토]와 [헌터헌터]의 차이에서 나타나듯이 똑 같은 소재를 갖고도 얼마든지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자국의 전통문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고, 엔터테인먼트 요소로 잘 포장해 낸다면, 우리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문화 상품으로써의 애니매이션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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