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주의자의 책 - 책을 탐하는 한 교양인의 문.사.철 기록
표정훈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먼저 읽은 이들의 극찬 탓인지 무척이나 설레는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펼친 후, 이 책은 잠자리에 들기 전의 노곤한 육체와 의식에 작은 기쁨들을 선사했다. 술 마시는 건 싫어해도 술자리는 좋다는 사람을 싫어하고, 책 읽는 건 싫어도 책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저자 소개란을 읽으며 괜한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는데, 역시나, 모름지기 책이란 이렇게 좋아하고 읽어야않겠냐는 주장에는 가르치려 들지 않는 묘한 설득력이 있다.


‘탐서주의자의 책’이란 대단한 제목에 기가 질려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책의 내용은 지극히 소소하고 소소하여 실망이 들 정도. 물론 이보다 무거웠다면 읽기가 사뭇 버거웠을 터이지만,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조금만 더 알 찬 고갱이 같았으면 싶은 아쉬움은 남는다.


책과 마주치는 기쁨은 사람과 마주칠 때의 기쁨과 똑같다? 아, 전적으로 동의한다. 새로 산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가슴 떨리는 경험은 몇 번을 반복해도 새로우니까. 뭐니 뭐니 해도 책 읽기의 과정 중에서 제일 황홀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는 두꺼운 책을 완독했을 때의 포만감을 토로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 책의 처음을 들여다보던 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책의 마지막을 덮는 순간은 오히려 서운하고 쓸쓸할 뿐이다.


세상의 무수한 책만큼이나 사람마다 책을 좋아하고 읽는 방식도 다양한데, 그 와중에 깨달은 사실 하나는, 나 또한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그 책을 적당한 자리에 놓아두고 보고 즐겼음이다. 그것이 혹여 지적인 허영은 아닐까 전전긍긍하고 누군가 그런 뜻의 말을 비추면 결코 아니라고 발뺌했음이다. ‘지적인 허영’이 뭐 어떠냐고 말하는 저자의 말에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짧은 가방 끈이 부끄러웠나보다.


사람마다 책을 빌려주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나는 절반은 돌려받기를 포기하고 빌려준다. 사실 어떤 책도 반드시 돌려받아야할 책은 없다. 내가 한번 이상은 읽었고 빌려주는 상대가 그 책을 좋아만 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을 빌려간 상대를 보면 반드시 그 책이 생각나고, 행여나 이제는 돌려줄까 기대를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잊어버리면 좋으련만 결코 잊히지 않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지금도 얼굴만 보면 떠오르는 책들이 무수하다. 입안에서는 그 책을 달라고 아우성인데, 밖으로는 한마디도 말이 되어 나오질 않는다. 그러다가 늦어서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책 한권이 돌아왔을 때의 감동이란, 눈물겨움 이상이다.


그리하여 결론은 빌려주기를 최대한 자제하고, 읽고 쌓아놓은 책의 두꺼운 먼지도 청소하고, 한권 한권에 담긴 의미를 되새김질 하듯이 아끼고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새로 산 책만이 아니라 누렇게 색이 바랜 책이라도 아무렇게나 버리는 일 없이 일생을 함께 하리라고 다짐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05-01-18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막 700여쪽의 책을 완독했는데 책장을 처음 넘길때의 황홀함과 마지막 책장을 덮을때의 서운함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이 갑니다. 오래도록 책과 함께하는 일상이 되시길 바랍니다.

겨울 2005-01-2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잖이 나이 드신 분들이 눈이 아파서 책 읽기가 힘들다고 하실 때마다 덜컥 겁이 납니다. 의식은 명료한데 육체는 노쇠하여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더군요. 잉크냄새님의 일상도 책과 더불어 함께 하기를....

비로그인 2005-04-11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마주치는 기쁨은 사람과 마주칠 때의 기쁨과 똑같다..' 떨리는 문장입니다. 리뷰 잘 보았습니다^^

겨울 2005-04-1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반갑습니다. ^^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람 알아가는 과정을 귀찮아했는데, 그것이 엄청난 오만이고 독선임을 이제는 알겠습니다. 책을 대하 듯이 사람 대하기를 한다면 싸울 일도 얼굴 붉힐 일도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