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방 오른쪽 벽면에는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의 포스터가 몇 년을 한결같이 걸려있다. 산 건 아니고 누가 줬는데 기억도 안 날만큼 오래 됐다. 새삼 징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저 영화에 대한 기억과 감상을 아직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걸 보면 포스터에 대해서도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저 영화의 제목은 정말 멋지지 않은가. 이참에 가훈으로 삼아버릴까. 삶이, 생활이 흐르는 강물 같다면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오는 사람 안 말리고 가는 사람 안 붙잡는다, 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정이 뚝 떨어지는 인간(누구의 표현에 의하면)이다. 물건이건 사람이건 집착, 소유와는 무관하다. 어려서야 내 것 내 사람에게 이끌려 발광도 하고 상처도 받고 기쁨도 얻었지만 나이들 수록 드는 생각은 버리면 버릴수록 덜 가지면 덜 가질수록 삶이 가볍다는 거다. 유일하게 끌어안고 살던 책마저도 두 번 읽을 것 같지 않은 것들은 아낌없이 이집 저집을 떠 넘긴다. 주고 나서 살짝, 아쉬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뭐, 어쩌랴.
내게 있어 이 공간은 이름 그대로 서재다. 제목만 넣으면 원하는 책을 찾아서 값을 치루고 마술상자처럼 뚝딱 내게로 오는 멋진 곳이다(서재를 시작하면서 알라딘을 알았다). 발품을 팔지 않아도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산다는 사실이 서재를 처음 시작한 그때는 신기하고 즐거웠다. 또한 이곳은 무한한 여백이 있는 공책이다. 연필 혹은 볼펜을 들어 손가락이 아프도록 꾹꾹 눌러 쓰지 않아도 경쾌한 자판 소리에 취해 자잘한 이야기를 적어나가는 내 공책이다. 일기장 비슷하지만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는 글을 쓰면서 은근한 노출과 적당한 관음을 즐기기도 한다. 문이 있지만 굳이 노크가 필요한 곳은 아니다. 가끔이지만 정다운 사람과 인사도 나눈다. 하지만 열린 공간이니 이런저런 불협화음도 예상한다. 타인의 신념, 실수, 주의, 주장, 요구사항 등 타인의 무수한 말, 글을 적당히 걸러 듣고 읽는 것도 요령이 필요한 시절이다. 세상이 온갖 별별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쯤이야 유치원생도 아니까.
(내겐 일상에서의 모든 문이란 문을 전부 열고 지내는 묘한 습성이 있는데, 잠긴 문 안을 상상하는 일이 두려워서다. 물론 대문을 지나치게 여는 건 삼가야겠지만 집에 사람이 있는 한 우리집 대문은 활짝 열려있어 장사꾼을 비롯한 온갖 사람들이 기웃거린다. 열린 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올 간 큰 도둑이 없음을 감사해야 할까.)
톡, 톡, 톡. 채송화가 피어나는 소리다. 어제만 해도 진분홍색 꽃이 하나 피더니 오늘은 무려 세 송이나 피었다. 장독대 옆에 핀 노란 채송화가 유난히도 예뻐서 오며가며 멈춰 서서 뚫어지게 보게 된다. 내 손으로 옮겨 심어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이토록 기특한(?) 일일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