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식탁 -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김영하, 그에 대한 평가에 내가 짠 건 아마도 빌어먹을 [무협 학생운동사] 때문일 것이다. 뭐 그보다 더한 실수도 숱하게 저지른 내가 대작가가 잠시 삐끗한 것에 이리 박하게 구는 건 너무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이 나에게 준 충격은 그만큼 컸다. 좌우간, 이 경험 이후 나는 쉽게 풀어썼다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에 장대익의 [다윈의 식탁]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 역시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윈의 식탁]을 덮고 난 지금, 풀어쓰는 이야기가 지닌 힘을 제대로 실감하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이 내 경험에 쌓인 풀어쓴 책들에 대한 혐오를 해독할 듯 싶다.  

사실, 진화 생물학이나 심화 심리학은 그냥 이야기하면 벽에 부딪히기 쉽다. 진화란 것이 어차피 추세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추세에 맞지 않는 예외는 얼마든지 발견된다. 이야기 자리에서 이런 예외로 물고 늘어지면 좀처럼 제대로 답변하기가 쉽지 않다. 복거일의 말마따나 발화의 장에서 "단순한 밈"은 "복잡한 밈"보다 언제나 강하다. 어쨌든, 진화 생물학에 대해서 몇 번 이야기하고는 이걸 좀 쉽게 정리해서 누가 풀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푸는 방식에도 여러가지가 있을 터다. 그리고, 대개 가방 끈이 긴 사람들은 '개론'풍으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지식 전달자로서는 당연한 선택이겠지만, 이런 방식의 문제는 그리 재미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 다닐 때, "개론"자 붙은 과목치고 재미있는 것이 있던가? (있었다면 당신은 유능한 교수를 만난 것일게다!) 

 결국, 이 대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글재주일텐데, 일단 장대익의 덕목은 이 대목에서 빛난다. 다윈 이후 가장 맹렬하고 아름답게 폭발한 새로운 진화론을 세운 거인들 간의 논쟁이라니! 인간의 기억은 맥락과 함께 저장될 때 가장 생생하고 확실한 법인데, 이 점에서 이 책은 진화론이라는 보따리를 풀어놓는 가장 친절하고도 흥미로운 방식을 택한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은 내용과 상관없이 그 '설정'에서 먹어주고 간다. 해밀턴의 죽음을 계기로 모인 대학자들이 제한된 시간에 논쟁을 벌인다. 화자는 이 논쟁을 기록한 서기이고, 매 논쟁마다 그의 짧은 코멘트가 붙는다. 내러티브가 결코 내용을 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훌륭한 내러티브는 당의정과 같아서 어려운 내용도 쉽게 소화하도록 도와준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진화를 맛갈스럽게 잘 요리한 그 내용 뿐 아니라 책이라는 상품으로서 대단히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잘 정리된 책의 내용을 반복한다는 것은 구차한 것일 터다. 개인적으로 느낀 아쉬운 세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생물학 쪽의 쟁점들은--잘은 모르겠지만--비교적 잘 정리된 듯 하다. 하지만,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쪽의 내용들은 불균등하거나 듬성듬성한 인상을 받았다. 진화 심리학의 대가인 데이비드 버스는 왜 이 장례식에 오지 않았는가! 첫장에서 "강간"에 대한 내용을 다루어 페미니즘과 온갖 종류의 대립각을 세워온 진화 심리학의 내용을 뒤에 기대했지만, 첫장 이후에는 이와 다시 조우하지 못했다.  

둘째, 메이너드 스미스가 진화의 속도와 그 해석에 관한 대목에서만 등장한 점 역시 아쉽다. 책에서 쟁쟁한 대가들을 불러 모았던 고 해밀턴과 그가  진화 게임이라는 대목에서 맺었던 긴밀한 관계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책에도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스미스의 진화 게임이론은 생물학적인 응용을 넘어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으로 그 폭을 넓혀 나갔다. 하긴, 이미 최정규 교수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이라는 좋은 책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보면 되겠다. 

셋째, 마지막 종교에 대한 논쟁이 종합 토론처럼 들어가 있는데, 보다 폭넓은 주제에 속하는 문화 진화 역시 함께 어울렸으면 어땠을까? 예컨대, 인류학자인 보이드와 리처드슨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문화 진화에 대한 논의 같은 것 말이다. 책에서 진화의 단위에 대한 논쟁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다수준 진화'가 흥미롭게 적용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이 문화 진화이다. 문화와 유전자의 공진화, 문화 진화에서 집단과 개인의 관계 역시 진화론이 가장 흥미롭게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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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전쟁
톰 맥니콜 지음, 박병철 옮김 / 알마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직류와 교류를 둘러싼 논쟁은 산업사나 경제사에서 흔히 거론되는 '안주거리'다. "99% 영감론"으로 잘 알려진 발명왕 에디슨이 사실 그닥 위인된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은 이 안주의 가장 씹기 좋은 대목일 터.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에 의해 도입된 교류 기술(AC)를 저지하기 위해서--보다 경제학적으로 말한다면 자신이 보유한 기술의 경제적인 가치 및 초기투자 비용을 날리지 않기 위해서--직류 기술(DC)을 보유한 에디슨 전기는 비열한 음해 공작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에디슨도 직류를 점진적으로 포기하고 교류를 채택하는 쪽으로 나갔으니, 결국 시장은 효율적인 것을 선택하기 마련이라는 고리타분한 경제학 강의는 집어 치우자. 과연 그들 사이에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 < 프레스티지>에서 흑마술적인 상상력의 원천으로 인용되는 니콜라 테슬라는 에디슨과 어떤 관계였을까? 톰 맥니콜의 [표준 전쟁]은 얇은 농담과 싱거운 교훈의 배후에 놓인 역사의 구체성을 거슬러 간다.

책은 전기의 아버지 에디슨의 지독한 집착과 열정에서 출발한다. 추론과 일반화에 근거한 수학을 싫어했던 인물, 하지만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기 위해서 풀 하나하나를 헤집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 에디슨이다. 이런 품성이야말로,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위인의 덕목이긴 하지만, 저자는 에디슨이 맞이한 시기가 운이 좋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가 활약했던 시기야말로 미국의 산업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다. "그가 20년 쯤 전에 태어났다면 발명가적인 기질을 발휘할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며 20년 쯤 뒤에 태어났다면 이미 모든 물건들이 발명되어 거대한 산업사회의 일개 구성원으로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에디슨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적절한 마음가짐으로 살았던 '운 좋은 천재'였다."

에디슨의 왕성한 발명의 여정은 전기를 이용한 조명 분야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당시 각종 조명의 주류를 이루던 가스등을 전기 기반의 조명로 대체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몇번의 실패와 난관을 넘어 에디슨은 1882년 9월, 오래가는 필라멘트와 직류 기반의 배전 시스템을 통해 가스등에 버금가는 안정성을 갖춘 전기 조명을 뉴욕의 펄스트리트에 공급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에디슨의 기반 기술인 직류은 배전 거리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지녔다. 중앙발전소에서 1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전기를 공급할 때 막대한 전력 손실이 발생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고, 따라서 한 발전소가 담당할 수 있는 서비스 지역이 제한되었다. 경제학의 용어로 말하면, 직류는 전기 생산에서 발생하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은 기술이었다. 반면, 교류는 변압기를 이용하여 쉽게 승압이 가능했기 때문에 굵은 전선 없이도 별다른 전력 손실 없이 먼 곳 까지 전송이 가능했다.

에디슨이 최초로 발열 전구를 발명했을 무렵 이를 지켜보았던 또다른 발명가 웨스팅하우스 역시 전기 기술에 매료되었다. 이미 에디슨이 장악한 직류 전기 시장에서 크게 재미를 못보자 그는 당시 유럽에서 태동했던 교류 전기 기술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직류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웨스팅하우스 사 스스로도 교류 기술의 상업성과 실용성을 확신하기 힘들었지만, 1886년에는 매사추세츠 주의 그레이트 배링턴이라는 소도시에서 최초의 교류 기반 조명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대결의 서막이 오르게 되었다.

직류와 교류의 대결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 기인 니콜라 테슬라다. 각종 문학을 비롯한 매체에서 신비한 인물로 비춰지는 그는 원래 에디슨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고향인 크로아티아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고, 에디슨 전기에 2년간 몸담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 맥니콜에 따르면, 에디슨과 테슬라는 근본적으로 성향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삽질의 반복을 마다하지 않았던 에디슨과는 달리 테슬라는 추상적인 사고와 수학을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이성의 힘을 빌어 단숨에 끝낼 수 있는 일에 하릴없이 매달리는 것은 낭비라는 것이 테슬라의 마음가짐이었던 셈이다. 테슬라가 이미 에디슨 전기에 몸담았던 시절에 개발했던 교류 기반 모터는 에디슨 자신의 주목을 전혀 끌지 못했고, 그가 에디슨 전기를 떠나고도 2년 동안 잊혀졌다.

결정적으로 비어 있던 고리인 교류 기반 모터 구동 체계를 찾고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뒤늦게 테슬라의 다상 시스템을 알게 되었고 그 즉시 특허권을 사들였다. 테슬라라는 날개를 단 웨스팅하우스는 거침없이 비상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에디슨 전기가 차지했던 시장의 일부만 점유하고 있던 웨스팅하우스는 교류 시스템의 장점을 앞세워 한마디로 "규모의 경제"를 본격적으로 실현해 나갔고, 에디슨 전기가 위협을 느낄 만큼 강하게 치고 올라왔다.

바로 이 무렵 등장한 인물이 과학을 빙자한 사기 이데올로그 해롤드 브라운이다. 경제사나 정보통신 관련 책에 에디슨의 악행으로 알려진 "전기의자" 음모론이 실상은 대부분 이 자의 작품이었다. 교류가 직류 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나 이에 기반한 가혹한 동물 실험이 과학자나 전문가들 사이에서까지 인정받았다는 대목은 오늘날에도 눈여겨 봐야 할 터다. 이해가 아직 부족한 상황에서 과학이라는 가짜 당의정이 입혀 놓은 대중에 영합하는 비과학이 지닌 힘 말이다. 직관적인 이해가 쉽지 않은 과학적 담론에 미혹되기 쉬운 현대인에게,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과학 영웅의 출현을 간절히 열망하는 한국인들에게 이 대목은 특별히 유효하다.

책에 따르면, 에디슨이 비록 몇몇 저작과 활동에서 브라운의 주장에 공감을 표하고 이를 사실상 방조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체계적이거나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브라운의 악의에 찬 선정활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에디슨 전기의 후신인 GE도 에디슨을 밀어낸 후 교류 시스템을 채택하였으니, 아마도 에디슨의 브라운에 대한 묵인은 사업적인 필요에 따른 개인적인 타협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듯 싶다.

우선, 이 책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발명왕 에디슨의 99% 근성이다. 근성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인적인 평상심 마저 가졌던 듯 하다. 자신이 운영하던 필름 보관소에 큰 불이 난 것을 보며 아들에게, "얘야, 당장 가서 네 엄마를 모셔오너라. 그리고 엄마 친구들도 모두 오라고 해. 이렇게 크고 멋진 불을 우리만 구경할 수는 없잖니"라고 말했다는 대목에서는 그 담력에 새삼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도 99%의 모범으로서는 역시 손색이 없다.

한편, 맥니콜이 비추는 에디슨은 위대한 발명왕과 음모적이고 악질적인 사업가 어느 쪽과도 거리를 둔다. 오히려 온전한 의미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한 몽상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 점에서 맥니콜은 에디슨이 항상 발명에는 뛰어났으되 이를 사업으로 연결시키는 데에는 서툴렀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컨대 전기에 대한 그의 집착은 다른 한편으로 축전지의 개선으로 향했는데, 이는 전기로 움직이는 자동차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축전지로 움직이는 전기 자동차라는 구상이 석유 자동차에 의해 바로 흔적도 없이 뭉개졌다는 점을 새삼 지적할 필요는 없을 터다. 아울러, 그가 대단위 발전시설을 통해 만들어진 전기를 송전하는 규모의 경제에 관심이 없었던 까닭은 각 지역마다 필요한 만큼의 전기를 생산해내는 국지적 시스템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 산업의 출발을 이룬 영사기 역시 돈벌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니, 사업적인 방면에서는 그는 그닥 재주가 뛰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하지만, 역시 저자가 온당하게 지적하듯, 이런 산업 시대를 넘어선 에디슨의 낭만적이고 몽상적인 꿈들이 오늘날까지도 그를 공허한 "위인" 이상으로 기억해내야 할 까닭이기도 하다. 친환경의 전기 자동차, 대단위 발전 시스템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유연하고 국지적인 송전-배전 시스템이 오늘날 관련 업계의 주요한 화두인 점을 다시 떠올려보라. 이쯤되면, 에디슨의 '사후 복수'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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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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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식인들의 작업은 한국에서 매우 편향적으로 소비된다. 역사적인 내용(일제 시대에 대한 모종의 반성?, 한국의 지정학적 맥락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 우선 잘 팔린다. 다음으로는 카타라니 고진의 예에서 보듯이, 일부 인문학 분야에서도 상당히 (너무 열렬할 정도로) 수용성이 높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젠 시들해졌지만, 한때 열풍처럼 불어닥쳤던 프랑스 지식인들에 대한 쏠림에 비한다면 일본 인문학의 깊이를 우리 같은 일반 독자가 느끼기는 쉽지 않다. 학부 시절, 여름 방학에 읽었던 아사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24살에 완성했다는 사실과 별도로, 당시로서 포스트모던의 사상을 [구조와 힘] 만큼 튼튼히 잘 소화했던 경우를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다른 이들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없거나 여전히 무척 드물다고 본다.)

아즈마 히로키의 책도 이 점에서 놀라왔다. 책의 대상은 한국에서도 이제 꽤 이름을 알린 "오타쿠"다. "오타쿠"는 한국에서 병리적인 문화의 하나로 쉬이 취급된다. 여느 게임 사이트에 가면, "덕후"라는 말로 변형되어 일종의 경멸과 비난의 의미로 욕마냥 쓰인다. 한편, 시중에 나와 있는 오타쿠에 대한 몇몇 책들 역시 흥미거리 위주거나 (특히 서양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경우) 오리엔탈리즘으로 채색된 채 뒤틀린 묘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게임 주변에 있다보면 "오타쿠", "모에"와 같은 말이야 흔히 듣게 되지만, 그 소비의 좋고 나쁨을 빼면 과연 어떤 점을 주목해서 봐야할까,에 갸우뚱해지는 경우가 많다.

아즈마 히로키의 책은 이러한 점에서 동시대의 일본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문화 단면에 대한 이론적 개입이다. 그런데, 그 개입이 꽤나 우아하다. 히로키는 오타쿠를 포스트모던의 맥락, 즉 보들리야르에 의해 대중화된 언설로 확산되었고 실제로도 경험되고 있기도 한 시뮬라크르의 소비행태가 구체화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를 위해 히로키가 출발하는 점은 "디지캐럿"이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모호한 상품이다. 디지캐럿은 원래 모태가 되는 바탕의 이야기가 없다. 단편 단편의 캐릭터에서 출발하여 이 캐릭터에 대한 사람들의 취향이 정리, 확대, 분산되고 이를 통해 원래의 상품 자체까지 유동적으로 재조립된다. 요컨대, 디지캐럿에는 "원본" 혹은 가상이라할지라도 의지해야만 하는 모종의 "이야기"가 없는 셈이다.

히로키는 이러한 세계상을 (아주 적절하게도) "데이터베이스"라고 묘사한다. 이 지점에서 묘하게 갈려나가는 것이 앞선 오타쿠 연구자인 오오츠카 에이지가 주장했다는 '이야기 론'이다. 에이지는 건담으로 상징되는 1기 오타쿠 시대를 분석하면서, "소비되고 있는 것은 하나하나의 '드라마'나 '물건'이 아니라 그 배후에 감춰져 있는 시스템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1기 오타쿠들에게 건담의 연표를 외우고 역사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물론, 이렇게 시스템이 일단 파악, 조립되면, 여기에 기반해 다른 작은 이야기를 재조립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재조립은 원래의 시스템에 대한 집착이나 의미부여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히로키가 파악한 "데이터베이스"론에서는 이러한 시스템 자체가 "구조"로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데이터베이스는 그 본연에 맞게 일정한 계열을 지닌 특성체들의 집합일 뿐이다. 본질에 있어 그 자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이런 기본 입론에서 출발하여 히로키는 아주 엉뚱하지만 매력적이게도 꼬제브를 도입한다. 꼬제브가 비교했던 바, 욕구가 자동적으로 충족되는 "동물화한" 미국과 없는 것을 만들어서까지 뭔가를 갈구해야 하는 "스노비즘의" 일본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개념-역사는 오타쿠 문화를 해부하고 그 진화를 묘사하는 열쇠가 된다. 마치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마냥, 책은 2차 대전이라는 단절과 멍에 속에서 스노비즘으로 잉태된 오타쿠 문화가 "데이터베이스"를 거쳐서 동물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감칠 맛나게 그려낸다.

책의 빼 놓을 수 없는 첫번째 미덕은 분명 어려운 이론서임에도 술술 잘 읽힌다는 것이다. 일단, 저자가 이론적인 개념에 대해서 도해를 섞어가며 알기 쉽게 쓴다는 점이 높이 살만 하겠다. 어려운 이론 전개가 항상 쉬울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이 정도의 고려는 독자를 충분히 즐겁게 한다. 미소녀 게임 YU-NO의 분석에 할애된 마지막 장은 전체를 아우르면서도 책 전체의 주제를 구체화하고 있어 뒷맛까지 개운하다.

히로키의 책을 읽노라니, 문득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보다 고상하게 이론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문화나 모멘트들이 많았는데 말이다. 80년 광주가 그랬고, 87년 민주화 항쟁이 그랬고, 잇따른 노동자 대투쟁이 그랬다. 너무 정치적이라는 느낌이 든다면, 인터넷이 도입된 이후 익숙해진 디지털 "폐인" 문화 역시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점들에 대한 표피적인 찬반 논쟁 말고 사회-인류학적인 단순 묘사를 빼버리고 나면, 아즈마 히로키와 같은 이론적인 시도들이 몇 차례나 있었나? 이 점에서 일단 한번 얼굴을 살짝 붉히게 되는데, 이 책을 주류 언론-미디어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얼굴을 붉히게 된다. 고매한 서평으로 다루기에는 너무 싸보이고 경박한 책이란 말인가? 일본 지식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좁은 시야는 여전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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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경제학 - 세상을 뒤엎고 일상을 흔드는 놀라운 경제 이야기
모이제스 나임 지음, 이진 옮김 / 청림출판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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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 각종 경제학 시리즈가 대유행이다. 아무래도 < 괴짜 경제학>의 여파일테지만, 개그맨이 집에서는 좀처럼 웃기려고 하지 않는 이유를 알량한 '비용-편익'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은 쓸데 없는 책들이 더 많으니 유의하시라.(책의 필자가 오랜 경제부 기자였다는 이유로 거의 모든 언론에서 비중있게 다뤄주는 작태가 바로 경제학 가라사대 담합 혹은 "짬짜미"의 전형일진대!)

좌우간. 모이제스 나임의 이 책은 착상은 좋았다. 세계화 이후 국가가 약해졌다. 선악과 관계없이 이윤에 충실한 범죄 역시 약해진 국가를 뛰어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국가에 대한 그들만의 승리를 일궜다는 것이다. 불량국가가 아닌 모호한 네트워크에 의해 자행된 9.11은 이러한 변화가 임계치를 넘어섰음을 보여주는 방증일 따름이다.

좋다! 이거야 말로, 신자유주의 비판에 바빴던 사람들도 놓치고 있는 치명적인 약한 고리가 아니던가? 신자유주의가 그 자체로 강력한 인센티브를 동반한 세계적인 악을 키웠고 그 위협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세계 체제를 비판하기 위한 쓸모있는 논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이제스 나임의 책은 여기까지다. 여기서 진전이 없다. 단편 단편 읽기엔 흥미롭지만, 마지막에 결론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그야말로 힘이 달린다. 대안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측정한 불량의 정도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인가? 어느 쪽에 대해서도 책에서는 제대로 된 답변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책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현미경을 너무 뒤로 당긴 셈.

그래도 건질 것이라면, "도덕이나 규범 따윈 집어치워!"라고 말하는, 경제학에 과잉충성을 맹세한 하드코어-자유주의자 월터 블록의 < 디펜딩 디 언디펜더블>보다는 이 책이 덜 해롭다는 것이다. 규범과 실증의 구분을 사회과학하기에서도 고집하는 경제학자라고 하더라도 범죄적 현실을 색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실증의 냉혹한 분석(positive economics) 이후에라도 효율성의 이름으로 수많은 '언디펜더블'을 옹호하거나 관대히 보지 말고, 효과적으로 이들을 다스릴 방책(normative economics)을 향한 고민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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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over 2009-03-26 18:0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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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 카너먼 :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들 ㅣ 지식인마을 11
안서원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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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보다는 심리학의 바운더리에 가까운 두 사람을 깔끔하게 잘 정리해냈다. 아무리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더라도 동류 경제학자들이 잘 인용(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군나르 뮈르달이야 '비주류'여서 그렇다고 쳐도, 수리모델로 이론을 전개해서 경제학과 친화성이 높음에도 여전히 경제학 교과서에서 한줄 짜리 인용에 그치는 대표적인 이들이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과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이다.

사이먼의 책은 석사 때부터 언제건 봐야지 하면서도 정작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는지 스스로도 의아해했다고 전해지지만, 사실 그는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폰 노이만 급의 인지도를 지닌 인물이다. 인간 역시 IPS(Information Process System)의 하나로 보고 컴퓨터와의 근친도를 탐색한 그의 문제의식은 탁월한 것이었다. 요컨대, 컴퓨터와 인간의 의사결정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고 보면, 컴퓨터 하드웨어의 한계에 따라서 컴퓨터의 능력 및 프로그램의 설계방식이 정해지듯이, 인간 역시 그 인지력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합리성의 제한이 불가피하다. 주먹구구 식의 규칙, 즉 휴리스틱이란 이런 합리성의 제한이 인간의 의사결정 방식에서 드러내는 특징과 원리를 일컫는 말이다.

책에는 빠져 있지만, 휴리스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학습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때, 경쟁적인 휴리스틱 간의 선택과 진화의 과정은 이 문제를 사회의 차원으로 확대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는 이른바 진화경제학의 연구 패러다임이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이먼의 휴리스틱의 의사결정론에 근거한 사회 시스템의 형성, 재현, 진화는 최신 진화경제학의 연구 경향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한편, 그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카너먼과 트버스키의 프로스펙트 이론은 기존 경제학에 대해서 보다 도발적이다. 카너먼은 경제학의 중핵에 감춰진 '경제인Homo Economicus'을 세심하게 해부하고 회의했다. 특히, 불확실성 하에서 합리성의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져 온 폰 노이만의 "기대효용" 가설이 그 수리적인 정합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현실적인 선택의 맥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거부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카너먼의 연구 프로그램은 경제학이 지주로 삼는 금과옥조들이 제법 배운 사람들, 곧 경제학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하리라 기대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를 다양하게 발굴했다. 예를 들어, "매몰비용에 연연하지 말라"(지난 것은 잊어라)는 가르침은 본전생각이 아쉬운 도박판에선 잊혀지기 십상이다. 그들이 모두 무지한 중생들일까? 일부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시중에 나와 있는 "인생"과 "경제학"을 합쳐놓은 대부분의 책들이 그렇게 목놓아 아우성을 질러대고 있다). 그래서, 이런 무지와 오류는 경제학의 중요한 계몽 대상이 된다. 하지만, 열렬한 계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이 계속해서 망각한다고 해도, 여전히 이들을 고수해야 할까? 당위, 규범과 실증 사이에 쌓아 둔 경제학의 견고한 만리장성이 살짝 허물어질 것도 같은 순간이기도 하다.

여전히 주류에 입성한 것은 아니지만, 카너먼의 연구프로그램은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라는 정식 간판까지 내걸고 업계에서 꽤나 성업중이다. 실험을 통해 경제학의 가르침을 허무는 부정적인 성향이 여전히 강하지만,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심리적, 행동적 속성에 근거하여, 즉 프로스펙트 이론의 성과를 인정하면서 보다 실용적인 정책적 제도적 대안을 모색하는 긍정적인 방향 역시 생겨나고 있다. 실제로, (책에 있는 용어 대로라면 "기준점과 조정 휴리스틱"이라고 할 만한) 조삼모사의 원리는 미국에서 기업 단위의 연금 저축을 늘이는 방안으로 활용되어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짚고 가자. 책은 사이먼과 카너먼의 연구의 내용을 요령있게 소개하고 있지만, 이에서 파생된 보다 구체적인 최근의 경제학의 연구들은 다루지 않고 있다. 심리학의 편에 선 저자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될법 하지만, 책 후면에 적힌 추천사 마냥 "좁은 전공 영역을 고수하려는 편협한 국내의 지적풍토"를 여전히 넘지 못하고 답습한 것은 아닐까? 아울러, 경제학의 선택이론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소개되는 것 역시 업계의 편협함에 물든 나에게는 꽤나 불만이었다. 책에서 일괴암적인 듯 서술된 경제학의 선택이론 역시 꽤나 다양하게 분화된 것이 오늘날의 학문적 현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입문용 도서로 추천할만 하나, 심리학의 편에서만 그렇다. 

김영사에서 야심적으로 기획한 듯한 "지식인 마을 시리즈"에 대해 두 가지만 지적하겠다. 우선, 이 시리즈의 기획의도를 잘 모르겠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타겟으로 삼고 있는 독자층을 나로서는 가늠하기 힘들다. 구성을 보면, 대입용 고급 논술 참고서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 관한 한) 그 내용을 보자면 논술시험의 무기로 쓰이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세부적이다. 해당 분야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지닌 대학생 이상을 타겟으로 했다면 수험용에나 적합할 법한 지도 그리기 대신 보다 상세한 설명을 할당하는 게 옳다. 전략적으로 시리즈의 기획이 뭔가 안맞는 느낌이다. 출판사가 시장을 무시하고 장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논술이라는 달콤한 과실 때문에 발생하는 타협과 왜곡이 그리 개운치는 않다.

두번째로, 100권으로 마감 예정이고 현재 50인까지 분양을 확정한 이 마을에는 아직 경제학자가 단 한 명도 입주해있지 않다. 이걸 보니, 역시 경제학은 끼리끼리 똘똘 뭉치는 성격이 가장 강한 학문이었다! "아담 스미스 & 칼 맑스", "존 메이나드 케인즈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같은 거대한 그림까지 바라지도 않겠다. "가장 제국주의적인 학문"이라는 시기와 비난을 함께 달고 다니는 현대 경제학의 빛과 그림자 정도는 끼워주는 편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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