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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ㅣ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12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림원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두운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이가 존재할까. 상처의 크기가 작든 크든 누구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단지 잘 잊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자꾸만 솟아오르는 기억의 그늘 속에서 괴롭힘을 당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그 부끄러운 기억을 표면 위로 끄집어 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두운 기억의 그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고서야 힘든 일이다. 그런데 아니 에르노는 과감하게 그 어두운 기억을 들추어 낸다.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 <부끄러움>에서 용감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작가가 열두 살 때 경험한 이 사건은 그녀 평생을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부끄러움에 편입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동기다.
식료품점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집안환경 탓에 잠옷이나 가운을 사치품으로 여기며 부모님과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그리고 드나드는 손님들을 신경 쓰며 모든 것을 조심해야 하는 그런 생활들은 어린 여자 아이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립학교 친구들 앞에서 가운을 걸치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 집안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폭력과 가족들의 억세고 투박한 여러 가지 행동들 속에서 다시 확인하는 부끄러움. "나에겐 어떤 일이건 일어날 수 있고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부끄러움 뒤에는 오직 부끄러움만 따를 것이란 느낌" 이제 그녀의 부끄러움은 자신의 삶을 규정짓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런 부끄러움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흔히 느끼는 그런 부끄러움과는 비교될 수조차 없다.
쉬이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솟아 나와 괴롭히는 감정들, 그리고 기억들. 이젠 지겨울 만도 하건만 그래도 끈질기게 반복되는 삶의 원시성. 그 이해할 수 없는 원시적인 삶의 모습 앞에서 나 자신또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녀의 문장이 더욱 더 가까이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체험이 녹아있기에 더욱 공감을 자아내게 하는 글들. 건조하고 메마르지만 진실된 힘을 가진 문장들. 부끄러움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부끄러움 앞에서 오히려 더 당당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건 고백이라는 것이 가지는 투명한 자아 성찰의 힘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