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의 탄생
배리 네일버프, 애비너시 딕시트 지음, 이건식 옮김, 김영세 감수 / 쌤앤파커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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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인연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받는 질문은 단연 두 개. 1) 돈 많이 버는 데 경제학이 도움이 되요? 2) 경제를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은 뭐에요? 둘 다 ƒ당황스런 질문이지만 전자는 그냥 얼버무리고 말 일이고 (나도 못 벌어!), 후자가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최근 각광 받는 “게임이론”을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을 대보라는 요구를 받으면 더욱 난감해진다.  

왕규호 교수와 조인구 교수가 쓴 훌륭한 국문 게임이론 교과서도 있지만, 이런 류의 학술서들은 제외해야 겠다. 게임이론을 풀어 쓴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지만, 몇 가지를 빼고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례가 전부 외국의 것이기도 하려니와, 언제까지 1980년대 미국의 사례를 봐야하며, 윈도우와 맥킨토시의 뻔한 사례들에 이르면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이때 내가 하는 이야기가, “원서를 읽을 수 있겠어요”라는 질문이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단연 권장할 만한 책은 딕시트와 네일버프의 Thinking Strategically였다. 정말이지, 나무랄 데 없는 대중적인 감각을 지닌 책으로 가르침과 재기가 차고 넘치는 책이었다.  

이번에 번역된 [전략의 탄생 Art of Strategy]은 Thinking Strategically의 개정 증보이자 후속작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책의 미덕부터 몇 가지 살피고 넘어가자.  

1. 개정보다는 ‘증보’에 방점이 찍혔다는 점을 높이 사야 겠다. 이전 책은 당시까지 주류 이론의 성과들에 비교적 충실하게 전개되었지만, 이 책은 최근 주목받는 실험경제학 및 행동 게임이론, 그리고 신경경제학의 성과들까지 요모조모 잘 접목시키고 있다. 웬만해선 옆 길로 새지 않는 대가들로서는 상당히 재미있는 행보인 셈인데, 이는 경제학의 새로운 시도들이 어느덧 학계에서 일정한 ‘시민권’을 얻어가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리라.  

2. 사례들의 펄떡이는 신선함이다. 책의 예들은 거슬러가야 90년대다. 인기 리얼리티 쇼 <서바이버> 이야기가 나오고 최근에 우리도 들어봤음 직한 이야기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이런 대목이야말로 국내 대중서를 쓰는 저자들이 가장 배워야 할 덕목일 터.  

3. 전작도 그랬지만, 이 책 역시 경제학의 게임이론서들과는 달리 “벼랑 끝 전술”에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게임이론을 대중에게 파고들게 하는 데에는 이 주제 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다. 대중서에서도 따분하게 전개형, 전략형 게임 따지는 것 보다는 정치학과 더 많은 접목을 지니는 이 대목을 앞세우는 것은 전략적으로 분명히 타당한 결정이다. (게임이론을 대중적으로 강의할 때, [뷰티플 마인드]보다는 쿠바 핵 위기를 다룬 [D-13]이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가 훨씬 더 잘 먹히는 것 역시 이러한 까닭이다.)  

4. 적당히 쉽고, 또한 적당히 어렵다. 외국 책들 특히 MBA를 염두해두고 쓴 책들은 연습 문제를 반드시 담고 있다는 점에서 교재로서의 활용도 역시 손색이 없다. 이 책 역시 많지는 않지만, 배운 바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수록하고 있다. 웬만한 강의에 수업 교재로 써도 좋을 것이다.

이제 한국어 판에 대한 유감을 적어볼 차례다. 전작, Thinking Strategically는 “예일대학식 게임이론의 발상”이라는 황당한 부제를 달고 국내에 번역이 되었드랬다. 주변에 이 책을 산다면 쌍수를 들고 말릴 정도로 번역의 수준은 황당했다. 샘앤파커스라는 대형 출판사를 끼고 들어온 이번 책은 전작처럼 황당한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 책 역시 한국어와의 인연을 그리 좋지는 못한 듯 하다.  

1. 우선, Art of Strategy를 왜 “전략의 탄생”으로 번역해야 했을까 여전히 의아하다. 김영세 교수의 대중 게임이론서 [게임의 기술]이라는 책이 있긴 하지만, “전략의 기술” 혹은 멋을 부렸다면 “전략의 예술”로 했더라면 책의 취지나 내용과 더 부합했으리라. “탄생”은 어쩐지 어색하다.  

2. 하지만, 제목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치졸할 수도 있으니 그냥 넘어가자. 이번엔 번역의 문제다. 전반적으로 깔끔하게 된 것 같지만, 세부적인 조율과정이나 감수--책 앞에 붙는 타이틀로서의 감수가 아니라 실질적인 내용에 대한 감독--이 턱 없이 부족하다. 경제학에서 널리 쓰이는 바, “equilibrium”은 “균형”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책은 한사코 이를 “평형”으로 번역했다. 역자의 철학이 그렇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왜 “평형”을 고집했는지 역주라도 달아주는 예의는 보였어야 했다.  

3. 다음으로 내용 상 치명적인 오역이 군데군데 존재한다. 전부 지적하지는 않겠다. 251쪽에 보면, “왼쪽 공격에 대한 골키퍼의 랜덤 전략”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골키퍼의 왼쪽 방어에 대한 (키커의) 랜덤 전략”이다. 어찌보면 완전 반대로 번역한 셈인데, 책의 나오는 내용만 충실하게 따라가며 교정을 봤더라도 생기지 않았을 법한 실수다. 아울러, 책의 가장 헛갈리는 부분의 하나인 혼합전략에 대해서 이러한 오역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좀 더 부연하면, 책에 잘 소개 되었듯이, 나의 혼합전략 균형은 상대가 어떤 순수전략을 쓰더라도 페이오프 (보수)가 동일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계산하면 된다. 따라서, 위의 구절에서 골키퍼가 오른쪽을 방어하든 왼쪽을 방어하든 방어율이 동일하도록 내가 오른쪽과 왼쪽을 적절하게 섞어 차야 한다는 취지다. 혹여, 원문이 잘되었되었더라면 누군가에게 자문을 구했으면 좋았을 법한 대목이다.

4. (개그맨 황현희 씨의 말 대로) 이 뿐 만이 아니다. “이집트의 정신세계로 안내했다”(이 표현 앞의 맥락은 정신세계가 아니라 첩보와 관련된 이야기다)든가, “영국은 … 고소득자와 비가 많은 나라다” (rain이 많다는 것인가, 고소득자의 비율이 높다는 이야기인가?)라는 표현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다시 협상을 제시할 차례’를 “카운터오퍼”로 여과 없이 쓴 것은 애교로 받아 주자 (물론, 영어 몰입교육으로 내달리는 나라지만, 카운터오퍼라는 표현을 여전히 어색하다).  

5. “공장”--여럿이 번역하고 한 사람이 책임지는 형태의 번역 작업--에서 번역한 흔적이 농후하다고 개인적으로 보는데, 공저자를 나타내는 et al. 한번은 누구누구 “등이 쓴”이라고 번역되었다가 뒤에는 누구를 “필두로 한”이라는 식으로 바뀐다. 이런 식으로 일관성이 없는 표현들도 종종 등장한다. 결국 전작처럼 최악은 아니지만, 이 책 역시 번역에 있어서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받지는 못할 듯 하다. 역자가 최근 경제,경영서를 많이 번역해내고 있는 번역 그룹의 소속인데, 개인적으로 저들의 번역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넛지] 같은 상상력있는 책을 심드렁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분명 자랑할 만한 일은 못되지 않겠는가?  

P.S. 1)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저 분들이 주요한 경제 경영서의 번역을 많이 끌어 갈까? 이 역시 이 책의 내용인 게임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건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내는 숙제?  

P.S. 2) 출판사에서 아마도 학기 시작에 맞춰 책을 서둘러 냈을 지도 모르겠다. 개정판은 부디 여러가지 문제점이 고쳐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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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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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경험주의다. [블랙스완]의 검은 백조란 그 경험주의가 지닌 가장 날카로운 칼이다. 모든 확증엔 언제나 예외가 있을 수 있는 법이다. 그 예외를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니콜라스 나심 탈레브의 목소리는 새겨 들을 만 하다. 특히, 위험을 쪼개고 쪼개서--전문 용어로는 증권화라고 말한다--, (금융) 과학으로 포장한 들 원래 위험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바로 작금의 사태가 주는 교훈이다.  

다만, 스스로 수학자이자 사상가를 자처하는 탈레브는 너무 과하게 나갔다. 그는 스스로 딱지 붙인 플라톤주의적인 경제학자들을 비웃고 모든 경제 이론을 조롱한다. 하지만, 그의 조롱은 예측력이야말로 경제학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 만큼이나 무모하고 거침없다. 다수의 경제학/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플라톤주의를 방법론적으로만 혹은 우화적으로만 활용한다. 실제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 하드코어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점에서 이론 자체의 회외를 넘어 '거부'를 선동하는 그의 칼춤은 내겐 위협이다. 그는 (나도 사랑하는) 흄을 계속 언급하지만, 적어도 흄은 회의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이것이 흄에게서 찾을 수 있는 정수다.하지만 탈레브의 회의주의는 그가 혐오하는 플라톤주의를 정확히 뒤집어 놓은, 그래서 적과 지나치게 닮아버린 그런 형상이 되고 말았다.  

"부정의 논리"가 지닌 폭발력은 힐베르트 프로그램을 박살낸 괴델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실증했던 바다. 하지만, 괴델은 그 폭발력을 알았기에 이 날카로운 보도를 매우 조심스럽고 엄밀하게 그리고 절제된 초식으로 구사했다. 그에 반해 탈레브의 휘두름은 얼마나 가볍고 경박한가? 이런 가벼움은 반대로 그의 이론적인 공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내가 알아먹을 수 있었던 행동경제학에 대한 탈레브의 서술이나 만델브로에 대한 그의 수학적인 설명 혹은 정규분포에 대한 악의적 왜곡은 불완전하거나 자의적이고 때론 지나치리만치 사후적이다. 그의 해석이 주관적이라고 확신하게 된 대목은 크리스 앤더슨의 "롱테일"을 이른바 블랙스완의 틀 내에서 너무 쉽게 승인하고 곡해한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롱테일"은 그가 바라보는 나타날 확률이 낮은 검은 백조가 아니라 그저 현금화되지 못한 기회들일 뿐인데 말이다.  

이른바 월가의 투자자들이 그의 책에 열광한다면 오히려 그 논조의 부정성이 지닐수 있을 일말의 타당성/지혜 때문이리라. 아마도, 그들의 립서비스는 이런 "막대구부리기" 하에서 의미가 있을 터인데 (월가에는 현자가 너무 많다!), 책의 볼륨이나 그 논리라는 면에서 막대를 너무 구부린 것이 아닐까 싶다. 한마디로, 절반만 유익하고 나머지 절반은 심드렁한,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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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식탁 -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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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김영하, 그에 대한 평가에 내가 짠 건 아마도 빌어먹을 [무협 학생운동사] 때문일 것이다. 뭐 그보다 더한 실수도 숱하게 저지른 내가 대작가가 잠시 삐끗한 것에 이리 박하게 구는 건 너무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이 나에게 준 충격은 그만큼 컸다. 좌우간, 이 경험 이후 나는 쉽게 풀어썼다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에 장대익의 [다윈의 식탁]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 역시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윈의 식탁]을 덮고 난 지금, 풀어쓰는 이야기가 지닌 힘을 제대로 실감하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이 내 경험에 쌓인 풀어쓴 책들에 대한 혐오를 해독할 듯 싶다.  

사실, 진화 생물학이나 심화 심리학은 그냥 이야기하면 벽에 부딪히기 쉽다. 진화란 것이 어차피 추세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추세에 맞지 않는 예외는 얼마든지 발견된다. 이야기 자리에서 이런 예외로 물고 늘어지면 좀처럼 제대로 답변하기가 쉽지 않다. 복거일의 말마따나 발화의 장에서 "단순한 밈"은 "복잡한 밈"보다 언제나 강하다. 어쨌든, 진화 생물학에 대해서 몇 번 이야기하고는 이걸 좀 쉽게 정리해서 누가 풀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푸는 방식에도 여러가지가 있을 터다. 그리고, 대개 가방 끈이 긴 사람들은 '개론'풍으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지식 전달자로서는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이런 방식의 문제는 그리 재미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 다닐 때, "개론"자 붙은 과목치고 재미있는 것이 있던가? (있었다면 당신은 유능한 교수를 만난 것일게다!) 

 결국, 이 대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글재주일텐데, 일단 장대익의 덕목은 이 대목에서 빛난다. 다윈 이후 가장 맹렬하고 아름답게 폭발한 새로운 진화론을 세운 거인들 간의 논쟁이라니! 인간의 기억은 맥락과 함께 저장될 때 가장 생생하고 확실한 법인데, 이 점에서 이 책은 진화론이라는 보따리를 풀어놓는 가장 친절하고도 흥미로운 방식을 택한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내용과 상관없이 그 '설정'에서 먹어주고 간다. 해밀턴의 죽음을 계기로 모인 대학자들이 제한된 시간에 논쟁을 벌인다. 화자는 이 논쟁을 기록한 서기이고, 매 논쟁마다 그의 짧은 코멘트가 붙는다. 내러티브가 결코 내용을 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훌륭한 내러티브는 당의정과 같아서 어려운 내용도 쉽게 소화하도록 도와준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진화를 맛갈스럽게 잘 요리한 그 내용 뿐 아니라 책이라는 상품으로서 대단히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잘 정리된 책의 내용을 반복한다는 것은 구차한 것일 터다. 개인적으로 느낀 아쉬운 세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생물학 쪽의 쟁점들은--잘은 모르겠지만--비교적 잘 정리된 듯 하다. 하지만,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쪽의 내용들은 불균등하거나 듬성듬성한 인상을 받았다. 진화 심리학의 대가인 데이비드 버스는 왜 이 장례식에 오지 않았는가! 첫장에서 "강간"에 대한 내용을 다루어 페미니즘과 온갖 종류의 대립각을 세워온 진화 심리학의 내용을 뒤에 기대했지만, 첫장 이후에는 이와 다시 조우하지 못했다.  

둘째, 메이너드 스미스가 진화의 속도와 그 해석에 관한 대목에서만 등장한 점 역시 아쉽다. 책에서 쟁쟁한 대가들을 불러 모았던 고 해밀턴과 그가  진화 게임이라는 대목에서 맺었던 긴밀한 관계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책에도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스미스의 진화 게임이론은 생물학적인 응용을 넘어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으로 그 폭을 넓혀 나갔다. 하긴, 이미 최정규 교수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이라는 좋은 책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보면 되겠다. 

셋째, 마지막 종교에 대한 논쟁이 종합 토론처럼 들어가 있는데, 보다 폭넓은 주제에 속하는 문화 진화 역시 함께 어울렸으면 어땠을까? 예컨대, 인류학자인 보이드와 리처드슨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문화 진화에 대한 논의 같은 것 말이다. 책에서 진화의 단위에 대한 논쟁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다수준 진화'가 흥미롭게 적용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이 문화 진화이다. 문화와 유전자의 공진화, 문화 진화에서 집단과 개인의 관계 역시 진화론이 가장 흥미롭게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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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전쟁
톰 맥니콜 지음, 박병철 옮김 / 알마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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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직류와 교류를 둘러싼 논쟁은 산업사나 경제사에서 흔히 거론되는 '안주거리'다. "99% 영감론"으로 잘 알려진 발명왕 에디슨이 사실 그닥 위인된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은 이 안주의 가장 씹기 좋은 대목일 터.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에 의해 도입된 교류 기술(AC)를 저지하기 위해서--보다 경제학적으로 말한다면 자신이 보유한 기술의 경제적인 가치 및 초기투자 비용을 날리지 않기 위해서--직류 기술(DC)을 보유한 에디슨 전기는 비열한 음해 공작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에디슨도 직류를 점진적으로 포기하고 교류를 채택하는 쪽으로 나갔으니, 결국 시장은 효율적인 것을 선택하기 마련이라는 고리타분한 경제학 강의는 집어 치우자. 과연 그들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 < 프레스티지>에서 흑마술적인 상상력의 원천으로 인용되는 니콜라 테슬라는 에디슨과 어떤 관계였을까? 톰 맥니콜의 [표준 전쟁]은 얇은 농담과 싱거운 교훈의 배후에 놓인 역사의 구체성을 거슬러 간다.

책은 전기의 아버지 에디슨의 지독한 집착과 열정에서 출발한다. 추론과 일반화에 근거한 수학을 싫어했던 인물, 하지만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기 위해서 풀 하나하나를 헤집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 에디슨이다. 이런 품성이야말로,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위인의 덕목이긴 하지만, 저자는 에디슨이 맞이한 시기가 운이 좋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가 활약했던 시기야말로 미국의 산업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다. "그가 20년 쯤 전에 태어났다면 발명가적인 기질을 발휘할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며 20년 쯤 뒤에 태어났다면 이미 모든 물건들이 발명되어 거대한 산업사회의 일개 구성원으로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에디슨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적절한 마음가짐으로 살았던 '운 좋은 천재'였다."

에디슨의 왕성한 발명의 여정은 전기를 이용한 조명 분야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당시 각종 조명의 주류를 이루던 가스등을 전기 기반의 조명로 대체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몇번의 실패와 난관을 넘어 에디슨은 1882년 9월, 오래가는 필라멘트와 직류 기반의 배전 시스템을 통해 가스등에 버금가는 안정성을 갖춘 전기 조명을 뉴욕의 펄스트리트에 공급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에디슨의 기반 기술인 직류은 배전 거리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지녔다. 중앙발전소에서 1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전기를 공급할 때 막대한 전력 손실이 발생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고, 따라서 한 발전소가 담당할 수 있는 서비스 지역이 제한되었다. 경제학의 용어로 말하면, 직류는 전기 생산에서 발생하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은 기술이었다. 반면, 교류는 변압기를 이용하여 쉽게 승압이 가능했기 때문에 굵은 전선 없이도 별다른 전력 손실 없이 먼 곳 까지 전송이 가능했다.

에디슨이 최초로 발열 전구를 발명했을 무렵 이를 지켜보았던 또다른 발명가 웨스팅하우스 역시 전기 기술에 매료되었다. 이미 에디슨이 장악한 직류 전기 시장에서 크게 재미를 못보자 그는 당시 유럽에서 태동했던 교류 전기 기술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직류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웨스팅하우스 사 스스로도 교류 기술의 상업성과 실용성을 확신하기 힘들었지만, 1886년에는 매사추세츠 주의 그레이트 배링턴이라는 소도시에서 최초의 교류 기반 조명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대결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직류와 교류의 대결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 기인 니콜라 테슬라다. 각종 문학을 비롯한 매체에서 신비한 인물로 비춰지는 그는 원래 에디슨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고향인 크로아티아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고, 에디슨 전기에 2년간 몸담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 맥니콜에 따르면, 에디슨과 테슬라는 근본적으로 성향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삽질의 반복을 마다하지 않았던 에디슨과는 달리 테슬라는 추상적인 사고와 수학을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이성의 힘을 빌어 단숨에 끝낼 수 있는 일에 하릴없이 매달리는 것은 낭비라는 것이 테슬라의 마음가짐이었던 셈이다. 테슬라가 이미 에디슨 전기에 몸담았던 시절에 개발했던 교류 기반 모터는 에디슨 자신의 주목을 전혀 끌지 못했고, 그가 에디슨 전기를 떠나고도 2년 동안 잊혀졌다.

결정적으로 비어 있던 고리인 교류 기반 모터 구동 체계를 찾고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뒤늦게 테슬라의 다상 시스템을 알게 되었고 그 즉시 특허권을 사들였다. 테슬라라는 날개를 단 웨스팅하우스는 거침없이 비상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에디슨 전기가 차지했던 시장의 일부만 점유하고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교류 시스템의 장점을 앞세워 한마디로 "규모의 경제"를 본격적으로 실현해 나갔고, 에디슨 전기가 위협을 느낄 만큼 강하게 치고 올라왔다.

바로 이 무렵 등장한 인물이 과학을 빙자한 사기 이데올로그 해롤드 브라운이다. 경제사나 정보통신 관련 책에 에디슨의 악행으로 알려진 "전기의자" 음모론이 실상은 대부분 이 자의 작품이었다. 교류가 직류 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나 이에 기반한 가혹한 동물 실험이 과학자나 전문가들 사이에서까지 인정받았다는 대목은 오늘날에도 눈여겨 봐야 할 터다. 이해가 아직 부족한 상황에서 과학이라는 가짜 당의정이 입혀 놓은 대중에 영합하는 비과학이 지닌 힘 말이다. 직관적인 이해가 쉽지 않은 과학적 담론에 미혹되기 쉬운 현대인에게,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과학 영웅의 출현을 간절히 열망하는 한국인들에게 이 대목은 특별히 유효하다.

책에 따르면, 에디슨이 비록 몇몇 저작과 활동에서 브라운의 주장에 공감을 표하고 이를 사실상 방조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체계적이거나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브라운의 악의에 찬 선정활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에디슨 전기의 후신인 GE도 에디슨을 밀어낸 후 교류 시스템을 채택하였으니, 아마도 에디슨의 브라운에 대한 묵인은 사업적인 필요에 따른 개인적인 타협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듯 싶다.

우선, 이 책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발명왕 에디슨의 99% 근성이다. 근성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인적인 평상심 마저 가졌던 듯 하다. 자신이 운영하던 필름 보관소에 큰 불이 난 것을 보며 아들에게, "얘야, 당장 가서 네 엄마를 모셔오너라. 그리고 엄마 친구들도 모두 오라고 해. 이렇게 크고 멋진 불을 우리만 구경할 수는 없잖니"라고 말했다는 대목에서는 그 담력에 새삼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도 99%의 모범으로서는 역시 손색이 없다.

한편, 맥니콜이 비추는 에디슨은 위대한 발명왕과 음모적이고 악질적인 사업가 어느 쪽과도 거리를 둔다. 오히려 온전한 의미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한 몽상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 점에서 맥니콜은 에디슨이 항상 발명에는 뛰어났으되 이를 사업으로 연결시키는 데에는 서툴렀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컨대 전기에 대한 그의 집착은 다른 한편으로 축전지의 개선으로 향했는데, 이는 전기로 움직이는 자동차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축전지로 움직이는 전기 자동차라는 구상이 석유 자동차에 의해 바로 흔적도 없이 뭉개졌다는 점을 새삼 지적할 필요는 없을 터다. 아울러, 그가 대단위 발전시설을 통해 만들어진 전기를 송전하는 규모의 경제에 관심이 없었던 까닭은 각 지역마다 필요한 만큼의 전기를 생산해내는 국지적 시스템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 산업의 출발을 이룬 영사기 역시 돈벌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니, 사업적인 방면에서는 그는 그닥 재주가 뛰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하지만, 역시 저자가 온당하게 지적하듯, 이런 산업 시대를 넘어선 에디슨의 낭만적이고 몽상적인 꿈들이 오늘날까지도 그를 공허한 "위인" 이상으로 기억해내야 할 까닭이기도 하다. 친환경의 전기 자동차, 대단위 발전 시스템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유연하고 국지적인 송전-배전 시스템이 오늘날 관련 업계의 주요한 화두인 점을 다시 떠올려보라. 이쯤되면, 에디슨의 '사후 복수'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이 글은 저의 블로그인 http://anarinsk.web-bi.net/blog/?p=642 에도 포스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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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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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식인들의 작업은 한국에서 매우 편향적으로 소비된다. 역사적인 내용(일제 시대에 대한 모종의 반성?, 한국의 지정학적 맥락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 우선 잘 팔린다. 다음으로는 카타라니 고진의 예에서 보듯이, 일부 인문학 분야에서도 상당히 (너무 열렬할 정도로) 수용성이 높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젠 시들해졌지만, 한때 열풍처럼 불어닥쳤던 프랑스 지식인들에 대한 쏠림에 비한다면 일본 인문학의 깊이를 우리 같은 일반 독자가 느끼기는 쉽지 않다. 학부 시절, 여름 방학에 읽었던 아사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24살에 완성했다는 사실과 별도로, 당시로서 포스트모던의 사상을 [구조와 힘] 만큼 튼튼히 잘 소화했던 경우를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다른 이들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없거나 여전히 무척 드물다고 본다.)

아즈마 히로키의 책도 이 점에서 놀라왔다. 책의 대상은 한국에서도 이제 꽤 이름을 알린 "오타쿠"다. "오타쿠"는 한국에서 병리적인 문화의 하나로 쉬이 취급된다. 여느 게임 사이트에 가면, "덕후"라는 말로 변형되어 일종의 경멸과 비난의 의미로 욕마냥 쓰인다. 한편, 시중에 나와 있는 오타쿠에 대한 몇몇 책들 역시 흥미거리 위주거나 (특히 서양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경우) 오리엔탈리즘으로 채색된 채 뒤틀린 묘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게임 주변에 있다보면 "오타쿠", "모에"와 같은 말이야 흔히 듣게 되지만, 그 소비의 좋고 나쁨을 빼면 과연 어떤 점을 주목해서 봐야할까,에 갸우뚱해지는 경우가 많다.

아즈마 히로키의 책은 이러한 점에서 동시대의 일본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문화 단면에 대한 이론적 개입이다. 그런데, 그 개입이 꽤나 우아하다. 히로키는 오타쿠를 포스트모던의 맥락, 즉 보들리야르에 의해 대중화된 언설로 확산되었고 실제로도 경험되고 있기도 한 시뮬라크르의 소비행태가 구체화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를 위해 히로키가 출발하는 점은 "디지캐럿"이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모호한 상품이다. 디지캐럿은 원래 모태가 되는 바탕의 이야기가 없다. 단편 단편의 캐릭터에서 출발하여 이 캐릭터에 대한 사람들의 취향이 정리, 확대, 분산되고 이를 통해 원래의 상품 자체까지 유동적으로 재조립된다. 요컨대, 디지캐럿에는 "원본" 혹은 가상이라할지라도 의지해야만 하는 모종의 "이야기"가 없는 셈이다.

히로키는 이러한 세계상을 (아주 적절하게도) "데이터베이스"라고 묘사한다. 이 지점에서 묘하게 갈려나가는 것이 앞선 오타쿠 연구자인 오오츠카 에이지가 주장했다는 '이야기 론'이다. 에이지는 건담으로 상징되는 1기 오타쿠 시대를 분석하면서, "소비되고 있는 것은 하나하나의 '드라마'나 '물건'이 아니라 그 배후에 감춰져 있는 시스템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1기 오타쿠들에게 건담의 연표를 외우고 역사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물론, 이렇게 시스템이 일단 파악, 조립되면, 여기에 기반해 다른 작은 이야기를 재조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재조립은 원래의 시스템에 대한 집착이나 의미부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히로키가 파악한 "데이터베이스"론에서는 이러한 시스템 자체가 "구조"로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데이터베이스는 그 본연에 맞게 일정한 계열을 지닌 특성체들의 집합일 뿐이다. 본질에 있어 그 자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이런 기본 입론에서 출발하여 히로키는 아주 엉뚱하지만 매력적이게도 꼬제브를 도입한다. 꼬제브가 비교했던 바, 욕구가 자동적으로 충족되는 "동물화한" 미국과 없는 것을 만들어서까지 뭔가를 갈구해야 하는 "스노비즘의" 일본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개념-역사는 오타쿠 문화를 해부하고 그 진화를 묘사하는 열쇠가 된다. 마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마냥, 책은 2차 대전이라는 단절과 멍에 속에서 스노비즘으로 잉태된 오타쿠 문화가 "데이터베이스"를 거쳐서 동물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감칠 맛나게 그려낸다.

책의 빼 놓을 수 없는 첫번째 미덕은 분명 어려운 이론서임에도 술술 잘 읽힌다는 것이다. 일단, 저자가 이론적인 개념에 대해서 도해를 섞어가며 알기 쉽게 쓴다는 점이 높이 살만 하겠다. 어려운 이론 전개가 항상 쉬울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이 정도의 고려는 독자를 충분히 즐겁게 한다. 미소녀 게임 YU-NO의 분석에 할애된 마지막 장은 전체를 아우르면서도 책 전체의 주제를 구체화하고 있어 뒷맛까지 개운하다.

히로키의 책을 읽노라니, 문득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보다 고상하게 이론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문화나 모멘트들이 많았는데 말이다. 80년 광주가 그랬고, 87년 민주화 항쟁이 그랬고, 잇따른 노동자 대투쟁이 그랬다. 너무 정치적이라는 느낌이 든다면, 인터넷이 도입된 이후 익숙해진 디지털 "폐인" 문화 역시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점들에 대한 표피적인 찬반 논쟁 말고 사회-인류학적인 단순 묘사를 빼버리고 나면, 아즈마 히로키와 같은 이론적인 시도들이 몇 차례나 있었나? 이 점에서 일단 한번 얼굴을 살짝 붉히게 되는데, 이 책을 주류 언론-미디어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얼굴을 붉히게 된다. 고매한 서평으로 다루기에는 너무 싸보이고 경박한 책이란 말인가? 일본 지식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좁은 시야는 여전한 듯 싶다.

http://anarinsk.web-bi.net/blog/?p=549 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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