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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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식인들의 작업은 한국에서 매우 편향적으로 소비된다. 역사적인 내용(일제 시대에 대한 모종의 반성?, 한국의 지정학적 맥락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 우선 잘 팔린다. 다음으로는 카타라니 고진의 예에서 보듯이, 일부 인문학 분야에서도 상당히 (너무 열렬할 정도로) 수용성이 높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젠 시들해졌지만, 한때 열풍처럼 불어닥쳤던 프랑스 지식인들에 대한 쏠림에 비한다면 일본 인문학의 깊이를 우리 같은 일반 독자가 느끼기는 쉽지 않다. 학부 시절, 여름 방학에 읽었던 아사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24살에 완성했다는 사실과 별도로, 당시로서 포스트모던의 사상을 [구조와 힘] 만큼 튼튼히 잘 소화했던 경우를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다른 이들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없거나 여전히 무척 드물다고 본다.)

아즈마 히로키의 책도 이 점에서 놀라왔다. 책의 대상은 한국에서도 이제 꽤 이름을 알린 "오타쿠"다. "오타쿠"는 한국에서 병리적인 문화의 하나로 쉬이 취급된다. 여느 게임 사이트에 가면, "덕후"라는 말로 변형되어 일종의 경멸과 비난의 의미로 욕마냥 쓰인다. 한편, 시중에 나와 있는 오타쿠에 대한 몇몇 책들 역시 흥미거리 위주거나 (특히 서양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경우) 오리엔탈리즘으로 채색된 채 뒤틀린 묘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게임 주변에 있다보면 "오타쿠", "모에"와 같은 말이야 흔히 듣게 되지만, 그 소비의 좋고 나쁨을 빼면 과연 어떤 점을 주목해서 봐야할까,에 갸우뚱해지는 경우가 많다.

아즈마 히로키의 책은 이러한 점에서 동시대의 일본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문화 단면에 대한 이론적 개입이다. 그런데, 그 개입이 꽤나 우아하다. 히로키는 오타쿠를 포스트모던의 맥락, 즉 보들리야르에 의해 대중화된 언설로 확산되었고 실제로도 경험되고 있기도 한 시뮬라크르의 소비행태가 구체화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를 위해 히로키가 출발하는 점은 "디지캐럿"이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모호한 상품이다. 디지캐럿은 원래 모태가 되는 바탕의 이야기가 없다. 단편 단편의 캐릭터에서 출발하여 이 캐릭터에 대한 사람들의 취향이 정리, 확대, 분산되고 이를 통해 원래의 상품 자체까지 유동적으로 재조립된다. 요컨대, 디지캐럿에는 "원본" 혹은 가상이라할지라도 의지해야만 하는 모종의 "이야기"가 없는 셈이다.

히로키는 이러한 세계상을 (아주 적절하게도) "데이터베이스"라고 묘사한다. 이 지점에서 묘하게 갈려나가는 것이 앞선 오타쿠 연구자인 오오츠카 에이지가 주장했다는 '이야기 론'이다. 에이지는 건담으로 상징되는 1기 오타쿠 시대를 분석하면서, "소비되고 있는 것은 하나하나의 '드라마'나 '물건'이 아니라 그 배후에 감춰져 있는 시스템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1기 오타쿠들에게 건담의 연표를 외우고 역사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물론, 이렇게 시스템이 일단 파악, 조립되면, 여기에 기반해 다른 작은 이야기를 재조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재조립은 원래의 시스템에 대한 집착이나 의미부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히로키가 파악한 "데이터베이스"론에서는 이러한 시스템 자체가 "구조"로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데이터베이스는 그 본연에 맞게 일정한 계열을 지닌 특성체들의 집합일 뿐이다. 본질에 있어 그 자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이런 기본 입론에서 출발하여 히로키는 아주 엉뚱하지만 매력적이게도 꼬제브를 도입한다. 꼬제브가 비교했던 바, 욕구가 자동적으로 충족되는 "동물화한" 미국과 없는 것을 만들어서까지 뭔가를 갈구해야 하는 "스노비즘의" 일본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개념-역사는 오타쿠 문화를 해부하고 그 진화를 묘사하는 열쇠가 된다. 마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마냥, 책은 2차 대전이라는 단절과 멍에 속에서 스노비즘으로 잉태된 오타쿠 문화가 "데이터베이스"를 거쳐서 동물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감칠 맛나게 그려낸다.

책의 빼 놓을 수 없는 첫번째 미덕은 분명 어려운 이론서임에도 술술 잘 읽힌다는 것이다. 일단, 저자가 이론적인 개념에 대해서 도해를 섞어가며 알기 쉽게 쓴다는 점이 높이 살만 하겠다. 어려운 이론 전개가 항상 쉬울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이 정도의 고려는 독자를 충분히 즐겁게 한다. 미소녀 게임 YU-NO의 분석에 할애된 마지막 장은 전체를 아우르면서도 책 전체의 주제를 구체화하고 있어 뒷맛까지 개운하다.

히로키의 책을 읽노라니, 문득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보다 고상하게 이론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문화나 모멘트들이 많았는데 말이다. 80년 광주가 그랬고, 87년 민주화 항쟁이 그랬고, 잇따른 노동자 대투쟁이 그랬다. 너무 정치적이라는 느낌이 든다면, 인터넷이 도입된 이후 익숙해진 디지털 "폐인" 문화 역시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점들에 대한 표피적인 찬반 논쟁 말고 사회-인류학적인 단순 묘사를 빼버리고 나면, 아즈마 히로키와 같은 이론적인 시도들이 몇 차례나 있었나? 이 점에서 일단 한번 얼굴을 살짝 붉히게 되는데, 이 책을 주류 언론-미디어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얼굴을 붉히게 된다. 고매한 서평으로 다루기에는 너무 싸보이고 경박한 책이란 말인가? 일본 지식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좁은 시야는 여전한 듯 싶다.

http://anarinsk.web-bi.net/blog/?p=549 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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