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을 두드리면, 손가락은 이미 뇌가 있듯, 서로 상관없이 무심코 흐르듯 한 것들을 끈끈이 파리지옥에 달라붙인다. 파리는 달라붙어 말라 죽지만, 이미지들이 만들어낸 느낌과 생각들은 기억 속에서 집적되어, 다시 물 흐르듯 흐른다. 여기에서 나는, 인문의 희열을 맛본다. 그러니 그 긴 여정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이 되는 셈이다.

— 이광수(사진가, 역사학자)







■ 간략 소개

사진 놀이를 통해 자유로이 펼치는 사유의 세계(2009-2019)
사진은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

사진 찍는 인문학자 이광수 교수에게는 사진이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이다. 이광수 교수는 디지털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기계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하는 또 하나의 인문의 행위는 무엇일까를 묻는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봄(시선)’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권력은, ‘봄’과 ‘보임’ 그리고 ‘보여줌’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그 사이의 차이가 나와 당신의 사이에서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냈다. 모든 게 보기 나름이고, 보이기 나름이고, 보여주기 나름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시선)’을 통해서 서로 나누어 보는 것, 그것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의 세계다.

■ 출판사 서평

사진 놀이를 통해 자유로이 펼치는 사유의 세계(2009-2019)
사진은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


사진 찍는 인문학자 이광수 교수에게는 사진이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이다. 이광수 교수는 디지털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기계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하는 또 하나의 인문의 행위는 무엇일까를 묻는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봄(시선)’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권력은, ‘봄’과 ‘보임’ 그리고 ‘보여줌’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그 사이의 차이가 나와 당신의 사이에서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냈다. 모든 게 보기 나름이고, 보이기 나름이고, 보여주기 나름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시선)’을 통해서 서로 나누어 보는 것, 그것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의 세계다.

이광수 교수는 인도 종교와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이자 사진비평가이다. 인도 근대사 연구 중에 사진이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비평의 길로 들어섰다. 또한 2009년부터 2019년까지 한 해에 2-3차례 인도에 방문, 체류하여 인도 세계의 종교, 문화, 생활, 역사의 현장 등을 사진에 담아 왔다.

이광수 교수의 신작 『나는 본다, 사진이 나를 자유케 하는 것들』은 사진 놀이를 통한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를 펼쳐보이는 인문 에세이이다. 지난 10년간(2009-2019) 이광수 교수는 필사적이다시피 카메라를 메고 인도로 향했다. 인도 세계에 가면, 보지 못했던 것들, 잊힌 것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거기 어떤 신성함이 드러내준 존재들을 카메라라는 기계를 대동해 몸뚱이 육안으로 보고 읽고 해석하다가 이내 자유케 되는 기쁨을 만끽해 갔다. 이런 시간을 본격적으로 가진 지 10년째다.

저자가 접한 세계 안에 정해진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보기 나름이고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것이 자연이든 자연이란 이름으로 드러난 신의 본질이든, 저자는 저자 마음대로 보고 해석한다. 그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봄의 이치”이다. 이는, 힌두 세계에서 말하는 알현謁見의 이치와 비슷하다. 그는 드러내고, 나는 보는 이치. 그 안에서는 자신이 보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그가 드러내주는 것이 우선인 이치다. 그래서 마음대로 보고 해석한다지만, 결국 그 자연이라는 존재에 대한 경외가 그 밑바탕에 깔린다. 저자는, 그 경외 위에서 그렇게 대상을 접하고, 자신의 눈으로 잡아내 자신이 해석하는 것을 인문을 긷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 인문을 긷는 것은 카메라로 할 때 가장 자유스럽다. 이를테면, “카메라가 나를 자유케 해주는 것”이다.

이 책 『나는 본다, 사진이 나를 자유케 하는 것들』은 카메라로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을 통해 서로 나누어 보는 것, 디지털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 우리가 하는 인문의 행위는 무엇일까를 탐사한다. 한국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들, 우리에게 잊힌 것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사진(순간)으로 포착하면서, 사진가의 렌즈에 비친 언어(봄)와 그 세계가 나누는 것들(권력)에 대해 사유해 간다. 그 세계에서 단순한 느낌이나 한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그 대상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사진으로 하는 인문적 사유의 세계이다.


사진은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사진으로, 봄(시선)과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다.

이광수 교수는 사진과 글이 자유롭게 교차하는 이 책에서 사진, 봄의 이치, 그리고 권력에 관한 인문학적 사유를 전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진은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이 교수는 이를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한 구절, “이것은 해석이지, 텍스트는 아니다.”에서 전거를 인용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봄’에 관한 이 세계의 이치다. 사진을 매개로 하여 말하자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물에 대해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벗어나 카메라의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다. 인간의 눈과 카메라의 눈은 모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기계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어떻게 조절하느냐 즉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저자는, 힌두 세계의 ‘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간이 그렇게 보는 것은 신이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드러내는 것이니 그의 뜻에 따라 그 성안聖眼을 알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본질을 볼 수 없으니, 그 상을 만들어 그 신을 보게 된다. 그 안에는 신이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성안의 ‘보여줌’이 있고, 그 후에야 비로소 인간이 하는 알현의 ‘봄’이 가능해진다. 보여줌과 봄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봄’과 ‘보여줌’과 ‘보임’의 세계, 그것은 신에 대한 알현은 인간의 주체이지만, 신의 주체이기도 해서 결국 하나가 되어 가능해진다.     
‘봄’의 문제는, 그래서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인간을 보든, 자연을 보든, 신의 상을 보든 그것은 본질이 드러내는 것을 알현할 뿐이다. 그것을 숭배하거나 보존하거나 하는 것은 어떤 우열을 가리거나 그 질의 규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본질을 알현하려 하지 않고, 드러난 모습을 숭배하려 든다. 변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것을 숭배하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서 하는 짓이다.
저자는 질서라는 권력자들이 설정한 세계는 서로 다른 ‘봄’이 공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본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이 ‘봄’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진이란 세계를 자신이 보는 바에 따라 해석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전유하는 행위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봄 안에 들어 있는 권력

권력은 물질의 수단을 어느 한쪽 소수가 차지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수단을 독차지한 소수는 다수로 하여금 자신들이 해석한 세계 안에 들어와 그 정한 가치에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하도록 만든다. 여러 가지 이름이 있겠지만, 모두 강제다. 그 안에서 달리 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그렇게 세계를 ‘봄’은 자연을 부정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질서라는 이름으로 세우는 전통과 문법이 된다. 그리고 그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것은 질서의 파괴자로 규정하여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 저항의 시도는 전통과 문법의 틀에 따라 때로는 유치한 것으로, 때로는 위험한 짓으로, 때로는 미치광이로, 때로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매도당하고 처벌당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저항하는 위험한 자들로 하여금 전통과 문법의 틀 안으로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가르친다. 그것이 도덕이고 그것이 종교다. 도덕과 종교는 회개하고 회심하는 자를 용서하고 품에 안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자는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시킨다. 그들이 달리 보지 말라는 것을 끝까지 부인할 때 말이다.
질서라는 권력자들이 설정한 세계는 서로 다른 ‘봄’이 공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세계 안에서 팩트는 존재하나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어떤 생각은 어떤 기준에 맞춰져 균질하게 되고 단순화되어 진리로 자리 잡는다. 그것이 종교다. 그 종교는 처음에는 진리를 찾아 구도하는 단순 발심에서 시작하지만, 이후로 조직과 돈을 갖추게 되면서 진정한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그 틀은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일방적으로 통용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널리 유통된다. 결국, 종교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군림하는 반(反)진실의 토대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진리 안에서 자유롭다는 신화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이 ‘봄’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진이란 세계를 자신이 보는 바에 따라 해석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전유하는 행위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마찬가지로 남도 그가 원하는 대로 보고 해석하고 전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자신이 카메라로 보고 만들어내는 그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우와 열을 가리지도 않고, 그것으로 물질을 구하지도 않으며, 남이 만든 그만의 ‘봄’과 그 결과물을 평가하지도 않으려 한다. 자신 아닌 다른 이도 사진으로 줄 서고, 줄 세우고 하는 일에서 자유로웠으면 한다. 그것이 사진 안 대동세상일 것이다. 카메라를 들어 세계로 가까이 가볼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이야말로 디지털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기계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하는 또 하나의 인문의 행위이다.


봄 안에 자리 잡은 욕망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무엇일까? 저자는, 욕(欲)이라 본다. 욕이 없다면 행위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어떤 관계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면 세상의 삶도 없을 것이다. 욕의 삶을 부인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 절대 고독 속에서 궁극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개인으로서 욕을 제어하는 삶에 도달하긴 했다지만, 그것의 최대치는 결국 개인 차원에서일 뿐이다. 그들의 제자는 결국 다시 세상 안으로 들어와 관계를 맺게 되니, 욕을 버리는 것을 부정하는 기제는 이전보다 더 강고하게 되어 더욱 세상적으로 되고, 그 안에서 욕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도돌이표의 인류사는 인간 삶의 뿌리가 절대적으로 욕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욕망은 변증법적으로 변태하여 커지고 그 변태된 새로운 욕망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그것이 역사가 된다. 역사는 결국 욕망을 통해 인간 본성이 구체화되도록 운동하는 힘의 궤적이다. 우리는 누구든 시간이 흐르고 그것이 역사를 만들어내는 한 욕망을 버릴 수는 없다.
내가 안간힘을 다해 잡으려, 잡으려 애쓰는 그 욕은 나를 변화시키는 본질이 된다. 나에게 세계는 거울이나 창에 비친 아무런 에너지가 없는 반영이 아니다. 누군가가 정해 준 도덕이나 질서에 따라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살아가는 그런 삶이 아니고, 나의 욕이 추동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세계 한가운데 고독하게 서 있는 독자적으로 완전한 존재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그 세계는 나와 우리가 만드는 변화하는 어떤 비실체적 실체다. 그래서 욕은 인간이 살아나가는, 인간을 품어 움직이게 하는 자연의 일부다. 애써 살아가는 욕을 집착으로 규정하는 것은 세계를 환(幻)으로 보는 것이다. 소수가 만들어낸 초월성 혹은 신에 굴복한 ‘봄’이 만들어내는 세계 안에서의 일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희생을 강요당하고, 그 강요 위에서 희생당한 자는 신화로 포장된다. 그리고 그를 희생시키는 공동체는 물질의 번영을 만끽한다. 그러나 그 번영은 소수의 것일 뿐이다.
카메라는 눈앞에 보이는 실체를 아무 본질 없는 허탄한 이미지로 만들어버리는 기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허탄한 이미지를 어떤 실체가 있는 본질로 삼는다. 그 위에서 진실을 규명하고, 남의 ‘봄’을 규정하고 판단하고 그것으로 사람마저 재단한다. 그리고 권력이 된 어떤 소수가 정한 문법 위에서 그 ‘봄’의 가치를 평가하고, 그것으로 권력과 부와 명성을 쌓는다. 본질적으로 사람도 없고, 삶도 없고, 사랑도 없는 이미지의 세계 안에서 누군가 쌓은 권위 아래로 스스로들 굴복하여 들어가고 줄을 선다. 욕망이라는 사람이 살기 위해 가동시켜야 할 에너지가 이미지에 덮여 사람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는 카메라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곰곰이 무겁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봄’과 ‘나’ 사이, 사진

사진은, 니체의 언설을 빌려 말하자면,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것, 그것이 카메라를 둘러싼 ‘봄’의 이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앞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에 대해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벗어나 카메라의 눈으로 보고 그 대상의 일부만을 취해 사람들이 보도록 재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눈과 카메라의 눈은 모두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성과 감성을 통제하는 ‘나’에 의해 제어될 수밖에 없고, 기계라 하더라도 결국 그 사람의 눈에 따라 보는 것이 조절되고 통제될 수밖에 없다. 대상 가운데서 무엇을 보느냐, 왜 보느냐, 어떻게 보이게 하느냐를 정해야 사진하는 행위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다 보니, 사진이란 ‘봄’과 ‘나’ 사이에서 만들어진 행위의 결과다. 결국 ‘나’의 문제다.
‘봄’의 이치는 그가 사람을 보든, 자연을 보든, 신의 상을 보든 그것은 그 대상의 본질이 드러내는 것을 보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재현하거나 그 재현물을 전시하거나 숭배하는 것은 어떤 우열을 가리거나 그 질을 규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도 재현할 수 있어야 하고, 저렇게도 전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숭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에 따르고, 세계를 운항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본질에 더 합당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본질을 알현하려 하지 않고, 드러난 재현의 겉모습을 전시하고 숭배하려 든다. 종교가 그러더니, 물질이 그렇고 요즈음은 사진하는 것이 가장 그렇다.
중요한 것은 사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선 아는 일이다. 사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카메라라는 기계, 그 기계로 대상을 취하는 ‘봄’ 그리고 그 ‘봄’을 통제하는 ‘나’. 당신은 그 셋의 메커니즘 안에서 카메라라는 도구로 뽑아낸 이미지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왜 그 많고 많은 도구 중에 사진이라는 것을 택하는지? 그림도 있고, 동영상도 있고, 글도 있는데, 왜 당신은 그 카메라라는 도구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혹시 카메라가 조작하기 쉽고 그것으로 뭔가를 말하기가 쉬워서인지는 아닌지 계속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디지털의 시대에 글보다 그림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진으로 인문을 하는 일이다. ‘봄’과 ‘보임’ 그리고 ‘보여줌’의 차이에 대해 사색해 보자. 그 사이의 차이가 나와 당신의 사이에서 어떻게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살펴보자. 모든 게 보기 나름이고, 보이기 나름이고, 보여주기 나름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을 통해서 서로 나누어 보자. 그것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의 세계다.

필자 소개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이자 사진비평가이다.
시민운동가로서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만원의 연대’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 진보 정당 당원으로 활동해 왔다. 인도 근대사 연구 중 사진도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비평의 길로 들어섰다.
저술로는 인도사에 관한 것으로 『슬픈 붓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등의 지은 책이 있고,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성스러운 암소 신화』 등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에 관한 책으로 『사진 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최희철과 공저), 『사진으로 생각하고 철학이 뒤섞다』(최희철과 공저), 『카메라는 칼이다』 등의 지은 책과 『사진으로 제국 찍기』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은, 니체의 언설을 빌려 말하자면,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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