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의 고층 빌딩과 기타큐슈의 공장 지대, 중국 베이징의 찻집과 다롄의 산업 지구, 인도의 어느 시골 역과 농촌. 이 일련의 장소에서 펼쳐지는 풍경과 담화가 릴레이식으로 차례차례 눈과 귀에 들어오는 일은 영화나 TV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패트릭 스미스의 <다른 누군가의 세기>(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를 읽다 보면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스미스는 일본, 중국, 인도를 종횡 무진하는 공간 이동만이 아니라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시간 여행도 무리 없이 감행한다. 그에게 '아시아'는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공간적으로는 (상실된/되었다고 여겨온) 동양과 서양 사이의 복잡하고 난잡한 "이종 교배(miscegenation)"의 산물이기에, 이 공간 이동과 시간 여행은 "'있는 그대로의 아시아'의 본질적인 측면 몇 가지를 조명"한다는 이 책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방식이었을 터이다. 물론 뒤집어 보자면 시공간을 넘나드는 감각과 상상의 여정이 '이종 교배로서의 아시아'라는 상(像)을 가능케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아시아가 이종 교배의 산물이라면, 그 안에 정통성 있는 족보를 엮으려거나 단일한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는 스스로의 밑바닥에 깔린 논리적 파탄과 정신적 허무주의를 은폐하기 위해 언제나 정치적으로 불순하고 경제적으로 사악한 폭력을 수반하기 마련이었다. 스미스가 여행의 무대로 삼은 일본, 중국, 인도는 물론이고 한반도에서 전개된 근대화 과정도 예외는 아니다.

이는 한반도 남쪽에서 본격적으로 근대화 과정이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등장 이후를 보면 쉽게 수긍이 갈 것이다. 20년 가까이 지속된 박정희 정권의 통치 기간은 하나의 색조로 환원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비균질적인 사건과 관념으로 얽혀 있는 시간대였다. 이 시기에 이승만 정권 이래의 반공 민족주의는 그 목표의 무게 중심을 북진 통일로부터 조국 근대화로 이동시켰고, 국가 주도의 준-사회주의적 계획 경제는 삶의 모든 부문을 전체주의적으로 재조직화했으며, 전통 문화의 선별적 보존과 창조적 날조는 민족의 정통성을 허구적으로 표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 한반도 남쪽에서 진행된 '근대화'란 초가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자 공동체의 구성원이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파괴적 공존의 성립이었으며, 한 편에서 과거를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 편에서 전통을 새롭게 날조하여 보존하는 기묘한 시간관념의 탄생이기도 했다. 그래서 도시와 농촌으로 분리된 공간적 감각은 시간적으로 진보와 퇴보를 표상하는 위계질서를 체화시켰고, 이렇게 전적으로 새로운 시공간적인 지각 양식을 자리 잡게 한 것이 박정희 시기의 근대화였던 셈이다.

그런데 국가 주도의 근대화가 지속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경쟁이 공존으로, 날조된 시간 의식이 진보로 바꿔치기 되었어야 했기에 박정희 정권은 피비린내 나는 폭력을 행사했어야 했고, 그 폭력 위에서 벌겋게 꽃피운 것이야말로 반만 년 역사를 공유한 단일한 민족이라는 신화와 정권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념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즉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민족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는 서구 근대에 적응하려는 데에서 나타난 도착적 시간 의식과 위계적 공간 의식의 산물이었고, 이는 스미스가 서구의 세기라 칭한 19세기에 아시아가 처한 상황의 특징적 현상이었던 셈이다.

이 책의 물음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렇듯 뒤틀린 시공간 의식과 이에 수반된 폭력을 어떻게 기억하고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바로 스미스의 문제의식인 셈이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1960년대 프란츠 파농이 더할 나위 없이 치열하고 분노로 가득 찬 문체로 식민주의의 파괴적 속성을 고발했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이에 뒤이은 일련의 탈식민주의는 서구 근대가 어떻게 비서구 세계를 유린했는지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적 분석을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미스의 문제의식은 파농의 분노나 오리엔탈리즘의 고발이나 탈식민주의의 급진성과 결을 달리 한다. 그는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서구를 좇아 사회 체계를 구축해온 아시아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되, 서구로부터 이입된 문명을 '남의 것'이라고 부정하여 아시아 고유의 특질을 상실된 과거로부터 찾으려는 시도를 향수에 기초한 르상티망이라 비판한다.

물론 오리엔탈리즘이나 탈식민주의의 언설들도 비서구-피식민지 지역의 고유한 전통이나 정체성을 안이하게 긍정하고 낭만화하는 경향에는 비판적이다. 그러나 이들 언설들이 식민주의와 서구화에 급진적 비판을 풍부하게 전개했음에도, 탈오리엔탈리즘과 탈식민주의에 기초하여 어떤 질서와 가치의 구축이 가능한지를 '구성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와 달리 스미스의 강점은 21세기 아시아가 제시하는(해야 하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이를 위해 스미스는 19세기에 시작된 서구화를 이제 '남의 것'으로 평가하는 데에서 벗어나 '자신의 역사'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즉 이제 '이식/수용'이나 '남의 것/나의 것'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 이분법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위축시켜왔던 아시아의 인식과 실천의 구조조차도 상대화하여 역사적인 것으로 평가할 단계에 왔다는 것이다.

이런 스미스의 제안은 서구 근대의 역사 경험과 인식 체계에 대한 폭넓은 안목과 아시아 여러 국가/지역을 오랜 동안 취재하며 축적된 경험에 뒷받침되어 설득력 있는 논리로 다가온다. 특히 19세기에 시작된 서구화가 국가 주도의 생산성 향상을 추구하다가 고도 자본주의의 소비 사회에 이르러 허무주의를 만연시켰다는 역사 과정에 대한 분석은 현재 아시아의 상황을 역사적이고 정치경제학적으로 조망하는 날카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아시아의 서구화, 즉 경제 발전이라는 목적을 국가가 주도하는 패러다임은 전체주의적 통치 체제와 파괴적 경쟁의 내면화에 의해서 뒷받침 되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개인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허무주의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런 현상이 개발 독재에서 소비 사회로 변화하는 가운데 나타난다는 단계론적 설명이 아니라, 개발 독재라는 서구화에 필연적으로 내포될 수밖에 없는 경향성이라는 역사철학적 설명 방식을 택한다.

서구화가 결국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물질적 대상 없는 욕망의 산물이라면, 결국 인간이 세계를 만나고 향유하는 방식이란 실체 없는 기호의 생산과 소비로 귀결될 터이기에 그의 설명은 현재의 문화론적 분석으로 봤을 때도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타자의 욕망이나 기호의 소비와 같은 문화론의 기본 개념들이 이 책에서는 역사적 경험에서 추출된 구체적 사례를 통해 실증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국가 주도의 개발과 파괴적 경쟁과 허무주의적 소비라는 '삼중고'에서 아시아가 벗어날 길은 무엇일까? 위에서도 말했듯이 서구가 난입해 들어와 망가뜨리기 이전의 아시아적 가치에 기대는 일은 무용한 일이라는 것이 스미스의 입장이다. 그런 향수와 르상티망은 심정적 위안은 줄망정 미래를 향한 건설적 전망을 주지는 못한다. 향수와 르상티망은 150년 동안 개인과 공동체가 몸소 겪은 고통스러운 적응의 과정을 깡그리 부정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자동차, 빌딩, 통신 매체 등의 기술은 물론이고 국가, 시장 질서 등의 사회적 질서의 뼈대까지를 좋았던 아시아를 파괴한 폭력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스미스는 이런 향수와 르상티망에서 벗어나 남의 것을 수용하여 적응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든 아시아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자기의 역사'로 바라 볼 것을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서구화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파괴적 폭력과 허무주의를 극복할 길을 아시아가 선도적으로 찾아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제안과 전망은 단순히 아시아가 서구화를 자기의 역사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비판적으로 평가하라는 메시지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아시아의 그러한 비판적 자기 성찰이 고스란히 서구로 되돌아가 서구 자체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시아의 변화를 계기로 서구 주도의 근대 문화/문명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현재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부진이 동아시아 지역 최대의 화두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과연 이 상황 속에서 어떤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져야 할까? 19세기 이래 한반도는 일본을 비롯한 주변 강국에 휘둘려왔다. 이제 중국이 부상하고 일본이 힘을 잃어간다고 할 때, 한반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본-미국의 보폭이 아니라 중국의 보폭에 맞춰야 된다는 생각이 등장할 가능성은 크다.

그것이 단순히 중국 추종으로 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중국의 부상이라는 국면 속에서 어떻게든 번영의 길을 찾는 전략 구상이 지배적이 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스미스의 제안을 감안하면 이런 발상은 매우 19세기적인 것으로, 한국이라는 국가가 살아남을 수는 있어도 파괴적 경쟁과 허무주의에 침윤당한 삶의 의미와 가치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 기호의 생산과 소비가 지배하는 국가-자본주의의 결합은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의 욕망과 기호의 생산/소비를 극복하는 일은 스미스가 말한 대로 서구화와 근대화를 남의 것이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역사로서 온몸으로 끌어안아 성찰하는 일을 요청한다. 그랬을 때 서구인의 세기였던 19~20세기를 극복할 수 있는 세기가 도래할 것이다. 그 세기는 결코 아시아의 세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세기(Somebody else's Century)", 즉 '모두의 세기'일 터이다.

그의 욕망을 욕망해야 하는 타자인 서구인의 자리에 아시아인이 온다면 누군가가 아시아인의 욕망을 욕망할 것이기에 위계 구조는 재생산된다. 따라서 이 '누군가의 세기'는 '주인 없는 세기'이어야 하며, 스미스는 21세기 아시아의 경험 속에서 이 도래할 세기에 대한 청사진을 조심스레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가 단순히 '국격'이나 '경쟁력' 향상의 세기가 아니라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일신하는 새로운 세기로 만들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세기>는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해준다. 이 책과 더불어 '나'를 주인이나 주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만들기 위한 여정을 떠나보는 것도 무더운 더위를 나는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며 두서없는 독후감을 마무리해본다. 
 

/김항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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