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을 두드리면, 손가락은 이미 뇌가 있듯, 서로 상관없이 무심코 흐르듯 한 것들을 끈끈이 파리지옥에 달라붙인다. 파리는 달라붙어 말라 죽지만, 이미지들이 만들어낸 느낌과 생각들은 기억 속에서 집적되어, 다시 물 흐르듯 흐른다. 여기에서 나는, 인문의 희열을 맛본다. 그러니 그 긴 여정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이 되는 셈이다.

— 이광수(사진가, 역사학자)







■ 간략 소개

사진 놀이를 통해 자유로이 펼치는 사유의 세계(2009-2019)
사진은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

사진 찍는 인문학자 이광수 교수에게는 사진이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이다. 이광수 교수는 디지털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기계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하는 또 하나의 인문의 행위는 무엇일까를 묻는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봄(시선)’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권력은, ‘봄’과 ‘보임’ 그리고 ‘보여줌’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그 사이의 차이가 나와 당신의 사이에서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냈다. 모든 게 보기 나름이고, 보이기 나름이고, 보여주기 나름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시선)’을 통해서 서로 나누어 보는 것, 그것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의 세계다.

■ 출판사 서평

사진 놀이를 통해 자유로이 펼치는 사유의 세계(2009-2019)
사진은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


사진 찍는 인문학자 이광수 교수에게는 사진이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이다. 이광수 교수는 디지털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기계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하는 또 하나의 인문의 행위는 무엇일까를 묻는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봄(시선)’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권력은, ‘봄’과 ‘보임’ 그리고 ‘보여줌’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그 사이의 차이가 나와 당신의 사이에서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냈다. 모든 게 보기 나름이고, 보이기 나름이고, 보여주기 나름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시선)’을 통해서 서로 나누어 보는 것, 그것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의 세계다.

이광수 교수는 인도 종교와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이자 사진비평가이다. 인도 근대사 연구 중에 사진이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비평의 길로 들어섰다. 또한 2009년부터 2019년까지 한 해에 2-3차례 인도에 방문, 체류하여 인도 세계의 종교, 문화, 생활, 역사의 현장 등을 사진에 담아 왔다.

이광수 교수의 신작 『나는 본다, 사진이 나를 자유케 하는 것들』은 사진 놀이를 통한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를 펼쳐보이는 인문 에세이이다. 지난 10년간(2009-2019) 이광수 교수는 필사적이다시피 카메라를 메고 인도로 향했다. 인도 세계에 가면, 보지 못했던 것들, 잊힌 것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거기 어떤 신성함이 드러내준 존재들을 카메라라는 기계를 대동해 몸뚱이 육안으로 보고 읽고 해석하다가 이내 자유케 되는 기쁨을 만끽해 갔다. 이런 시간을 본격적으로 가진 지 10년째다.

저자가 접한 세계 안에 정해진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보기 나름이고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것이 자연이든 자연이란 이름으로 드러난 신의 본질이든, 저자는 저자 마음대로 보고 해석한다. 그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봄의 이치”이다. 이는, 힌두 세계에서 말하는 알현謁見의 이치와 비슷하다. 그는 드러내고, 나는 보는 이치. 그 안에서는 자신이 보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그가 드러내주는 것이 우선인 이치다. 그래서 마음대로 보고 해석한다지만, 결국 그 자연이라는 존재에 대한 경외가 그 밑바탕에 깔린다. 저자는, 그 경외 위에서 그렇게 대상을 접하고, 자신의 눈으로 잡아내 자신이 해석하는 것을 인문을 긷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 인문을 긷는 것은 카메라로 할 때 가장 자유스럽다. 이를테면, “카메라가 나를 자유케 해주는 것”이다.

이 책 『나는 본다, 사진이 나를 자유케 하는 것들』은 카메라로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을 통해 서로 나누어 보는 것, 디지털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 우리가 하는 인문의 행위는 무엇일까를 탐사한다. 한국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들, 우리에게 잊힌 것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사진(순간)으로 포착하면서, 사진가의 렌즈에 비친 언어(봄)와 그 세계가 나누는 것들(권력)에 대해 사유해 간다. 그 세계에서 단순한 느낌이나 한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그 대상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사진으로 하는 인문적 사유의 세계이다.


사진은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사진으로, 봄(시선)과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다.

이광수 교수는 사진과 글이 자유롭게 교차하는 이 책에서 사진, 봄의 이치, 그리고 권력에 관한 인문학적 사유를 전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진은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이 교수는 이를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한 구절, “이것은 해석이지, 텍스트는 아니다.”에서 전거를 인용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봄’에 관한 이 세계의 이치다. 사진을 매개로 하여 말하자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물에 대해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벗어나 카메라의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다. 인간의 눈과 카메라의 눈은 모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기계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어떻게 조절하느냐 즉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저자는, 힌두 세계의 ‘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간이 그렇게 보는 것은 신이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드러내는 것이니 그의 뜻에 따라 그 성안聖眼을 알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본질을 볼 수 없으니, 그 상을 만들어 그 신을 보게 된다. 그 안에는 신이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성안의 ‘보여줌’이 있고, 그 후에야 비로소 인간이 하는 알현의 ‘봄’이 가능해진다. 보여줌과 봄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봄’과 ‘보여줌’과 ‘보임’의 세계, 그것은 신에 대한 알현은 인간의 주체이지만, 신의 주체이기도 해서 결국 하나가 되어 가능해진다.     
‘봄’의 문제는, 그래서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인간을 보든, 자연을 보든, 신의 상을 보든 그것은 본질이 드러내는 것을 알현할 뿐이다. 그것을 숭배하거나 보존하거나 하는 것은 어떤 우열을 가리거나 그 질의 규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본질을 알현하려 하지 않고, 드러난 모습을 숭배하려 든다. 변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것을 숭배하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서 하는 짓이다.
저자는 질서라는 권력자들이 설정한 세계는 서로 다른 ‘봄’이 공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본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이 ‘봄’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진이란 세계를 자신이 보는 바에 따라 해석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전유하는 행위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봄 안에 들어 있는 권력

권력은 물질의 수단을 어느 한쪽 소수가 차지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수단을 독차지한 소수는 다수로 하여금 자신들이 해석한 세계 안에 들어와 그 정한 가치에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하도록 만든다. 여러 가지 이름이 있겠지만, 모두 강제다. 그 안에서 달리 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그렇게 세계를 ‘봄’은 자연을 부정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질서라는 이름으로 세우는 전통과 문법이 된다. 그리고 그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것은 질서의 파괴자로 규정하여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 저항의 시도는 전통과 문법의 틀에 따라 때로는 유치한 것으로, 때로는 위험한 짓으로, 때로는 미치광이로, 때로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매도당하고 처벌당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저항하는 위험한 자들로 하여금 전통과 문법의 틀 안으로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가르친다. 그것이 도덕이고 그것이 종교다. 도덕과 종교는 회개하고 회심하는 자를 용서하고 품에 안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자는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시킨다. 그들이 달리 보지 말라는 것을 끝까지 부인할 때 말이다.
질서라는 권력자들이 설정한 세계는 서로 다른 ‘봄’이 공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세계 안에서 팩트는 존재하나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어떤 생각은 어떤 기준에 맞춰져 균질하게 되고 단순화되어 진리로 자리 잡는다. 그것이 종교다. 그 종교는 처음에는 진리를 찾아 구도하는 단순 발심에서 시작하지만, 이후로 조직과 돈을 갖추게 되면서 진정한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그 틀은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일방적으로 통용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널리 유통된다. 결국, 종교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군림하는 반(反)진실의 토대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진리 안에서 자유롭다는 신화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이 ‘봄’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진이란 세계를 자신이 보는 바에 따라 해석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전유하는 행위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마찬가지로 남도 그가 원하는 대로 보고 해석하고 전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자신이 카메라로 보고 만들어내는 그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우와 열을 가리지도 않고, 그것으로 물질을 구하지도 않으며, 남이 만든 그만의 ‘봄’과 그 결과물을 평가하지도 않으려 한다. 자신 아닌 다른 이도 사진으로 줄 서고, 줄 세우고 하는 일에서 자유로웠으면 한다. 그것이 사진 안 대동세상일 것이다. 카메라를 들어 세계로 가까이 가볼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이야말로 디지털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기계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하는 또 하나의 인문의 행위이다.


봄 안에 자리 잡은 욕망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무엇일까? 저자는, 욕(欲)이라 본다. 욕이 없다면 행위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어떤 관계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면 세상의 삶도 없을 것이다. 욕의 삶을 부인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 절대 고독 속에서 궁극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개인으로서 욕을 제어하는 삶에 도달하긴 했다지만, 그것의 최대치는 결국 개인 차원에서일 뿐이다. 그들의 제자는 결국 다시 세상 안으로 들어와 관계를 맺게 되니, 욕을 버리는 것을 부정하는 기제는 이전보다 더 강고하게 되어 더욱 세상적으로 되고, 그 안에서 욕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도돌이표의 인류사는 인간 삶의 뿌리가 절대적으로 욕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욕망은 변증법적으로 변태하여 커지고 그 변태된 새로운 욕망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그것이 역사가 된다. 역사는 결국 욕망을 통해 인간 본성이 구체화되도록 운동하는 힘의 궤적이다. 우리는 누구든 시간이 흐르고 그것이 역사를 만들어내는 한 욕망을 버릴 수는 없다.
내가 안간힘을 다해 잡으려, 잡으려 애쓰는 그 욕은 나를 변화시키는 본질이 된다. 나에게 세계는 거울이나 창에 비친 아무런 에너지가 없는 반영이 아니다. 누군가가 정해 준 도덕이나 질서에 따라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살아가는 그런 삶이 아니고, 나의 욕이 추동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세계 한가운데 고독하게 서 있는 독자적으로 완전한 존재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그 세계는 나와 우리가 만드는 변화하는 어떤 비실체적 실체다. 그래서 욕은 인간이 살아나가는, 인간을 품어 움직이게 하는 자연의 일부다. 애써 살아가는 욕을 집착으로 규정하는 것은 세계를 환(幻)으로 보는 것이다. 소수가 만들어낸 초월성 혹은 신에 굴복한 ‘봄’이 만들어내는 세계 안에서의 일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희생을 강요당하고, 그 강요 위에서 희생당한 자는 신화로 포장된다. 그리고 그를 희생시키는 공동체는 물질의 번영을 만끽한다. 그러나 그 번영은 소수의 것일 뿐이다.
카메라는 눈앞에 보이는 실체를 아무 본질 없는 허탄한 이미지로 만들어버리는 기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허탄한 이미지를 어떤 실체가 있는 본질로 삼는다. 그 위에서 진실을 규명하고, 남의 ‘봄’을 규정하고 판단하고 그것으로 사람마저 재단한다. 그리고 권력이 된 어떤 소수가 정한 문법 위에서 그 ‘봄’의 가치를 평가하고, 그것으로 권력과 부와 명성을 쌓는다. 본질적으로 사람도 없고, 삶도 없고, 사랑도 없는 이미지의 세계 안에서 누군가 쌓은 권위 아래로 스스로들 굴복하여 들어가고 줄을 선다. 욕망이라는 사람이 살기 위해 가동시켜야 할 에너지가 이미지에 덮여 사람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는 카메라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곰곰이 무겁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봄’과 ‘나’ 사이, 사진

사진은, 니체의 언설을 빌려 말하자면,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것, 그것이 카메라를 둘러싼 ‘봄’의 이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앞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에 대해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벗어나 카메라의 눈으로 보고 그 대상의 일부만을 취해 사람들이 보도록 재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눈과 카메라의 눈은 모두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성과 감성을 통제하는 ‘나’에 의해 제어될 수밖에 없고, 기계라 하더라도 결국 그 사람의 눈에 따라 보는 것이 조절되고 통제될 수밖에 없다. 대상 가운데서 무엇을 보느냐, 왜 보느냐, 어떻게 보이게 하느냐를 정해야 사진하는 행위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다 보니, 사진이란 ‘봄’과 ‘나’ 사이에서 만들어진 행위의 결과다. 결국 ‘나’의 문제다.
‘봄’의 이치는 그가 사람을 보든, 자연을 보든, 신의 상을 보든 그것은 그 대상의 본질이 드러내는 것을 보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재현하거나 그 재현물을 전시하거나 숭배하는 것은 어떤 우열을 가리거나 그 질을 규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도 재현할 수 있어야 하고, 저렇게도 전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숭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에 따르고, 세계를 운항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본질에 더 합당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본질을 알현하려 하지 않고, 드러난 재현의 겉모습을 전시하고 숭배하려 든다. 종교가 그러더니, 물질이 그렇고 요즈음은 사진하는 것이 가장 그렇다.
중요한 것은 사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선 아는 일이다. 사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카메라라는 기계, 그 기계로 대상을 취하는 ‘봄’ 그리고 그 ‘봄’을 통제하는 ‘나’. 당신은 그 셋의 메커니즘 안에서 카메라라는 도구로 뽑아낸 이미지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왜 그 많고 많은 도구 중에 사진이라는 것을 택하는지? 그림도 있고, 동영상도 있고, 글도 있는데, 왜 당신은 그 카메라라는 도구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혹시 카메라가 조작하기 쉽고 그것으로 뭔가를 말하기가 쉬워서인지는 아닌지 계속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디지털의 시대에 글보다 그림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진으로 인문을 하는 일이다. ‘봄’과 ‘보임’ 그리고 ‘보여줌’의 차이에 대해 사색해 보자. 그 사이의 차이가 나와 당신의 사이에서 어떻게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살펴보자. 모든 게 보기 나름이고, 보이기 나름이고, 보여주기 나름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을 통해서 서로 나누어 보자. 그것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의 세계다.

필자 소개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이자 사진비평가이다.
시민운동가로서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만원의 연대’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 진보 정당 당원으로 활동해 왔다. 인도 근대사 연구 중 사진도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비평의 길로 들어섰다.
저술로는 인도사에 관한 것으로 『슬픈 붓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등의 지은 책이 있고,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성스러운 암소 신화』 등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에 관한 책으로 『사진 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최희철과 공저), 『사진으로 생각하고 철학이 뒤섞다』(최희철과 공저), 『카메라는 칼이다』 등의 지은 책과 『사진으로 제국 찍기』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은, 니체의 언설을 빌려 말하자면,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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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혁명법

 

펠릭스 가타리의 분자혁명을 읽는 14가지 방법

 

 

 

신승철 지음46818,000신국판무선

 

2019525ISBN 979-11-89333-16-4 (03100)

 

 

분야 : 인문학 > 서양철학 > 서양철학 일반

 

 



간략 소개

 

 

펠릭스 가타리가 제시한 14개 아포리즘에 대한 화답,

 

소수자운동, 대안운동, 생태운동이 나아가야 할 책략서

 


어떻게 책략에서 앞설 것인가?

 

 

펠릭스 가타리의 분자혁명에는 가타리 자신이 제시한 분자혁명의 14가지 실천강령이 수록돼 있다.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펠릭스 가타리라는 철학자, 그리고 까다로운 그의 저작 분자혁명을 이해하는 핵심이 이 14가지 강령에 담긴 것이다.

 

공동체와 생태민주주의, 구성주의 담론을 사유해 온 철학자 신승철의 기획은, 14가지 프리즘으로 펠릭스 가타리의 사상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다.

 

가타리의 행동강령이 던져주는 메시지들은 한 사람의 분자혁명에서 모두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미래진행형의 사유를 펼쳐가자는 것이다.

 

 

출판사 서평

 

 

기표를 부숴라.”_펠릭스 가타리

  

모두의 혁명법은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의 저작인 분자혁명(La Rèvolution Molèculaire)(1980)에 수록된 14개의 강령에 대한 저자의 화답과 해설을 담고 있다. 저자 신승철은 가타리가 제시한 14개 아포리즘에 대한 사유를 통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분자혁명이 소수자운동, 대안운동, 생태운동이 나아가야 할 책략임을 밝힌다.

 

분자혁명이 출간된 1980년이라는 시점은 1968년 혁명의 탈주의 흐름이 제도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 1981년 미테랑 사회당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 무수히 많은 소집단과 공동체의 활성화가 이루어졌던 시점이었다고도 한다. 마치 한국 사회에서 촛불집회와 탄핵, 문재인 정부 수립, 생태계 위기와 기후변화 시대의 개막, 탈성장 담론의 등장 등을 경유하면서, 진보세력과 대안운동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부심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과도 오버랩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1980년대 초 그 과도기와 이행기에 가타리는 강령이라는 색다른 아포리즘을 제시하였고, 그 미지의 문자에 아로새겨진 무의식의 행렬을 탐색하는 것이 2019년 이 책의 기획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분자혁명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색다른 주체성이 등장하여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끼치는 혁명이다. 펠릭스 가타리의 분자혁명에서의 14개의 강령은 소수자들이 어떻게 사랑과 욕망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전략을 제시한다.”_저자

 

 이 책 모두의 혁명법의 각 장은 펠릭스 가타리의 강령의 문제제기들로서, 이는 마치 간화선(看話禪)의 화두와도 같이 우리를 당황시킬 특이한 문제제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가타리의 강령에는 분자적인 잠재력을 폭발시키고, 예술, 과학, 혁명을 촉발하고 생산하는 욕망을 탐색하고 있다. 여기서 욕망은 생명에너지이자 활력이며, 지배 질서와 문명의 잉여성과 기표라는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해독제이다. 그래서 “[강령 2] 욕망을 하부구조 쪽으로 보내고 가족, , 그리고 사람을 반생산 쪽으로 보내라.”라고 말하면서 철저히 분열적인 흐름으로서의 욕망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가족무의식과 같은 신경증적 포획을 벗어나기 위한 책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이 만들 놀랄 만한 변화의 가능성, 즉 분자혁명, 즉 모두의 혁명을 촉진시키기 위함이다.

 

그 욕망은 개인적인 욕망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복수적인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집합적 배치를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강령 6] 현실적인 복수성 쪽으로 미끄러져 가라.”, “[강령 11] 자신만이나 개인적으로탈주하지 말고 사람들이 도관을 뚫고 종기를 제거하듯이 탈주하라.”라고 거침없이 집합적 배치를 탈주에 연루시키고 흐름의 해방으로 향하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68혁명의 현기증 나는 무수한 소집단과 공동체운동, 생태주의 등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타리는 그의 강령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과 삶, 욕망을 따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보자고 거침없이 제안한다. 그리고 아포리즘과 같은 화두는 집합적 두뇌를 가진 기계-인간의 네트워크를 예감하듯 전대미문의 문제제기의 폭발 시기를 미리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지금 이 탈성장 시대의 개막이 바로 네트워크상의 분자혁명 즉, 모두의 혁명의 격발에 있음을 직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모두의 혁명법을 통해 미래진행형적인 사유로서의 가타리가 남긴 14가지의 강령의 윤곽을 잡으면서, 그가 생각한 분자혁명, 네트워크 혁명, 모두의 혁명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책의 구성 및 내용

 

 

피에르 펠릭스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1930430일 파리 북서부의 노동자계급 지역이자 파리 코뮌이 일어났던 비예뇌브--샤블롱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르본대학에서 학사학위조차 포기하고 정신분석학적 작업에 매진하였으며, 이미 15살 때부터 정신과 의사인 장 우리와 함께 보르드 정신병원의 설립을 도왔다. 그가 아카데미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계기를 살펴보면, 제도분석에서 기계 개념과 배치 개념으로 이행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형이상학, 책임주체, 의미화, 기표, 구조 등의 지적 구조물로 이루어진 아카데미가 실천적 자율성의 입장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등가교환을 가능케 할 고정관념의 교두보라는 사실을 파악하면서 완전한 절단을 수행한다. 특히 그의 강령에서는 기존 아카데미의 폐쇄되고 코드화되며 닫힌 기계학을 넘어서 열리고 자기생산하는 기계네트워크에 대한 사상을 욕망과 기계의 관계를 통해서 다루고 있다.

 

가타리는 1953년 이후 장 우리가 주도하여 설립한 보르드 병원에서 심리치료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라캉이 주도한 격월 세미나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라캉이 갖고 있는 무의식과 욕망에 대한 태도에 문제제기를 하고 뛰쳐나왔다. 라캉에 따르면 구조는 어쩔 수 없이 개인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으며, 여기서 벗어나면 심각한 분열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언표 주체(말 속의 나)와 언표행위 주체(말하는 나)의 분열 때문에 안정감을 찾기 위해서는 불변항의 구조에 의존해야 한다는 레퍼토리가 그것이다. 라캉은 상상계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분열되고 흔들리는 주체성이 결국 상징계라는 불변항의 구조에 의해서 장악되어 정상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가타리는 이와 달리 구조를 바꾸려는 좌파 기획이 아니라, 관계망이 발생시키는 자기생산적인 조직 양식인 기계가 변화를 초래한다는 사상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가타리의 14가지 강령은 이러한 이행의 과정에서의 단상을 유감없이 담고 있다.

 

 

하라! 하라! 

 

펠릭스 가타리는 장 우리로부터 심리치료사 수련을 받으면서, 배치에 대한 기본적인 구도에 영감을 얻었다. 가타리 자신이 청년 시절 동안 혼란스럽고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악몽을 꾸고 장 우리를 찾아갔다. 꿈 내용을 한 시간 동안 찬찬히 듣던 장 우리는 어느 쪽으로 돌아누워 자지? 오른쪽? 왼쪽으로 돌아누워 자 그럼 될 거야?”라는 꿈 내용과 무관한 꿈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를 사소한 것으로 보지 않았던 가타리는 이후에 배치(agencement)라는 개념을 만들게 된다. , 언표행위 주체와 언표 주체의 분열을 끝장낼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가타리의 사상은 가족성좌를 불변항의 구조로 보지 않고 유한하고 망가질 수 있고 찢어질 수 있는 배치로 보면서 배치에 대한 재배치의 미시정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이후 1968년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가타리는 지인들의 소개로 들뢰즈를 만나게 된다. 아카데미에서 30년 동안 철학사만 파오던 들뢰즈에게 가타리와의 만남은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색다른 사유의 계기가 된다. 다양한 활동을 해온 가타리의 사상적인 구도를 귀담아 듣고 들뢰즈는 공동 저작인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책으로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책, 안티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라캉에 이르는 노선에 반대해서 스피노자-라이히에 이르는 노선을 계승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펠릭스 가타리의 강령은 가타리의 독자적인 이론적 위치를 잘 드러내 보인다. 가타리가 들뢰즈의 부속물로 간주되는 이유는 들뢰즈가 학문적 아카데미즘에 더 적합한 인물이며, 가타리가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제도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혁명적 실천가로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혁명적인 그의 사상을 잘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강령의 내용이다.

 

 

가족주의 전망을 넘어선 복수의 욕망으로

  

강령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가타리는 욕망의 야성성이 바로 자율성이라는 생각을 가진 욕망의 자율주의로 분류될 수 있다. 그는 광기해방운동이 욕망의 야성성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며, 색다른 생각과 색다른 삶의 방식을 추방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문명이 광기에 대한 목록을 세분화하고 배제하여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가족주의 전망을 전혀 갖지 않는 청년일 수도 있지만, 정신분석은 이를 가족으로 환원하려 들 것이다. 가타리는 반정신의학을 개괄하고 기호론을 언급하면서, 자본주의의 고정관념과 고정된 격자기표로 욕망을 사로잡는 모든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등가교환을 위해서 공동체로부터 낯선 타자를 만들었고, 이에 대해서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기표적 질서를 통해서 이러한 문명의 정상영업 상태의 삶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심리학, 정신분석학, 정신의학은 함께 공모한다. 결국 대중의 욕망의 야성성은 기호-흐름이라고 일컬어지는 냄새, 음악, 색채, 몸짓 등 지극히 동물적인 기호인 비기표적 기호작용에 접속하여 고정관념에 맞서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가타리는 분자혁명의 강령에서 언급하고 있다.

 

강령 이후 저작에서 가타리는 기표에 맞선 도표를 주장하는데, 기표가 자본주의의 고정관념이라면 도표는 고도로 조직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기호작동을 의미한다. 기표화된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기호를 순환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가타리의 모색이 이 강령에 숨어 있는데, 아직까지 도표라는 개념으로 전진하지 못한 상황을 드러내 보인다. 1992829일 보르드 병원에서의 가타리의 죽음은 바로 강령의 기획이 끝나는 지점이었지만, 사실은 강령의 기획을 자신의 마음속 도표작용으로 갖고 있었던 가타리의 미완의 기획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가타리의 강령을 통해서 고도로 자유로우면서 고도로 조직되었던 혁명가 가타리의 마음속 기호작용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영원한 미래진행형적인 사유로서의 강령을 남겼던 것이다.

 

 

저자 신승철

 

동국대학교에서 가타리의 분열분석과 미시정치(2010)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래동예술촌에서 아내와 함께 <철학공방 별난>을 운영하면서 공동체운동과 사회적 경제, 생태철학 등을 친구들과 더불어 공부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세 가지 생태학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줄곧 생태철학을 연구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생태적지혜연구소(ecosophialab.com)>를 만들어서 기후변화와 생명 위기 시대를 극복하고 전환사회를 만드는 지혜를 탐색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누가 방안의 코끼리를 꺼낼까?(2019),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2019), 탄소자본주의(2018), 구성주의와 자율성(2017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마트가 우리에게 빼앗은 것들(2016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2014년 환경정의 올해의 환경책), 욕망자본론(2014),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2013), 식탁 위의 철학(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추천도서), 눈물 닦고 스피노자(2012년 간행물위원회 선정도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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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가타리는 파리 북서부의 노동자계급 지역이자 파리 코뮌이 일어났던 비예뇌브-레-샤블롱에서 태어났으며, 장 우리와 함께 보르드 병원의 심리치료사로 젊은 시절부터 활동해 왔다. 가타리는 68혁명의 도화선이 된 3·22 운동을 주도했으며, 68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들뢰즈를 만나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 등의 저작을 썼다. 68혁명 이후 <제도교육조사연구센터>와 《르세르슈》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대안정신의학, 여성운동, 동성애운동, 감옥정보운동 등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의 결과물이 『분자혁명(La Rèvolution Molèculaire』으로 발간된다.

분자혁명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색다른 주체성이 등장하여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끼치는 혁명이다. 『분자혁명』에서의 14개의 강령은 소수자들이 어떻게 사랑과 욕망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전략적 지도 제작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책 『모두의 혁명법』은 가타리의 14개 강령의 전모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주해서이다.



다음은 『분자혁명』에 수록된 펠릭스 가타리의 14개의 강령이다.

강령 1 욕망을 조만간 사라질 주체적 상부구조로 생각하지 마라.

강령 2 욕망을 하부구조 쪽으로 보내고 가족, 나, 그리고 사람을 반생산 쪽으로 보내라.

강령 3 신경증과 가족에 의한 무의식 접근법을 포기하고, 가장 특정한 분열적 과정의 무의식을 욕망하는 기계의 무의식을 택하라.

강령 4 독재 전체가 지닌 상징적인 완전한 대상에 대한 강제 차압을 단념하라.

강령 5 기표를 부숴라.

강령 6 현실적인 복수성 쪽으로 미끄러져 가라.

강령 7 인간과 기계 모두를 쫓아내는 것을 멈춰라,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욕망 그 자체를 구성한다.

강령 8 색다른 논리, 즉 현실적 욕망의 논리를 촉진시키고, 구조에 대한 역사의 우선성을 정립하라. 상징주의와 해석에서 벗어난 색다른 분석을 촉진시키고, 지배 질서의 의미작용의 전투주의를 해방할 수단을 제공하는 색다른 전투주의를 촉진시켜라.

강령 9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 주체 사이의 단절을 초월하는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를 인식하라.

강령 10 권력의 파시즘에 대해, 욕망으로, 욕망 기계로, 그리고 무의식적 사회적 장의 조직으로 인도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탈주선을 대립시켜라.

강령 11 자신만이나 ‘개인적으로’ 탈주하지 말고 사람들이 도관을 뚫고 종기를 제거하듯이 탈주하라.

강령 12 흐름을 가로막고 수로화하려는 사회적 코드들 아래로 흐름을 통과시켜라.

강령 13 국부적이고 미세한 욕망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점차 자본주의 체계 전체를 문제 삼아라.

강령 14 흐름을 해방시켜라, 책략에서 항상 앞서가라.

출처: 펠릭스 가타리, 『분자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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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은의 세 번째 소설 비밀 경기자<이치은 컬렉션>으로 재출간되었다. 단편들의 모음이자 연작소설로써, 환상, 추리, SF적 상상력을 통한 문학적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밀 경기자는 인류가 꾸는 에 관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인류는 모두 똑같은 꿈을 꾼다라는 도발적 명제와, ‘남의 꿈에 몰래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전복된 사유와, ‘꿈의 도서관을 짓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SF적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이 짧은 글들의 모임이, 그저 단지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위한 그냥 레고 블록의 낱낱의 부품만은 아니라는 것, 해서, 그저 처음에는 이 이야기들이 어떻게 나중에 커다란 이야기로 연결될지 그런 고민 없이 단편이 주는 재미에 집중해 주시고, 나중에 연결되기 시작할 때는 차분히 작가의 어설픈 마술을 지켜봐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치은(작가)
꿈으로만 직조된 미궁 같은 환상소설
환상, 추리, SF, 바이오컴퓨팅 비즈니스로 빚어낸 거대한 꿈의 만다라
《비밀 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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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은의 유 대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사라졌는가?가 산뜻한 장정과 새 판형으로 재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 롤플레잉게임, 온갖 공문서 양식으로 채워진 보고서 등 다양한 기법으로 소설의 장을 꾸며, 기존 소설 형식을 대담하게 파괴하고 새로운 소설 형식을 선보인다. 한 챕터가 끝나 다음 챕터로 넘어가면, 시점과 화자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치은 소설 작품들은 대체로 문학적 알레고리가 것으로 이름나지만, 이 작품만은 유독 소재-모티프 그 자체에 착목한 소설이다. 다시 말해, ‘유 대리가 어디에서, 어디로, 어떻게, 왜 사라졌는가?’를 다양한 글쓰기 형식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물론, 개인 정체성에 대한 물음, 견고한 커넥션-국가에 대한 속절없는 한 개인의 저항이 담겨 있기도 하다.


“각각의 장에서 어떤 형식적인 실험을 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런 부분들이 어떤 구체적인
문법-표현-장치들을 통해 표현되었는지,
그리고 다른 형식들에 의해 나누어진 다른 장들에서
이야기들이 어떻게 분절되고-이어지고-말소되고-재생되는지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봐주시면
조금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치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1인칭 총격 게임,
르포르타주 등으로 직조된 다양한 장르의 조각
전위적 실험 작가, 이치은의
《유 대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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