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이라 불리는 세계와 소년만화의 조우랄까. 판타지 혹은 학원물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게 한없이 다정다감한 만화를 그리고 쓰시는 작가님께 선망을 넘어 질투를 느끼곤 한다. 색으로 비유하면 푸른색 내지 초록색일까. 아니면 투명한 흰색? 부드럽고 매끄러운 그림체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림에 녹아드는 글을 읽노라면 마냥 마음이 느긋해진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만화라는 매체는 다분히 아직까지도 평가절하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산문과 시를 풀어놓은 그림의 위대성을 높이 사지는 못할망정 '순정만화 따위'등의 무지몽매한 비하를 서슴없이 던지는 소수, 혹은 다수에게 의식의 각성을 촉구하고싶다.

주인공인 긍하의 주변 인물들, 한강, 소현민, 최정언 등을 보면 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드러내지 않는 문제를 품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이상하게 유독 긍하만은 보이는 그대로이다. 원만하고 완벽한 가족관계와 무난한 성격, 성적도 상위이고 외모도 귀엽다. 어쩌면 가장 평범한 듯 싶지만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미남 미녀로 선망의 대상이 된 강이나 현민 정언은 긍하와는 다른 부류다.

먼저 강은 어머니가 부재하고 현민은 대단한 집의 손자임을 언급하지만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역시 없으며 강과 정언 사이에서 표류하면서 의도적으로 과장된 행동을 한다. 특히, 정언의 존재는 무게감을 느끼게 하며 고립되어 있다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차갑고 도도하게 비치는 외향의 틀을 스스로 깰 의지도 없고 강을 향하는 감정마져도 성숙된 분석과 의도로 잠재운다. 매력적이지만 외롭고 저 홀로 떨어진 별같다.

아직은 이 만화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가 없다. 긍하가 자신의 감정을 고백할지 혹은 강이 그것을 알아챌지는 미지수다.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전개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것이므로 궁금중을 참고 기다릴 뿐이다. 정말 괜찮을 작가를 좋아하는 아주 괜찮은 독자이고 싶은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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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님의 이전 소설 <장길산>을 읽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소설만큼 현실에서의 삶도 치열했다고 기억합니다. 때로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당신의 책을 펴기가 겁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의 제목을 접하는 순간 마음이 놓였습니다. 분노나 증오의 코드가 아닌 화해와 용서, 인내를 연상시키는 '오래된 정원'이라는 제목때문입니다. 진심으로 반갑고 기쁩니다.

오래된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질긴 생명력의 뿌리를 가진, 그 풀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면서도 존재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못한다. 이름이 없음이다. 그러나 그 잡초가 피워내는 꽃은 얼마나 작고 어여쁜가. 살아남은 이에 대한 열렬한 찬사에 이마가 시릴 기도의 결정체처럼.

오래된 정원에는 추억으로 다져진 마당의 흙과 돌이 뒹군다. 먼지와 거미줄과 이슬의 조화로운 휴식도 깃든다. 말못할 서러움과 고독과 비밀을 빠트린 우물은 텅 빈 어둠을 간직하고 입을 벌린다. 그러나 감나무 잎은 무성히 푸르고 석류꽃은 소담하며 휘드러진 보리똥 나무 열매도 그 선연한 빛깔이 생기롭다.

오래된 정원에는 아무도 다녀가지 않는다. 옛주인을 기다리던 가축도 떠나고 낡은 편지함은 녹이 슬어 허물어졌다. 바랜 기억과 아문 상처를 기억하는 친구도 없고 연인은 먼 나라로 떠났다. 다만 끊임없이 죽으면서도 다시 살아나는 풀만이 정원을 가득 채운다. 죽음은 다시 살아나기 위한 준비라고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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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동이 행성, 우라스와 아나레스.
과거, 우라스의 아나키스트들이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여 이주 후 개척한 행성이 아나레스이며 이 소설은 아나레스에서 태어나 성장한 물리학자 쉐벡의 이야기다.

소유의 개념과 개인 이기주의, 성의 차별이 없는 꿈의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일들을 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였다. 과연 이상이 실현된 후,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며 그것을 발전 혹은 진보라 부를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나레스는 근본적으로 척박하고 황폐한 환경이었고 기근과 가뭄으로 인해 식량배급이 원활하지 않지만 공정한 분배로 인해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 곳이다. 단 지나친 모자람으로 인한 작은 균열이 굳건한 신념에 균열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창의적 개인성을 소멸시키고 억압하는 가운데 불신과 의혹의 싹이 스며들기 전까지 그들의 삶은 평온했다.

천재물리학자 쉐벡으로 하여금 아나레스 밖 우라스로의 망명을 필요케 한 요인은 자급자족의 안일에 안주하고 진보와 발전을 두려워하는 집단이기주의다. 고인 물이 언젠가는 썩어 냄새를 피운다는 것을 증명하듯 다른 별의 사람들과의 소통과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를 갈망하는 창조적인간에게 아나레스의 폐쇄성은 감옥일 따름이다.

물론 우라스도 대안이 아니라는 것도 곧 알게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나라지만 권력과 부의 분배가 평등하지 않고 성차별 등 어둠과 빛같은 양면성을 가진 우라스 사회는 쉐벡에게 지독한 공허와 절망을 안겨준다. 그는 평등한 인류를 위해 그의 지식을 사용하려 하지만 몇몇 권력자의 손아귀가 뻗쳐올 따름이다. 쉐벡의 선택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꿈꾸는 것은 불행이자 행복이다. SF문학은 여기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상상의 물적 증명이자 기회이다. 어슐러 르귄의 상상력이 뿜어내는 이 거대한 오라는 독서하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한다. 상상하는 자의 위대함과 즐거움이 그야말로 축복의 비처럼 쏟아진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각각의 고유한 특색을 지닌 생명들의 안식처라고 할 때, 여기 현실에 사는 자의 고독과 암울은 훨씬 가벼운 데미지를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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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07-03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일 주소를 바꾸면서 잃어버렸던 리뷰. 이렇게 퍼오는 방법이 있었다니..
 
다 빈치 코드 - 전2권 세트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커피가 건강에 해롭다는 할머니 앞에서는 가능한 커피를 멀리하지만 오늘 먹다 내일 죽을지언정 땡기면 마셔야하는 게 커피다. 불량스럽다는 쮸쮸바가 없는 여름날 오후를 무슨 낙으로 견디며, 나른한 권태와 무료를 달래주는 사탕 한 알과 초콜릿 한 조각이 없는 내 가방은 어딘가 허전하다. 초등학교 하교길의 아이들의 손에는 정체를 알지못할 오색의 식품들이 저마다 하나씩 들려있는데 어찌나 맛나게 먹어대는지 바라만봐도 웃음이 난다. 그렇게 삶을 삶답게 하는 먹거리 중에는 불량이라는 꼬리표가 달려있곤 하다.

장르를 가리지않고 읽지만 가장 빠르게 쉽게 읽히는 책은 뭐니뭐니 해도 추리소설이다. 한 권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책을 집어드는 중독성도 그렇거니와 긴 밤과 낮을 가장 근사하게 보낼 방법이 뭐냐고 하면 단연 소설,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 읽기다. 그래서 올 여름의 시작은 '다빈치 코드'라는 댄 브라운의 소설이 테잎을 끊었다. 흥미진진 재밌다. 근사한 피서를 다녀온 기분이다. 마지막 장을 넘기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다음은 뭘 읽지?

책장을 정리하면서 늘 정리의 대상목록에 오르는 것은 흥미위주의 추리나 로맨스다. 두 번이나 세 번은 읽히지 않는다는 것도 이유가 되고 책이 나온 그 시점이 지나면 흥미가 떨어지는 것도 한 이유다. 그래서 제 값을 다 주고 사기가 망설여지는 게 또 추리물이고 읽고싶어도 포기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요즈음 생각해 보니 책에 대한 나의 편견도 상당하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대부분을 남에게 준 것도 아깝다는 생각도 한다. 왜 그랬을까? 이것도 허영심? 혹은 어른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억압과 금기?

불량식품을 향한 본능적인 아이들의 끌림은 싼 값에도 있지만 향과 맛에 있다. 다수의 아이들이 쉽게 접하는 판타지소설에 대한 맹목적 숭배도 그런 것일까? 읽지말라고 소리치는 부모들의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판타지소설에 대한 지나친 탐닉이 제대로된 독서환경을 무너뜨린다는 우려는 어른들의 독선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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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부턴가 초등학교 1학년인 원이의 별명은 '떼쟁이 대마왕'이 되었다. 싫어, 싫어는 기본이고 뭔가를 해라하면 조건을 달기 시작했고, 엄마와 이모의 속을 바글바글 끓이기로 작정을 하였는지 매사에 부정적인 어휘를 구사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밥을 먹이기 위해서도 뭐해줄까? 라는 애원과 부탁조의 말이 앞서나가서 버릇을 고치기는 커녕 한몫을 한다. 에디오피아의 난민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깡말라서는 오가는 유행병이란 병은 다 걸려와서 가족을 고생시키는 이 말썽꾸러기를 어찌해야할 지 모르다가 동생은 급기야 최후의 수단으로 매를 들고 호령하고 만다.

너, 이리와. 맞을래, 먹을래.

이 경우, 오빠인 현이는 쭈뼛쭈뼛 먹다가 토할지라도 먹는 시늉을 하는데, 역시나 원이는 다르다. 매를 드는 시점부터 왕!하고 울기 시작해서 도망을 치는데 결국 애엄마는 매는 사용도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삐져서 울다가 잠이든 아이를 멍하니 바라볼 뿐.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잘 삐지고, 눈물도 많고, 겁도 많냐고 뿌리찾기를 하는 가족들이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집에서는 그렇게 어리광을 피우고 말을 안 들어 구제불능으로 낙인이 찍혔는데 밖에만 나가면 조숙한 숙녀마냥 저보다 어린애들을 챙기고 보살펴준다는 것이다. 숫기도 없어 앞에 나서서 떠드는 일도 없고 조용하고 얌전하다는 평을 듣는다는데, 그렇다면 문제는 저에게는 한없이 약한 엄마나 이모를 의식적으로 골탕을 먹인다는 것. 제일로 만만한 사람으로서 이 경우 정말 난감하다. 애버릇을 고칠 것인가. 알아서 철들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원이야. 언제쯤이면 눈높이를 마주하고 앉아서 세상사는 이야기를 시시콜콜 나눌 수 있겠니? 얼마든지 기다려줄 터이니 아프지말고 무럭무럭 자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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