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겨울 냄새 훅 끼치는 날.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눈을 바라만 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검은색 터틀넥셔츠와 검은색 패딩코트를 걸치고 메말랐던 입술에 핑크색 립글로스와 눈썹 위에는 검은색을 짙게 덧칠한다. 화장이란, 살아있다, 살고 싶다는 소극적이지만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뜬금없이 하면서. 가능한 짧게, 라고 주문을 넣은 머리가 덩그마니 온통 검은색 일색의 옷 무덤 위에 솟아있다. 바라볼수록 맘에 쏙 든다. 짧은 머리가 어울리는 한 머릴 기를 생각은 이제 없다. 점점 짧아져 가벼움의 극치를 이룬 머리를 느낄(?) 때마다 자그만 희열이 솟구친다. 얼마만의 외출인가. 연말부터 지금까지 옴짝달싹도 못했다. 아니, 안했나? 미적지근한 날씨가 그 한몫을 했고, 상황이 어쩔 수 없노라 핑계를 댄다면 그것도 그렇겠지만 결국은 그럴 맘이 전혀 없었다.


오늘이 주말인 것을 잠시 망각하여 은행에 들렀다가 되돌아 나오고, 마트에 가서 귤 한 박스, 두루마리화장지, 세제, 등등 무게가 나갈만한 것들을 골라 배달을 주문했다가 주말에는 불가라는 말에 다 취소시키고, 가방에 넣을 만한 가벼운 것 몇 가지만 골라 계산한 뒤 월요일에 오겠다고 했더니 계산대의 아가씨 친절하게 그러세요, 한다. 떡집에 들러 할머니 좋아하시는 기피인절미를 사고(기피?), 눈을 맞으며 하릴없이 동네를 돌았다. 그러다가 생각난 김에 약국에 들러 활명수를 한 박스 사고, 기분 상으로는 백화점까지 다녀왔으면 했지만 그럴 만큼의 여유가 없는 지라 느릿느릿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옛날에는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 라는 말 무심코 남발했지만 이제 그런 말 쉽게 뱉어내지 않는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게 건강히는 더 이상 덕담이 아니다. 대신 지금처럼만 사세요, 라고 말한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07-01-0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처럼만,,,이라는 말도 얼마나 고마운 말인지요.

비로그인 2007-01-0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몽님!!!!

겨울 2007-01-08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그것조차도 과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정군님. 뜻하시는 바 모두 이루는 멋진 날들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