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바로 경험주의다. [블랙스완]의 검은 백조란 그 경험주의가 지닌 가장 날카로운 칼이다. 모든 확증엔 언제나 예외가 있을 수 있는 법이다. 그 예외를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니콜라스 나심 탈레브의 목소리는 새겨 들을 만 하다. 특히, 위험을 쪼개고 쪼개서--전문 용어로는 증권화라고 말한다--, (금융) 과학으로 포장한 들 원래 위험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바로 작금의 사태가 주는 교훈이다.  

다만, 스스로 수학자이자 사상가를 자처하는 탈레브는 너무 과하게 나갔다. 그는 스스로 딱지 붙인 플라톤주의적인 경제학자들을 비웃고 모든 경제 이론을 조롱한다. 하지만, 그의 조롱은 예측력이야말로 경제학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 만큼이나 무모하고 거침없다. 다수의 경제학/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플라톤주의를 방법론적으로만 혹은 우화적으로만 활용한다. 실제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 하드코어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점에서 이론 자체의 회외를 넘어 '거부'를 선동하는 그의 칼춤은 내겐 위협이다. 그는 (나도 사랑하는) 흄을 계속 언급하지만, 적어도 흄은 회의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이것이 흄에게서 찾을 수 있는 정수다.하지만 탈레브의 회의주의는 그가 혐오하는 플라톤주의를 정확히 뒤집어 놓은, 그래서 적과 지나치게 닮아버린 그런 형상이 되고 말았다.  

"부정의 논리"가 지닌 폭발력은 힐베르트 프로그램을 박살낸 괴델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실증했던 바다. 하지만, 괴델은 그 폭발력을 알았기에 이 날카로운 보도를 매우 조심스럽고 엄밀하게 그리고 절제된 초식으로 구사했다. 그에 반해 탈레브의 휘두름은 얼마나 가볍고 경박한가? 이런 가벼움은 반대로 그의 이론적인 공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내가 알아먹을 수 있었던 행동경제학에 대한 탈레브의 서술이나 만델브로에 대한 그의 수학적인 설명 혹은 정규분포에 대한 악의적 왜곡은 불완전하거나 자의적이고 때론 지나치리만치 사후적이다. 그의 해석이 주관적이라고 확신하게 된 대목은 크리스 앤더슨의 "롱테일"을 이른바 블랙스완의 틀 내에서 너무 쉽게 승인하고 곡해한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롱테일"은 그가 바라보는 나타날 확률이 낮은 검은 백조가 아니라 그저 현금화되지 못한 기회들일 뿐인데 말이다.  

이른바 월가의 투자자들이 그의 책에 열광한다면 오히려 그 논조의 부정성이 지닐수 있을 일말의 타당성/지혜 때문이리라. 아마도, 그들의 립서비스는 이런 "막대구부리기" 하에서 의미가 있을 터인데 (월가에는 현자가 너무 많다!), 책의 볼륨이나 그 논리라는 면에서 막대를 너무 구부린 것이 아닐까 싶다. 한마디로, 절반만 유익하고 나머지 절반은 심드렁한,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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