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
줄리언 반즈 지음, 권은정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랑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시퍼런 칼날을 겨누고 있는 것. 사랑에 빠질 때는 모르다가 헤어지는 순간 그 칼날에 베인 상처로 아파하는 것. 그리고 누군가는 그 칼날에 자신의 삶이 처참히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줄리언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은 그런 사랑의 상처입은 모습에 대한 이야기다.

서른 여덟의 역사학과 교수인 그레이엄은 전직 여배우인 앤과 사랑에 빠져 그의 부인 바바라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날 과거에 앤이 출연했던, 앤의 정사장면이 담긴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그의 결혼 생활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한다. 앤이 출연한 모든 영화들을 뒤지면서 그는 그저 과거의 환상 속에서 존재하는 남자배우들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러면서 그의 일상은 그녀의 과거에 대한 집요한 집착으로 물들어간다.

그런 그에게 친구 잭은 충고한다. 앤을 덜 사랑하라고. 그러나 그레이엄은 불행하게도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상태이다. 그는, 앤이 키우던 화초가 죽었을 때,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앤과는 달리) 앤이 그것을 키우던 모습이 생각나 울었던, 그리고 앤이 출근한 후 제일 먼저 일기장을 꺼내서 그녀가 입고 나가는 옷이 무엇이었는지 적어두는, 그렇게 사랑에 거리를 두기에는 이미 바짝 다가서 버린 상태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싹트는 '질투'라는 감정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져보려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의 머리 속에서 질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는지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질투의 대상이 그녀의 과거라는 사실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것도 그토록 분별 있다고 자부했던 자신에게 말이다.

"이 질투, 원하지도 않은 원망에 찬 이 감정은 그저 사람을 괴롭히기만 하려고 이렇게 서성거리고 있는 것인가? 귓속의 중이처럼 균형감각을 깨뜨리려고만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맹장처럼 염증이 퍼지면 잘라내야 할 존재인가? 그러나 질투를 어떻게 떼내버릴 것인가?"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해도 할 수 없는, 파멸의 과정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해독 불가능한 욕망이었고 집착이 아니었을까.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욕망과 집착이 가득한 한 남자의 스산한 내면 풍경을 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이러한 파멸이 지나친 사랑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가진 욕망의 이해할 수 없는 결과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하기가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마음 속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이상한(?) 기제가 작용한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피하게 타인과 내 욕망 사이에서 이상적인 연결 지점을 찾아야 한다. 그 연결 지점이 엇갈리면 사랑은 흔들리고 존재 자체또한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런 위협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줄리언 반즈의 다른 소설들보다 읽기가 더 힘들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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