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4주년, 서울리뷰오브북스 17호 출간!💥

2020년 12월 창간준비호와 2021년 3월 창간호로 출범한 서리북이 어느새 네 번째 돌을 맞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탄핵 소추안 발의와 의결, 최초의 현직 대통령 체포·구속영장 발부와 집행, 내란 혐의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심판,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해 이어지고 있는 극한의 갈등과 대립까지, 엄혹한 시간 속에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거듭 곱씹는 한때입니다.

이번 서리북 17호 표지에는 책들 사이로 헌법-꽃이 꽂혀 있습니다. 위태로워 보이는 한편, 물을 주어 살려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모습입니다. 매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던 수도사가 어느 날 마침내 나무에 온통 꽃이 만발한 모습을 마주했다는 우화처럼, 우리의 헌법-꽃도 다시금 활짝 피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서리북 17호 출간 소식으로 찾아뵙습니다.

이번 호 특집 리뷰에서는 ‘헌법의 순간’*을 지나는 지금, 우리에게 나침반이 되어 줄 네 권의 책을 만나봅니다.

* 이번 특집 제목은 특집 리뷰에서 다루는 박혁의 『헌법의 순간』(페이퍼로드, 2024)에서 따왔습니다.


○○○
"특집 리뷰: 헌법의 순간"

박혁의 『헌법의 순간』, 이철희의 『나쁜 권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헤린더 파우어-스투더의『히틀러의 법률가들』, 에드워드 와츠의 『독재의 탄생』으로 보는 제헌헌법, 탄핵의 정치학, 법과 정의의 관계, 공화국 몰락의 역사

"리뷰"
『작별하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한강 작가의 문학 세계를 이야기하는 문학평론가 서영채의 서평부터,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참사가 반복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구하는 재난사회학자 박상은의 『사고는 없다』서평까지

"고전의 강"
인공지능의 대부 마빈 민스키의 고전, 『마음의 사회』

"이마고 문디"
큐레이터 김홍희의 『페미니즘 미술 읽기』를 통해 조망하는 동시대 한국 여성 미술의 지형

"북&메이커"
큐레이션 서점 ‘어쩌다 책방’과 함께한 지난 10년을 돌아보는 김수진 디렉터의 회고

"디자인 리뷰"
《뉴스페이퍼》와 전단 프로젝트 《이건 연애편지가 아닙니다》로 보는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

"문학"
이만교 작가와 박지니 작가의 에세이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서 할인 혜택 및 사은품(특별판 『읽기의 최전선』 또는 한 호 더, 리뷰노트)과 함께 서리북 17호를 정기구독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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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엉망진창

 

 

우선, 인용 하나.

어느 날, 달걀 껍데기 속에서 맥주를 빚던 이가 거기 빠져 몸을 데었다. 이 광경을 바라본 벼룩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벼룩 옆에 있던 문짝도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이가 데었기 때문이야.” 벼룩의 대답에 문짝은 갑자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이 소리를 듣고 빗자루가 왜 그렇게 삐걱거리느냐고 묻는다. 문짝이 대답한다. “어떻게 내가 삐걱거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는데.” 이 소리를 들은 빗자루는 갑자기 방을 쓸기 시작한다. 마차가 지나가다 이 장면을 보고 왜 비질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빗자루는 답한다. “어떻게 내가 비질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짝은 삐걱대는데.”

이에 마차는 갑자기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길가의 거름더미가 왜 그렇게 달리느냐고 마차에게 묻는다. 마차는 대답한다. “어떻게 내가 달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짝은 삐걱거리지, 빗자루는 비질하고 있는데.” 거름더미가 미친 듯 타오르기 시작한다. 근처의 작은 나무가 왜 그렇게 타느냐고 묻는다. 거름더미는 답한다. “어떻게 내가 타지 않을 수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짝은 삐걱거리지, 빗자루는 비질을 하지, 마차는 내달리고 있는데.” 이 소리를 들은 나무는 온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젊은 여자가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다가 나무에게 왜 그리 흔들어 대느냐고 묻는다. 나무는 대답한다. “어떻게 내가 온몸을 흔들지 않을 수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짝은 삐걱거리지, 빗자루는 비질을 하지, 마차는 내달리지, 거름더미는 타고 있는데.”

여자는 그렇다면 난 내 물동이를 깨뜨려야겠군이라 말하고는 들고 있던 물동이를 깨버린다. 샘물이 놀라 왜 물동이를 깨느냐 묻자 처녀는 대답한다. “어떻게 내가 물동이를 깨뜨리지 않을 수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짝은 삐걱거리지, 빗자루는 비질을 하지, 마차는 내달리지, 거름더미는 타고 있지, 나무는 온몸을 흔들고 있는데.” 샘물은 말한다. “맙소사, 큰일이로군! 그렇다면 나는 마구 흘러내려야겠군.” 샘은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이 바람에 처녀, 나무, 거름더미, 마차, , 벼룩, 이는 다 휩쓸려 빠져 죽었다.

그림 형제의 ()와 벼룩이라는 동화다(그림 형제, 1999: 192-195). 몇 년 전 우연히 그림 형제 동화 전집을 펼쳐 보다가 이 이야기를 발견했다.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숨겨진 지혜나 비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묘한 매력이 있었다. 뭔가가 저기 있다. 중요한 인식적 가치를 지닌 무언가가 저 이야기 속에 있다. 무언가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다가 나는 그림 형제의 이와 벼룩이 서술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세계가 사회 이론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이 그리는 세계가 그것이다. (김홍중, 그림형제와 라투르: ANT 서사기계에 대한 몇 가지 성찰, 문명과 경계, Vol.6, 2023.3, 13-48.)

 

이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후, 김홍중 선생은 이솝의 <이와 벼룩> 동화를 끄집어낸 이유가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크워크 이론이 그리는 세계와의 유사점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번에는 스토리 리부트: 이야기는 어떻게 생성되는가(김만수 지음, 알렙 펴낼 예정)에 실린 글 인용. 여기서 소개하는 <이와 벼룩> 이야기는 그림 형제 원작, 김경연 옮김, 그림 형제 민담집(현암사, 2012), 190쪽에서 요약했다.

두 번째 인용.

 

그림 형제 민담집에 실린 이와 벼룩은 참 엉망진창이다. 한 집에 이와 벼룩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달걀껍데기에 맥주를 빚다가 그만 이가 맥주에 빠져 화상을 입고 말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벼룩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사연을 들은 문이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또 그 사연을 들은 작은 빗자루가 바닥을 쓸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사연을 듣는 순서대로 수레가 달리기 시작하고, 거름더미가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하고, 나무는 몸을 흔들기 시작하고, 소녀는 물동이를 깨뜨린다. 화자는 물동이를 깨뜨리는 소녀에게 소녀야, 왜 물동이를 깨버리니?”라고 묻는데, 소녀의 답변은 매우 길지만 단순하다. “물동이를 깨뜨리지 않을 수 있겠어? 이는 화상을 입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은 삐걱거리지, 빗자루는 쓸고 다니지, 수레는 달리지, 거름더미는 타오르지, 나무는 몸을 흔들지.” 물론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데, 이들의 대화를 엿듣던 샘물이 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 참, 그렇다면 나는 밖으로 흐르기 시작해야지.” 샘물은 깜짝 놀라 밖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소녀, 나무, 거름더미, 수레, 빗자루, , 벼룩, 이 모두 물속에 빠져 죽고 만다.

이와 벼룩이 맥주를 빚는다는 상황 자체도 황당하고, 별것도 아닌 남의 일에 뛰어들어, 모두가 엉망진창이 된다는 이야기 자체가 정말 엉망진창이다. 왜 민담의 전승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을까. 민담의 수집가나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이야기가 엉망진창인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엉망진창일 수 있다는 것, 인생살이의 전후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우리 인생의 우여곡절이 맥주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등을 이런 방식으로 전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근 이 민담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 Network Theory, ANT)’이 사회 이론에 기여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에 멋지게 인용되었다. 라투르는 사회학 이론이 추상적 개념과 복잡한 공리의 집합이 아니라, 독특한 서사와 감흥의 힘으로 충만한 이야기여야 함을 강조한다. 사회학 이론은 체계화된 담론이 아니라 파괴, 관조, 서사의 복합적인 수행이라는 것. 그는 이를 독특한 서사 기계라 명명한다. 세계는 이론과 상관없이 이미 맹렬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론은 그의 맹렬한 말을 들어주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는 이와 벼룩이 말하는 것도 맹렬히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주석으로 김홍중, 그림형제와 라투르: ANT 서사기계에 대한 몇 가지 성찰, 문명과 경계, Vol.6, 2023.3, 13-48.을 달아두었다.)

 

위의 김홍중 선생님의 글이나 김만수 선생님의 글이 일맥이 상통하다는 점 외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알렙에서 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와는 공통점이 없는 또 다른 <이와 벼룩> 이야기. 이번에는 한국 설화이다.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세 번째, 이것 또한 인용.

 

옛날 어떤 중이 깊은 산골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그런데 옷에 이가 끓어 중을 마구 물어뜯었다. 그럴 때마다 중은 정신이 집중되지 않아, 전념하여 도를 닦을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중은 이들을 불러 놓고 약속을 했다. “이봐, 내 말을 들으라고. 아무리 너희들이 미물이라지만, 내가 지금 도를 닦는데 그렇게 방해를 해서야 쓰겠니? 그러니 앞으론 내가 도를 닦는 동안은 절대로 물지 말고, 쉴 때에만 물도록 해라. 내 말 알아듣겠니?” “, 알았어요.” “그리고 이 약속은 절대로 다른 것들에겐 말해선 안 돼. 그것도 약속하겠니?” “알았어요. 염려하지 마세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는 우연히도 벼룩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벼룩이 이를 보고 이상한 질문을 했다. “, 이야. 넌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도 오동통 살이 쪘느냐? 참 부럽다야. 그 방법 좀 내게 가르쳐 주지 않을래?” 이는 살이 쪘다고 벼룩이 칭찬하는 소리를 듣자, 어깨가 으쓱해지며 코가 시큰했다. 이런 칭찬 소리에 팔려, 이는 그만 중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자랑삼아 그 비밀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벼룩도 이처럼 중이 도를 닦다가 쉬는 때를 기다려 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중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고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옷을 활활 벗고는 자기 옷을 불에 태워 버렸다. 이 바람에 옷에 있던 이도, 벼룩도 그만 다 타 죽어 버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무엇이 살생을 금하고 수도에 정진하라는 스님의 마음에 불을 질렀을까. 물론 스님은 이도 벼룩도 직접 잡아 죽이지 아니하고, 자신의 옷을 불태웠을 뿐이다. 다만, 그 옷에 이와 벼룩이 있었을 뿐이고.

인과응보. 약속을 깨뜨리고 비밀을 누설한 이나 중의 몸에 붙어 살을 물어뜯는 벼룩이나, (미물이라도 생물이라면 억하심정이야 있겠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죄지은 존재. (=인과)는 곧 응보(관계)라는 게, 이 설화의 교훈이다.

 

서양의 아이소포스(이솝)의 우화는 삶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말해 준다. 경기도 포천에 구전되는 이 우화도 뚜렷한 인과관계는 없음을 보여준다. 다만, 약속을 깨고 비밀을 터뜨리면 응당한 대가가 따른다. 자고로 말이 많으면 안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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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유럽중심 비판이론의 한계와 글로벌 사우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하는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남의 인식론』 중에서 <서론> 부분을 요약하며 읽은 내용입니다. 원문은 원고지 150매 이상의 긴 글입니다.

서론 서구중심의 비판이론 및 정치적 상상력과 거리두기

이제는 다른 시선을 가질 때

20세기 이후, 유럽 중심의 비판이론은 자유와 평등, 해방을 꿈꾸는 정치적 상상력의 핵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전통은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남의 인식론』 서론에서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는 서구중심의 비판 전통과 거리두기를 시도하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해방적 정치 상상력과 이론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산투스 교수에 글에 따르면, 서구 비판이론의 다섯 가지 한계를 짚을 수 있습니다. 그가 내놓는 진단과 분석은 명쾌한 언어로 표현됩니다.

먼저, 강한 질문에 약한 대답. 인권, 민주주의, 발전 등 서구적 원칙들은 현실의 모순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 글로벌 사우스의 저항과 투쟁은 이러한 개념들의 한계를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둘째, 끝없는 자본주의의 종말. 자본주의의 위기를 비판하면서도, 유럽 중심 이론은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다양한 시도들(예: ‘수막 카우사이’, ‘공동체적 사회주의’)이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셋째, 끝없는 식민주의의 종말. 정치적 독립이 식민주의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산투스 교수는 내부 식민주의가 지속되고 있으며, 문화적・인종적 억압의 심화를 지적하면서, 탈식민적 연대를 모색합니다.

넷째, 시간성의 딜레마: 긴급성과 문명적 변화의 충돌. 기후위기, 불평등, 전쟁 등은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면서도 장기적 문명 전환을 동시에 필요로 합니다. 산투스 교수가 중심이 되었던 세계사회포럼은 이 두 시간성을 조화롭게 결합하려는 실험장이었습니다.

다섯째, 비판적 명사의 상실과 이론과 실천의 유령적 관계. 산투스 교수는 비판적 명사 즉 사회주의, 혁명 등 본래의 비판적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대신 형용사 중심의 수식어로 대체되면서 비판의 힘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실천은 원주민, 여성, 농민 등 새로운 주체들이 이끌고 있지만, 기존 이론은 이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세계사회포럼 이후의 인식론적 전환. 세계사회포럼은 북반구의 중심적 이론을 탈중심화하고, 남반구의 다양한 실천과 지식이 동등하게 평가받아야 함을 보여주기 위한 운동과 실천입니다. 이제 우리는 과학적 지식뿐 아니라 토착 지식, 대중 지식, 종교적 지식까지 포함하는 ‘지식의 생태학’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도 요점이죠. 우리는 지금 ‘근대적 해결책이 더 이상 없는 근대적 문제들’을 마주한 전례 없는 과도기에 살고 있습니다. 전통적 전위 이론은 놀라움과 낯선 실재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실천을 따라가고, 해석하며, 번역하는 ‘후위 이론’입니다. 이는 남반구에서 비롯된 경험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상호문화적 대화를 통해 새로운 해방의 길을 모색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글로벌 사우스의 시선으로 세계를 다시 보다.

이 글이 전하는 가장 큰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더 이상 서구 이론만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없으며, 그 외의 수많은 삶의 지혜와 정치적 실천을 배워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좌파 이론의 재구성, 해방의 새로운 상상력은 ‘남으로 향함’에서 시작됩니다.

한국은 이제, 지구상의 최빈국에서 불과 몇십 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하죠. 눈 떠보니 다시 후진국이 되었다고도 하고 독재 국가로 진행한다고도 합니다만, 현재 한국의 경제력과 민주주의력으로 봤을 때 글로벌 사우스가 아니라 글로벌 노스 쪽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근대적 해결책이 없는 근대적 문제들이 여전한 한국 사회가 마주한 전례 없는 과도기’에, 산투스 교수의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Epistemologies of the South: Justice against Epistemicide)』는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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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북 17호(2025 봄) 출간 임박! 🌱
CONTENTS

  1. 💥 서리북 17호 COMING SOON! ― 특집. 헌법의 순간
  2. 📚 서리북 16호 다시보기 ― 이동진, 조천호, 정은진의 리뷰
  3. 🎉 창간 4주년 기념 정기구독 이벤트
  4. 🚚 정기구독자 배송정보 변경
안녕하세요, 서울리뷰오브북스(이하 서리북)입니다. 긴 겨울이 가고, 비로소 봄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올봄으로, 2020년 12월 창간준비호와 2021년 3월 창간호로 출범한 서리북은 어느새 네 번째 돌을 맞습니다. 지난 12월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탄핵 소추안 발의와 의결, 최초의 현직 대통령 체포·구속영장 발부와 집행, 내란 혐의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심판,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관통해 이어지고 있는 극한의 갈등과 대립까지, 엄혹한 시간 속에서 책을 읽고, 책에 대한 글인 서평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거듭 곱씹는 한때입니다. 이번 서리북 17호 표지에는 책들 사이로 헌법-꽃이 꽂혀 있습니다. 위태로워 보이는 한편, 물을 주어 살려야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모습입니다. 매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던 수도사가 어느 날 마침내 나무에 온통 꽃이 만발한 모습을 마주했다는 우화처럼, 우리의 헌법-꽃도 다시금 활짝 피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서른일곱 번째 우주레터의 문을 열어 봅니다.📚 
서리북 17호 COMING SOON!:
특집. 헌법의 순간

17호 특집 리뷰의 주제는
‘헌법의 순간’입니다.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탄핵 소추안 발의와 의결, 최초의 현직 대통령 체포·구속영장 발부와 집행, 내란 혐의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심판, 그리고 지리한 정치적 공방과 법정 다툼이 이어지면서 많은 국민들의 놀란 가슴은 아직도 쉽게 가라앉지 못하고 있다. 그사이 응원봉 시위,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특검법 발의와 거부, 이상하리만치 급격히 오르내리는 여론조사 결과 등, 평범한 일상을 앗아 가는 속보의 연발로 인해 갑자기 온 국민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정치권과 사법권 소식에 쏠렸다. 무엇보다도 많은 이들이 헌법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이 합헌이고 무엇이 위헌인지 법 조항 하나하나 따져 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새삼 걱정스러운 것은 자유나 민주, 공정 등의 단어의 의미를 오염시켜 온 정치권의 일부 세력들이 이제 ‘헌법’이라는 단어의 가치와 공정성마저 제멋대로 재단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년 이맘때 발간한 《서리북》 13호에서도 ‘민주주의와 선거’라는 제목의 특집을 다룬 적이 있었는데 정확히 1년 만에 다시 정치적인 주제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번에는 특별히 ‘헌법’이라는 단어에 더욱 집중할 특별한 상황이 마련되었다. 그래서 이번 호 특집의 제목은 ‘헌법의 순간’으로 정했다. 유정훈 편집위원이 서평을 쓴 박혁의 책 『헌법의 순간』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시의적절하게도 현재 우리의 관심사를 가장 잘 반영해 주는 촌철살인의 경구라 생각했다.”

― 정우현 편집위원, 「편집실에서」


유정훈, 이용우, 이황희, 김경현특집 리뷰: 헌법의 순간’을 서리북 16호에서 만나 보세요!
헌법을 공부하는 슬픔과 기쁨
유정훈의 『헌법의 순간』 리뷰

우리는 지금 뜻하지 않게 헌법의 순간을 맞아 그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 ‘전 국민이 헌법을 공부한다’는 말을 듣고 웃어넘길 수가 없다. 법률가들조차 거의 볼 일이 없던 헌법 제77조 계엄 관련 내용을 읽어 보고, 대통령 권한대행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논하고, 국회가 선출한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명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 지금은 헌법을 공부하는 슬픔이 앞선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는 헌법을 공부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그리고 다른 수단으로 헌법을 공부하는 즐거움이 많은 사람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일부 권력자만의 것도 아니고 국란 극복의 시간도 아닌, 국민 모두의 헌법의 순간을 맞게 되기를 소망한다.

📖 대상 도서  
『헌법의 순간』
박혁 지음, 페이퍼로드, 2024  
탄핵의 딜레마
이용우의 『나쁜 권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리뷰

12·3 비상계엄 사태로 촉발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의 진행 과정에서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지탱하는 서로 다른 이해를 갖는 집단의 사회적 합의 절차로서 정치를 없애고 극단적 대립과 헌법 기구 자체를 부정하는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 사실 이는 탄핵 제도가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완전성에 기인한다. 이 불완전성은 법적 정당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보완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금의 탄핵 정국이 단순히 한 권력자의 축출 여부를 넘어, 민주적 헌정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계기가 될 것인지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이철희는 이번 탄핵 국면에서 우리가 탄핵 제도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민주주의를 지켜 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 대상 도서
『나쁜 권력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이철희 지음, 메디치미디어, 2024

법은 어떻게 정의와 멀어지는가
이황희의 『히틀러의 법률가들』 리뷰

나치에 의한 법의 타락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같은 법의 타락을 방지하는 과제도 자연적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이 역시 그러한 타락을 막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의 대상이다. 법의 정당성을 내재적으로 산출해야 하는 근대 입헌주의에서 법은 민주적으로 제정된 실정법이며 헌법이 정한 요건에 따라 비로소 확정된다. 그러나 헌법이 정한 요건 자체만으로 법의 타락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타락을 막는 최후의 방벽은 정의로운 법에 의해 통치되기를 원하는 국민의 요구와 이를 위한 실천이다. 법에 대한 최종적인 감독자는 법의 궁극적인 작성자인 국민이기 때문이다.

📖 대상 도서  
『히틀러의 법률가들』
헤린더 파우어-스투더 지음, 박경선 옮김, 진실의힘, 2024  
로마 공화국의 몰락, 역사는 반복하는가
김경현의 『독재의 탄생』 리뷰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한국 사람들은 민주적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열심히 싸워 왔고, 그 제도를 유지하는 일도 감탄스러울 만큼 잘했다. 소통과 협조에 의한 통합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책임감 있는 정치가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정치가에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공화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폴리테이아(politeia)’가 도시국가를 의미하는 ‘폴리스(polis)’와 시민으로 행동한다는 의미를 지닌 ‘폴리테우오(politeuo)’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현재 민주공화국에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잘못은 반복될 수 있다.

  📖 대상 도서
『독재의 탄생』
에드워드 와츠 지음, 신기섭 옮김, 마르코폴로, 2024
이 밖에도 『페미니즘 미술 읽기』를 통해 한국 여성 미술가들과 큐레이터 김홍희의 ‘쓰기’를 논하는 현시원 편집위원의 이마고 문디(「모든 여자들은 쓰고 있다」)와 올해로 10년을 맞은 큐레이션 서점 ‘어쩌다 책방’ 김수진 디렉터의 이야기를 담은 북&메이커(「어쩌다 책방을 운영하게 됐을까」)부터,

『작별하지 않는다』를 중심으로 한강 작가의 문학을 톺아보는 문학평론가 서영채의 「한강,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문학」,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의 『전쟁은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다루며 전쟁과 인간의 본성을 논하는 편집위원 이석재의 「전쟁을 안 하면 인간이 아닌가」, 『사고는 없다』를 통해 사고를 시스템적으로 이해하는 재난사회학자 박상은의 「그 어떤 작은 ‘사고’도 시스템의 문제다」까지, 시의성 있는 다채로운 리뷰들이 실립니다.

17호도 많은 기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서리북 16호 다시보기:
이동진, 조천호, 정은진의 리뷰
16호(2024 겨울) 〈리뷰〉 코너에서는 지난해 한국 사회를 강타한 ‘의료 대란’을 다루는 『뒤틀린 한국 의료』와 폭염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폭염 살인』, 그리고 누구나 저마다의 속도로 배울 수 있는 디지털 교육의 가능성을 들려주는 『우리는 모두 다르게 배운다』까지, 각 분야에서 화제를 모은 세 권의 책을 다루었습니다. 서울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동진, 대기과학자 조천호, 컴퓨터과학자 정은진의 서평을 되돌아보며, 곧 돌아올 서리북 17호를 기다려 보는 것은 어떨까요?

각 분야 전문가들이 읽은 화제의 책,
서리북 16호에서 확인해 보세요!
“필수과의 수가를 올려주면 어떨까?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K-의료는 이미 ‘값싼 의료’가 아니다. 한 나라 보건의료의 성과는 폐암 5년 생존율로 측정되지 않는다. 건강보험료와 자기 주머니에서 내는 돈 대비 국민 건강이 문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이미 남들만큼 쓰고 남들만큼의 성과만 내는 단계에 와 있다. 의료비 지출이 매우 빠르게 늘었기 때문이다. 의료비 지출 총액을 계속 늘릴 수는 없으니 덜 필요한 의료에서 더 필요한 의료로 돈을 옮겨 와야 한다. ‘뒤틀린’ K-의료의 전체적인 재조정,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

이동진
「기자의 눈으로 본 K-의료의 정치경제학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와 깊이 연결돼 있다. ‘인간은 앞으로 세상이 얼마나 더워질지, 나아가 [앞으로 닥칠] 역경과 소란을 헤치고 서로를 얼마나 많이 보호해줄 수 있을지를 통제할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인간이 일으키는 폭염은 결국 인간의 손길만이 해결할 수 있다. 폭염 대응은 우리가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감수성이 있는가의 척도이기도 하다. 즉 폭염이 우리 수준을 드러낼 것이다. 폭염 속에서 우리는 ‘통째로 구워질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행동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 있다.”

조천호
「불타는 폭염에서 불타는 야망으로
“한 명의 교사가 20명 이상의 학생들을 한 교실에 모아 놓고 가르치는 학교는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고, 공장에서 시키는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치는 한편 단체 생활에 익숙하고 순종적인 일꾼을 만들기 위해 19세기 프러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교육의 목표는 지식의 습득 혹은 취업이 되었고, 한 명의 강사가 다수의 학생에게 설명하는 방식이 이런 목표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방법이 될 수는 없다. 학생 한 명 한 명은 모두 다른 지식을 가지고 교실에 들어와, 같은 교실에 있어도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배움의 결실을 맺는다.

정은진
「모두가 다르게 배우는 하나의 교실을 위해
창간 4주년 기념 정기구독 이벤트
2021년 3월 창간의 돛을 올린 서리북은 이번 17호로 창간 4주년을 맞습니다. 지난 4년간 서리북은 열일곱 호의 잡지를 펴내며 서평 공모전 ‘우주리뷰상’ 개최, 특별판 『읽기의 최전선』 출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 선정’ 등 크고 작은 활동과 성과를 이어왔습니다.

창간 4주년을 맞기까지 서리북을 지탱해 온 힘은 오롯이 독자님의 후원과 격려였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창간 4주년을 기념하며, 열흘간 창간 4주년 기념 정기구독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이벤트 기간 동안 일반 정기구독권과 종이책+전자책 정기구독권을 더욱 할인된 금액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할인 혜택 1: 종이책 정기구독(1~3년) 16% 할인 ▶ 25% 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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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할인 혜택 2: 종이책+전자책 정기구독(1~3년) 40% 할인 ▶ 50% 할인
    • 1년 구독 100,000원 → 5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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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년 구독 300,000원 → 150,000원

    🎁 대상: 서리북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이용 고객

    🎁 기간: ~2025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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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남의 인식론(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서문 격인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한 매니페스토>와 나란히 배치돼 있는 <지식인-행동가들을 위한 미니페스토>라는 글을 소개하려 합니다. 기존의 급진적 사유와 실천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급진주의의 불가능성과 새로운 가능성

    이 글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급진주의는 가능한가?” 저자는 오늘날 글로벌 노스(선진국 사회)에서 급진적 사상이 급진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기존의 혁명적 담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급진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훈련 해제와 새로운 사유 방식

    기존의 사유 방식과 실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저자는 이를 훈련 해제(Untraining)’자기 재발명(Reinvention)’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실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학문적 이론이 현실과 단절되지 않고 실천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결한 이들과 후위 이론

    글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개념 중 하나는 좋은 삶(Buen Vivir)을 위해 집결한 이들입니다. 이는 기존의 정치적 혁명가나 지식인들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실천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이론적 기반을 후위 이론(Subaltern Theories)’이라고 부릅니다. , 기존의 전위적 이론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태어나는 이론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인-행동가들을 위한 미니페스토>는 오늘날 우리가 변화와 혁신을 꿈꿀 때, 어떤 자세로 사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기존의 도그마와 정통성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죠.

     

    지난번 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한 매니페스토>와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https://blog.aladin.co.kr/alephbook/16295520

     




     

    지식인-행동가들을 위한 미니페스토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지음, 안태환·양은미·박경은 옮김, 남의 인식론, 알렙, 2025)

     

    이 책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하는 모든 이들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이 제한적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책이 선의 이쪽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의 사유는 선의 저쪽에 있지만 책으로서의 삶은 이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이 책을 가장 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읽힐 것이다. 내 판단으로는, 이 책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도 있는 사람들은 아마 이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아마 읽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이고, 설사 관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십중팔구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잘해야 마지못한 동맹자일 뿐이다. 비록 이 책이 표현하는 연대는 결코 마지못한 것이 아니지만 말이다. 어떤 경우든, 동맹자는 기껏해야 상대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 책의 기여가 미미할 것이라고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다른 시대들, 예를 들어 유럽의 탁월했던 17-18세기와는 달리, 우리 시대의 글로벌 노스에서는 급진적 사상들이 곧 급진적 실천으로 번역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급진적 실천은 현존하는 급진적 사상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이중적 불투명성은 이 책에서 분석될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오늘날 기성 권력이 현 상태의 유전적 코드와 부합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사상과 실천의 만남을 저지할 효율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급진주의는 반()자연, 존재의 일탈(aberratio entis)이 되었다. 1677, 유럽 열강들이 스피노자가 임종 직전에 자신의 범신론적 무신론을 포기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던 (예컨대 첩자들을 고용하는 방법을 통해) 그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신을 믿는 존재라는 증거앞에서의 스피노자의 항복이 몰고 올 파장을 그들은 간절히 기다렸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급진주의는 글로벌 노스에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듯하다. 자신을 급진적 사상가라고 공언하는 이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거나 다른 누군가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실천은 그들의 이론과 모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현실을 다루기 위해 보호모와 장갑을 필요로 하는 대학과 같은 기관에서 일한다. 서구 근대성이 지식인들에게 부리는 속임수 중 하나는 그들이 오직 반동적 제도들 안에서만 혁명적 사상을 생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남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말할 만한 것이 없거나, 말한다 해도 그들의 행동반경 밖에서는 아무도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고, 아니면 심지어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사회적 해방에 대해 어떻게 글을 써야 할 것인가? 누군가를 오도하거나 역으로 오도당하는 것을 피하려면, 급진적으로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인정에서 출발하여 글을 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서구 근대성의 급진주의로부터 남은 것이라고는 바로 그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급진적 인정이 전부다. 그러나 남겨진 것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를 향수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 앞에는 잘 정의된 계획보다는 폐허가 더 많다. 그러나 폐허 또한 창조적일 수 있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재생산과 반복을 조장하는 적대적 조건들 속에서도 창조성과 단절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핵심은 새로운 이론들, 새로운 실천들,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들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주로, 이론화하고 변혁적 집단행동을 생성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급진주의가 지닌 구성된 불가능성(constituted impossibilities)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구성적 가능성들(constituent possibilities)을 상상할 준비를 더 잘하게 될 것이다.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두 가지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 둘 사이에서 글을 계속 써 내려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가지 불가능성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는 것의 불가능성(impossibility of communicating the unsayable)과 집단적 저자성의 불가능성(impossibility of collective authorship)을 가리킨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는 것의 불가능성. 지난 200년 동안 앎과 행함 사이의 관계는 그것이 지닌 일반적 성격을 상실하고 단지 근대 과학에 의해 타당성이 입증된 지식과 합리적인 사회공학 사이의 관계로 축소되어 왔다(Santos 2007b). 그 결과, 이러한 고도로 지성화되고 합리화된 영역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자의적으로 간주한 모든 것은 무시되거나 낙인찍혔다. 바깥에는 열정, 직관, 느낌, 정서, 감정, 신념, 믿음, 가치, 신화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세계, 키르케고르가 말하듯이 간접적인 방식 외에는 소통될 수 없는 것들의 세계가 있었다. 여러 종류의 실증주의는 배제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거나(그저 환상이거나), 혹은 중요하지 않거나 위험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한 환원주의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기하학적 상응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가 자신들의 말할 수 없는 반쪽으로부터 분리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지닌 복잡성과 우연성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론과 실천 모두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상상되면서 이 둘은 서로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의 인도를 받는다고 해서 두 배로 눈이 먼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 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론가들과 지식인들은 기쁨이나 슬픔에 대해서도,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말하는 애도나 축하를 위해서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전자는 이러한 감정들의 이름을 지을 줄은 알지만, 이를테면 스피노자가 이를 정동이라 부른 것처럼, 그것들을 실제로 살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러한 감정들의 부재를 사유나 이성의 문제로 만들 능력도 없다. 그들은 사유가 분리해 놓은 것, 즉 삶 그 자체를 통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만일 삶이 구별을 할 수 있다면 많은 구별을 하겠지만, 확실히 감정과 이성 사이의 이런 구별만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삶은 삶으로서의 자기를 부정하게 될 테니 말이다. 이는 특히 변혁적 행동의 삶에서 더욱 그러한데, 거기서 현실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오직 이성적 감정들과 감정적 이성들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지식인들의 관심사는 사유의 삶이며, 그것은 삶의 삶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살아진 삶(lived life)은 스피노자의 산출된 자연(natura naturata)처럼 사유보다 덜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살아 내는 삶(living life)과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은 분명 사유를 초월한다.

    나는 나 자신을 지식인-행동가라고 부름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는 불가능성을 생산적으로 살아 내는, 그리하여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출해 내는 하나의 가능한 방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책은 간접적 소통에 자주 의존한다. 이 책 자체가 많은 간접적 소통을 바탕으로 사유되었다.

    집단적 저자성의 불가능성. 저자성에 관한 한, 이 책은 경계가 흐릿하다. 최근 몇 년간 나는 세계사회포럼에서 행동가로 참여하며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쟁에 깊이 관여해 왔다. 나는 나의 사유가 어느 정도까지 이름도 없고 분명한 윤곽도 없는 집단적 사유의 일부인지 판단할 수 없다. 이 책에서 나 자신의 것은 단지 개인적으로, 그리고 이중의 부재를 완전히 자각하면서 표현된 것뿐이다. 첫 번째 부재는 합리적 형식화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오직 집단적으로만 형식화될 수 있는 것의 부재이고, 두 번째 부재는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합리적으로 형식화될 수 없는 것의 부재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절반은 영원히 쓰이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집단으로부터 분리하는지를 자각함으로써 집단의 일부가 된다.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은 오늘날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이전보다 더 희망적이다. 첫 번째 요인은 도그마 게임의 종말, 두 번째는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들에게 맡긴 후위 이론의 임무, 세 번째는 세계의 고갈되지 않는 다양성과 그것이 보여주는 것, 또는 말로 표현될 가능성과 무관하게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도그마 게임의 종말. 지난 200년 동안 낡은 도그마에 대항한 사회적 투쟁들은 거의 항상 새로운 도그마들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해방은 새로운 사회적 규제가 되었고, 낡은 정통성은 새로운 정통성으로 대체되었다. 수단이었던 것이 목적이 되었고, 반란이었던 것은 순응이 되었다. 이제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하는 사회 운동들은 새로운 도그마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낡은 도그마에 맞서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운동들에 따르면, 사회적 해방은 사회적 규제를 전제한다. 즉 규제되지 않은 해방된 사회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해방을 규제하는 것과 규제를 해방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해방을 규제하는 것은 이제는 극복된 옛 조건들을 주도했던 같은 규제의 논리를 (반드시 같은 종류의 규제는 아닐지라도) 새로운 조건에 적용하는 것이다. 반면, 규제를 해방한다는 것은 규제하고자 하는 대상의 조건 그 자체를 새로운 형태의 규제로 확립하는 것이다. 사회적 해방의 목적이 끝-없는-민주주의(democracy-without-end)를 구축하는 것이라면, 규제를 해방한다는 것은 변혁적 실천의 결과로 생겨나는 필요에 맞춰 민주적 해결 방안들을 심화하고 다양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직 이것만이 수단이 목적이 되는 것을, 새로운 우상들이 옛 우상들을 대체하고 시민들에게 이전과 같은 종류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을, 새로운 규칙들이 옛 규칙들이 그랬듯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연화되는 것을, 대안의 제거에 맞선 투쟁이 대안 없는 사회로 이어지는 것을, 기술적 해결책에 맞서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채택된 정치적 행동들이 오히려 정치 기술의 해결책이 되어버리는 것을, 행동의 자유와 창의성에 대한 제한이 정확히 이전의 제한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것을,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비순응이 변화를 방해하는 순응으로 변질되는 것을, 그리고 사회 변혁에 투입되었던 감정과 환상과 열망이 이후에는 정작 그 자체로 단죄되는 것을, 옛 기능들과 단절했던 새로운 기능들이 오히려 새로운 기능들을 가로막는 구조가 되는 것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던 것의 역사화가 다시 새로운 비역사적 진리가 되어버리는 것을, 그리고 위험을 수반하는 변화에 참여한 모든 자들이 지닌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무의식이 도리어 그 변화로부터 이익을 얻는 자들의 최대로 가능한 의식이 되어버리는 것을 막을 것이다. 요컨대 목표는, 한때 억압받던 사람들의 무기가 새로운 억압자들의 무기로 변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나는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하는 이들이 말하듯이, 이것이야말로 내다보이는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끝없는 여정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새로운 입장은 지식인-행동가들에게 거대한 도전을 제기한다. 특히 그동안 글로벌 노스에서 지식인들의 주도성은 주로 도그마와 정통성의 게임 덕분이었다. 도그마는 공식화(정확한 말)에 있어서나 방향(행동과 태도에 대한 정확하고도 구속력 있는 지침)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강렬하다. 도그마는 너무나 강렬하게 지시적이라서 방향의 실재를 실재의 방향과 혼동한다. 도그마는 자율적인 삶의 형태들을 형성한다. 그러한 게임 속에서, 그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지식인들은 다른 어떤 삶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종류의 삶을 위해 훈련받았고, 그들의 임무는 그것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하에서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들에게 제기하는 도전은 거의 딜레마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훈련을 해제하고(untrain) 자신을 재발명해야 하거나, 아니면 이미 그러하듯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의미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훈련 해제를 선택하기에 앞서 이 딜레마에 대해 의아해한다. 더 강력한 다른 도그마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그마에 맞서 싸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것을 열어 두는 것은 결국 적을 풀어주는 것과 같지 않을까? 삶과 사유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둘 모두를 해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반()도그마도 다른 종류의 도그마가 아닌가?

    새천년의 시작에 희망적인 것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전에는 예견되지 않았거나 또는 이론적으로 허용 가능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던 가능성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가능성들은 비이성만이 현재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유일한 대안이 아니며, 혼돈만이 질서의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진리보다 덜한 것(불확실한 결과를 위한 투쟁의 바탕을 이루는 뒤죽박죽된 이성과 감정들)에 대한 우려는 진리보다 더한 것(예전의 실패들을 설명하면서 진실성을 주장했던 반증된 거대 이론들의 아비투스)에 대한 우려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가능성들은 새로운 담론과 개념을 가진 새로운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새로운 행동들로부터 출현한다. 그것들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중 일부는 정말 매우 오래된 것으로 조상들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것들이 더욱 가시화된 것은 지적으로 인증되었던 사회적 해방의 레퍼토리가 이미 붕괴했기 때문이며, 실상은 새로운 형태에 담긴 낡은 것에 불과한 새로운 것들의 패션쇼가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도그마의 부재는 사실 묘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부재는 맥박에서 느껴지며 보기는 쉽다. 그것은 행동, 에너지, 열망, 또는 지식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열망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대화의 변화와, 공동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합의된 침묵에서 볼 수 있다.

    집결한 이들의 참신함을 인정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단지 집결한 이들이 침묵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연대의 한 방식일 뿐이다. 분명히, 집결한 이들은 서구 근대성이 저항적 행동들을 침묵시키는 기술들에 얼마나 특화되어 있는지를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지배적 상식에 의하면, 그러한 저항적 행동들은 무지하고 열등하며 후진적이고 퇴행적이며 로컬적이고 비생산적인 사람들, 요컨대 진보와 발전의 장애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기에, 침묵당해 마땅하다. 어떻게 이 강력한 침묵시키는 기계에 맞서되, 대안적이지만 다시금 침묵시키는 기계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인가. 이것이 지식인-행동가들이 직면한 더 큰 도전이다. 바로 여기가 그들의 훈련 해제와 자기 재발명이 필요한 지점이다.

    후위 이론. 내가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행동가들에게 부여한 임무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바로 후위의 이론들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이 책 전반에 걸쳐 더욱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 임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달성될 수 있다면, 이는 새천년의 시작에 가장 위대한 참신함이자, 특히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모든 위성적 억압들이 극복될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 이들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목격한 이러한 정치적 경험들은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그 경험들이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를 포함한 서구 근대성의 정치 이론들에 의해 예견은커녕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다른 사례들 중에서도 특히 의미 있는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운동들과 그것들이 몇몇 국가에서 최근 중요한 정치적 변화에 기여한 사례다. 이러한 놀라움은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모두가 원주민들을 사회적정치적 행위자로서 무시해 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위대한 페루의 마르크스주의자인 호세 마리아테기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건설에서 원주민들에게 역할을 부여했다는 이유로 낭만적이고 포퓰리스트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러한 놀라움은 이론가들과 지식인들 전반에게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 그들이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경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쉬운 대답은 없다. 비판이론가들은 특히 이러한 어려움에 갇혀 있는데, 이는 그들이 전위적(아방가르드) 이론화를 훈련받아 왔기 때문이다. 전위 이론은 그 본성상 스스로가 놀라움에 사로잡히거나 경이로움을 느끼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전위 이론가들의 예측들이나 명제들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존재하지 않거나 무의미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자신이 놀라는 것을 허용하는 도전에 긍정적으로 응하는 것은 훈련 해제와 재발명의 과정이 진행 중이며 성공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신이 놀라움에 사로잡히도록 기꺼이 허용하는 지식인들은 전위 이론의 상상된 참신함이 아무리 기발하고 매혹적일지라도 더 이상 이에 놀라지 않으며, 이미 전위 이론의 시대(선형적 시간관, 단순성, 통일성, 총체성, 결정성의 시대)가 끝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이들이다. 일단 지식인들이 훈련 해제 과정에 들어서면, 전위 이론들이 지닌 학문 중심적이고 과도하게 지성화되었으며 정체된 성격이 점차 더 분명해진다.

    나는 후위 이론들이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의 투쟁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기여함으로써 출현할 수 있는 정서적-지적 지평의 창출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후위 이론은 오직 그것이 일구어낸 실천적 결과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이론의 모든 주역들이 이루어낸 변화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 주역들 중 지식인-행동가는 언제나 부차적인 인물일 뿐이다. 다시 말해, 후위 이론들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소품(parerga)과 부록(paralipomena), 즉 비이론적 삶의 형태들의 작은 부분들이다. 그것들은 삶의 형태들 속에 엮인 이론적 개입의 행위들이다. 그것들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손을 씻지도 않고,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도 아니다. 그것들은 뼈대, 밑그림, 기록, 봉투, 우편 주소를 전문으로 다룬다. 중요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은 것들을.

    세계의 무궁무진한 경험과 간접적 소통.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기에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세 번째 이유는 세상의 문화적, 인지적, 사회적, 민족적-인종적, 생산적, 정치적, 종교적 다양성이 방대하다는 인식이 오늘날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단순히 묘사되고 재현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서, 이제 눈에 보이고 드러나며 느껴지고 시적으로 표현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요인들이 이를 설명해 주고 있고 그중 일부는 이 책에서 분석될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최근 얻게 된 가시성과 그들이 드러내고 축하하는 내부적 다양성이다. 이것이야말로 채널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방식 또는 생태-민족-문화 관광의 단일문화적 다양성을 전면적으로 전복시키는 종류의 다양성이다. 이는 다양성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가진 다양성으로, 단일문화적 다양성과 달리 무기력한 동시성을 복잡한 동시대성으로 변모시킨다. 또한 비동시대적 사람들 사이에서 동시성의 행위를 만들어내는 관광객의 시선이나 오락적 시선과는 달리,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의 다양성은 서로 다른 동시대성들 간의, 다시 말해, 동시대적으로 되는 서로 다른 형식들 간의 만남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세계의 다색성(polychromy)과 다성성(polyphony)을 드러내되 그것들을 불연속적이고 통약불가능한 급진적 이질성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통일성은 어떤 본질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건설해 나가는 과제 속에 있다. 여기에 참신함과 정치적 당위가 자리한다. 즉 동시대성을 확장한다는 것은 평등의 원칙과 차이의 인정이라는 원칙 사이의 상호성의 영역을 확대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회적 정의를 위한 투쟁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확장된다. 사회적 정의의 통상적 개념에 근거한 부의 분배와 관련된 부정의에, 다양한 시간적 지속을 가지며 따라서 각기 다른 모델의 동시대성을 지니는 다른 많은 차원의 부정의들이 더해진다. 식민주의와 노예제라는 역사적 부정의, 가부장제,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라는 성적 부정의, 젊은이들에 대한 증오와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들에 대한 증오라는 세대 간 부정의,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라는 민족적-인종적 부정의, 그리고 과학의 독점과 과학이 승인한 기술들을 명분으로 세계의 지혜에 대해 저질러진 인지적 부정의가 그것이다.

    구조적(기능적이 아닌) 다양성은 매혹적인 만큼이나 위협적이다. 구조적 다양성은 그 안에서 도그마의 종말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창조할 기회를 보는 이들에게 매혹적이다. 만약 세계의 다양성이 무궁무진하다면, 유토피아는 가능하다. 모든 가능성은 유한하지만, 그 수는 무한하다. 구성된 경험은 구성하는 경험의 잠정적이고 지역적인 구체화일 뿐이다. 현존하는 현실이 이상들과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상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현실이 이상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은 위협적이기도 하다. 특히 글로벌 노스에서 그러한데, 이는 그것이 서구의 고립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세계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것은 서구 예외주의의 전환점을 나타낸다. 한때 본원적(원형, archetypus)이고 상승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나머지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던 것이, 이제는 파생적(모사, ectypus)이고 하강하는 것이 되어, 지속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고 있는 세계 인식이자 사회와 자연을 경험하는 양식이 되었다.

    아마도 이 자율적이고 가능성을 부여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진 바와 같이, 훈련 해제 과정의 핵심적 특징일 것이다. 내가 남의 인식론을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다. 이러한 인정은 과학적 지식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종류의 지식이고 그 너머에는 오직 무지만이 있다는 확신을 잃을 때 빠지게 되는 심연들에 대한 안전망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단일언어(monolanguage)와 단일문화(monoculture)에 완전히 사로잡힌 비트겐슈타인식 침묵시키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해독제이다. 한 언어 또는 문화에서는 말할 수 없거나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 다른 언어나 문화에서는 말해질 수 있고, 그것도 명확히 말해질 수 있다. 다른 종류의 대화를 위한 다른 종류의 지식과 다른 대화 상대들을 인정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코드화와 수평성을 지닌 무한한 담론적·비담론적 교환의 장을 여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유리한 세 가지 이유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부르는 대로 지식인-행동가 또는 후위 지식인들의 출현을 간접적으로 촉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집결한 이들 중 일부는 어쩌다 이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심지어 그 읽기에 흥미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책에 쓰인 채로 남은 것은 하나의 사유-행동 실험이며, 나 자신이 후위 지식인, 따라서 유능한 반란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일종의 사유의 체육관이다. 어쩌면 집결한 이들이 나로부터 배울 수도 있는 것은 내가 계속해서 그들로부터 배우고 있는 것의 충실한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이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한 이들 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읽히기를 희망한다. 집결한 이들은 아마도 이 책을 살 수 없거나, 어쨌든 이 책에 충분한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이 책은 비록 선의 이쪽에서 쓰였지만, 그 내용은 선의 저쪽에서 생성되었다. 이 책은 오직 내가 이어지는 장들에서 쓰게 될 심연적 선의 종말을 상상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이해 가능하고 희망적일 것이다.

    후위 이론들의 출현에 기여하고자 하는 시도는 진행 중인 훈련 해제와 재발명에 대한 반복적인 자기성찰의 연습을 요구한다. 이 맥락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고백록(Confessions)을 쓰면서 했던 웅변적 발언 나는 나 자신에게 문제가 되었다(Quaestio mihi factus sum)”와 비슷하다. 차이는, 그 문제가 더 이상 과거의 오류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오류가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확신 없이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미래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독자들은 내가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여전히, 비록 희망이 없거나 희망 없을 정도로 정직할지라도, 기성 권력이 방심하거나 경계를 느슨히 한 틈을 타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급진주의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시도라는 것을 틀림없이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덧붙이자면, 나는 내가 성공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따라서 나는 내가 유능한 반란자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쓰는 것을 쓰고자 하는 절박한 충동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침묵되어야 할 것을 침묵시키고자 하는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마지막 문장은 전율스럽다.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상당 부분 미완성으로 남을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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