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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일반판 (2disc)
김지운 감독, 이병헌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본편이 끝나고 여운에 젖어 있다가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부록을 챙겨 보는데 거기에 배우들의 셀프카메라가 등장한다. 아마도 질문이 네 인생의 가장 달콤한 순간을 묻는 모양이던데, 지금 이순간이라고 말하는 중년배우의 여유가 보기 좋았고, 지나간 사진첩을 들추며 하나씩 추억을 얘기하는 신인배우의 미래를 향한 불안감에도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무엇보다 검은색 셔츠차림의, 이전에는 별로 좋다, 라고 생각해본 기억이 없는 배우 이병헌에게 홀딱 빠져들었다.
영화의 시작에서 서늘함을 물씬 풍기며 등장하는 이병헌을 보면서 누굴 닮았더라, 누굴까, 그러다가 늘씬한 다리가 쭉 뻗어나가는 시원한 발차기에 감탄을 하기를 여러 번, 이지적인 과묵함, 차가움과는 다른 무관심, 그리고 절대적인 신뢰가 드러나는 보스와의 독대 장면에서 문득 ‘양조위’를 떠올렸다.
신민아, 라는 배우는 류승범과 주연한 영화 <야수와 미녀>에서 만났다.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는 이미지의 선량한 얼굴, 눈빛이 호감지수를 마구 상승시켰던 기억, 그대로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첼리스트다. 부서질 듯 연약한 외면과 달리 당돌하고 강한 성격임을 처음 이병헌을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저씨 해결사지, 어쩌면 킬러일지도 모를 남자를 향해서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여자라니. 사실 그녀에게 생긴 남자친구를 떨구는 것이 이병헌의 목적인데, 처음부터 여자는 그것을 알았던 듯 싶다. 몰랐다면 이병헌의 존재이유가 불투명하다. 신민아와 팜므파탈은 얼핏 매치가 되지 않지만 또 그녀만큼 어울릴 수도 없다. 불행히도 그녀가 악녀라는 사실은 영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깨닫게 된다.
미묘한, 아주 미묘한 찰나의 순간에 했던 선택이 죽을 죄가 된다는 것을 이병헌은 정말 몰랐을까. 인간의 신뢰라는 게 얼마나 하찮은 것을 계기로 무너질 수 있는 지, 목숨을 바쳐 충성을 맹세했던 보스로부터 배신자라는 오명을 쓴 남자의 선택은 하나다. 오야붕이 실수라고 하면 설령 실수가 아니었더라도 실수했노라고 말해야 하지 않느냐고 보스는 말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지 않듯이, 왜냐고 묻는 보스에게 사실을 설명하는 이병헌의 목소리는 흔들린다. 그는 확신하지 못한다. 보스를 위해서였다고 판단한 결과가 보스를 배신한 걸로 판단되어졌다. 누가 옳고 틀렸건 총구를 들이대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죽어라 하면 죽어야 하고 살기 위해서는 같은 편이었던 혹은 형제였던 이에게도 죽음의 응징을 가해야 하는 게 이 멋진 영화의 본색이니까.
마지막에 에릭이 등장하는 장면은 김지운 감독만의 유머가 아닐까. 대사라고는 한마디로 없이 난데없이 등장해서 살인의 현장에서 주워온 총을 휘갈기는 별로 멋없는 킬러라니. 이미 잔치는 끝나고 불은 꺼지고 음식은 식었다. 그럼에도 자꾸 웃음이 터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쭉 좋아했던 좋아하는 배우 황정민의 연기에는 말을 잃었다. 진짜 진짜 나쁜 놈을 연기하는 배우에게 감탄하기는 쉽지 않다.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남자에게 다가온 달콤한, 너무도 달콤해서 목숨까지 던져버린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 그런 달콤한 시간은 결코 소유해선 안 될 사치였다. 그는 그 대가로 삶을 저당잡혔고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