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략의 탄생
배리 네일버프, 애비너시 딕시트 지음, 이건식 옮김, 김영세 감수 / 쌤앤파커스 / 2009년 8월
평점 :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인연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받는 질문은 단연 두 개. 1) 돈 많이 버는 데 경제학이 도움이 되요? 2) 경제를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은 뭐에요? 둘 다 ƒ당황스런 질문이지만 전자는 그냥 얼버무리고 말 일이고 (나도 못 벌어!), 후자가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최근 각광 받는 “게임이론”을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을 대보라는 요구를 받으면 더욱 난감해진다.
왕규호 교수와 조인구 교수가 쓴 훌륭한 국문 게임이론 교과서도 있지만, 이런 류의 학술서들은 제외해야 겠다. 게임이론을 풀어 쓴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지만, 몇 가지를 빼고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례가 전부 외국의 것이기도 하려니와, 언제까지 1980년대 미국의 사례를 봐야하며, 윈도우와 맥킨토시의 뻔한 사례들에 이르면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이때 내가 하는 이야기가, “원서를 읽을 수 있겠어요”라는 질문이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단연 권장할 만한 책은 딕시트와 네일버프의 Thinking Strategically였다. 정말이지, 나무랄 데 없는 대중적인 감각을 지닌 책으로 가르침과 재기가 차고 넘치는 책이었다.
이번에 번역된 [전략의 탄생 Art of Strategy]은 Thinking Strategically의 개정 증보이자 후속작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책의 미덕부터 몇 가지 살피고 넘어가자.
1. 개정보다는 ‘증보’에 방점이 찍혔다는 점을 높이 사야 겠다. 이전 책은 당시까지 주류 이론의 성과들에 비교적 충실하게 전개되었지만, 이 책은 최근 주목받는 실험경제학 및 행동 게임이론, 그리고 신경경제학의 성과들까지 요모조모 잘 접목시키고 있다. 웬만해선 옆 길로 새지 않는 대가들로서는 상당히 재미있는 행보인 셈인데, 이는 경제학의 새로운 시도들이 어느덧 학계에서 일정한 ‘시민권’을 얻어가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리라.
2. 사례들의 펄떡이는 신선함이다. 책의 예들은 거슬러가야 90년대다. 인기 리얼리티 쇼 <서바이버> 이야기가 나오고 최근에 우리도 들어봤음 직한 이야기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이런 대목이야말로 국내 대중서를 쓰는 저자들이 가장 배워야 할 덕목일 터.
3. 전작도 그랬지만, 이 책 역시 경제학의 게임이론서들과는 달리 “벼랑 끝 전술”에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게임이론을 대중에게 파고들게 하는 데에는 이 주제 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다. 대중서에서도 따분하게 전개형, 전략형 게임 따지는 것 보다는 정치학과 더 많은 접목을 지니는 이 대목을 앞세우는 것은 전략적으로 분명히 타당한 결정이다. (게임이론을 대중적으로 강의할 때, [뷰티플 마인드]보다는 쿠바 핵 위기를 다룬 [D-13]이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가 훨씬 더 잘 먹히는 것 역시 이러한 까닭이다.)
4. 적당히 쉽고, 또한 적당히 어렵다. 외국 책들 특히 MBA를 염두해두고 쓴 책들은 연습 문제를 반드시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교재로서의 활용도 역시 손색이 없다. 이 책 역시 많지는 않지만, 배운 바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수록하고 있다. 웬만한 강의에 수업 교재로 써도 좋을 것이다.
이제 한국어 판에 대한 유감을 적어볼 차례다. 전작, Thinking Strategically는 “예일대학식 게임이론의 발상”이라는 황당한 부제를 달고 국내에 번역이 되었드랬다. 주변에 이 책을 산다면 쌍수를 들고 말릴 정도로 번역의 수준은 황당했다. 샘앤파커스라는 대형 출판사를 끼고 들어온 이번 책은 전작처럼 황당한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 책 역시 한국어와의 인연을 그리 좋지는 못한 듯 하다.
1. 우선, Art of Strategy를 왜 “전략의 탄생”으로 번역해야 했을까 여전히 의아하다. 김영세 교수의 대중 게임이론서 [게임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긴 하지만, “전략의 기술” 혹은 멋을 부렸다면 “전략의 예술”로 했더라면 책의 취지나 내용과 더 부합했으리라. “탄생”은 어쩐지 어색하다.
2. 하지만, 제목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치졸할 수도 있으니 그냥 넘어가자. 이번엔 번역의 문제다.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된 것 같지만, 세부적인 조율과정이나 감수--책 앞에 붙는 타이틀로서의 감수가 아니라 실질적인 내용에 대한 감독--이 턱 없이 부족하다. 경제학에서 널리 쓰이는 바, “equilibrium”은 “균형”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책은 한사코 이를 “평형”으로 번역했다. 역자의 철학이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왜 “평형”을 고집했는지 역주라도 달아주는 예의는 보였어야 했다.
3. 다음으로 내용 상 치명적인 오역이 군데군데 존재한다. 전부 지적하지는 않겠다. 251쪽에 보면, “왼쪽 공격에 대한 골키퍼의 랜덤 전략”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골키퍼의 왼쪽 방어에 대한 (키커의) 랜덤 전략”이다. 어찌보면 완전 반대로 번역한 셈인데, 책의 나오는 내용만 충실하게 따라가며 교정을 봤더라도 생기지 않았을 법한 실수다. 아울러, 책의 가장 헛갈리는 부분의 하나인 혼합전략에 대해서 이러한 오역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좀 더 부연하면, 책에 잘 소개 되었듯이, 나의 혼합전략 균형은 상대가 어떤 순수전략을 쓰더라도 페이오프 (보수)가 동일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계산하면 된다. 따라서, 위의 구절에서 골키퍼가 오른쪽을 방어하든 왼쪽을 방어하든 방어율이 동일하도록 내가 오른쪽과 왼쪽을 적절하게 섞어 차야 한다는 취지다. 혹여, 원문이 잘되었되었더라면 누군가에게 자문을 구했으면 좋았을 법한 대목이다.
4. (개그맨 황현희 씨의 말 대로) 이 뿐 만이 아니다. “이집트의 정신세계로 안내했다”(이 표현 앞의 맥락은 정신세계가 아니라 첩보와 관련된 이야기다)든가, “영국은 … 고소득자와 비가 많은 나라다” (rain이 많다는 것인가, 고소득자의 비율이 높다는 이야기인가?)라는 표현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다시 협상을 제시할 차례’를 “카운터오퍼”로 여과 없이 쓴 것은 애교로 받아 주자 (물론, 영어 몰입교육으로 내달리는 나라지만, 카운터오퍼라는 표현을 여전히 어색하다).
5. “공장”--여럿이 번역하고 한 사람이 책임지는 형태의 번역 작업--에서 번역한 흔적이 농후하다고 개인적으로 보는데, 공저자를 나타내는 et al. 한번은 누구누구 “등이 쓴”이라고 번역되었다가 뒤에는 누구를 “필두로 한”이라는 식으로 바뀐다. 이런 식으로 일관성이 없는 표현들도 종종 등장한다. 결국 전작처럼 최악은 아니지만, 이 책 역시 번역에 있어서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지는 못할 듯 하다. 역자가 최근 경제,경영서를 많이 번역해내고 있는 번역 그룹의 소속인데, 개인적으로 저들의 번역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넛지] 같은 상상력있는 책을 심드렁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분명 자랑할 만한 일은 못되지 않겠는가?
P.S.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저 분들이 주요한 경제 경영서의 번역을 많이 끌어 갈까? 이 역시 이 책의 내용인 게임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건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내는 숙제?
P.S. 2) 출판사에서 아마도 학기 시작에 맞춰 책을 서둘러 냈을 지도 모르겠다. 개정판은 부디 여러가지 문제점이 고쳐지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