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p.22~23)


나는 자전거를 탈줄 모른다. 어려서 오빠의 자전거를 훔쳐 타고 놀다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진 후부터 바퀴 달린 모든 게 무서워졌다. 십수 바퀴를 구르는 대형사고였음에도 사방천지가 흙투성이였던 시골인지라 몸은 멀쩡했다. 십대에 이십대에 그리고 삼십대에 몇 번이나 자전거를 타려고 시도했지만 불행히도 실패했다. 내 머릿속의 기억이 죽어도 탈 수 없다고 쾅쾅 대못을 때려 박기라도 한 것처럼.


뜰 앞에 제멋대로 가지를 뻗치고 선 목련나무에 봉우리가 맺혔다. 많아봐야 열댓 개 정도? 키가 너무 커 흉물스럽다고 덜컥 베었다가 후회막급이었는데, 예상대로 작년 여름 내내 사정없이 가지와 잎을 피워 올리더니 드디어 꽃이 피려나 보다. 기원한다. 어서어서 자라 한낮의 볕이 따가워도 끄떡없는 그늘을 낳아다오. 네가 있을 땐 그 유익함을 몰랐다가 네가 사라지고 나니 뼈저리게 알겠더라.


봄이라고 좋아만 할 것도 아니다. 봄이 오니 몸과 마음이 들썩이고 근질거리고 숨이 막히고 짜증이 솟구친다. 쳇바퀴처럼 도는 일상이 참을 수가 없어진다. 최소한의 밥벌이조차도 확 집어던지고 가출하고 싶다. 묵묵히 견디던 삶이 지독히도 환멸스럽다. 할머니의 병이 깊다. 봄이 되면 당당히 두 발을 떼어 땅을 밟으리라 믿었건만, 할머니는 머릿속에 망상과 회한을 품고 호령하신단다. 아파도 좋으니 거기 그 자리에 그대로만 있어달라는 바램이 지나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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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3-10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을 읽었으면서도 왜 저 시를 놓쳤을까 몰라요...
목련이 등불처럼 피어나는데...
할머니....너무 많이 아프시면 안되요. 저 목련 등불 다 지기전에는...안되요

겨울 2006-03-10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는 글귀가 가슴에 와서 박혔어요. 목련꽃잎을 말리면 독한 향을 품은 진한 갈색으로 변해요. 떨어진 게 예뻐서 몇 번이나 주워 말렸다가 낭패를 봤던 기억이... 할머니는, 할머니는 많이 아파 하시지만 힘을 내서 살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요.

잉크냄새 2006-03-12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시절이었죠. 편지속에 떨어진 목련을 넣어보낸 기억이 있어요. 아마 편지가 도착했을 즈음에 가장 남루하고 참혹한 모습이었겠군요. 그래서인지 그 편지의 추억도 결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지 않은건가봅니다.
근데, 김훈의 목련에 대한 표현. 어쩌면 저의 머릿속을 환히 꿰뚫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겨울 2006-03-12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뽀샤시한 꽃잎이 그리 변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김훈의 글은 천천히 읽으면 구절구절이 시 같아요. 목련에 관한 저 부분에서 멈춰서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