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 박정희 vs 마오쩌둥 - 한국 중국 독재 정치의 역사
박형기 지음 / 알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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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박정희 vs 마오쩌둥

 

한국·중국 독재 정치의 역사

 

박형기 지음33616,000원 출간일 2014년 10월 25ISBN 978-89-97779-43-7 03910

 

분야 역사동아시아사한국사

국내도서 사회과학 정치학/외교학/행정학 정치인


 

동북아시아 영웅 3인의 인생 역정을 탐험해 보는 시간 여행

 

박형기는 그동안 언론사에서 홍콩 특파원과 국제부 기자 등을 거치면서친디아』『중화 경제의 리더들』『덩샤오핑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 중국 문제와 국제 경제에 관심을 두고 천착해 왔었다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박정희라는 역사 인물에 대해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선을 찾고자 하는 이 기획에서저자는 해외로 시각을 돌려보자고 제안한다

 

 

 

 

 

주소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373-4 성지빌딩 615 전화 325-2015 팩스 325-2016 

E-mail alephbook@naver.com 휴대전화 010-9383-8534 

  

 

작품 소개 

 

 

■ 중국 혁명의 마오쩌둥개혁개방의 덩샤오핑유신의 박정희

독재의 세 얼굴을 통해 중국과 한국의 현대사를 재구성하다!

 

산업화 세력은 박정희를 반신반인으로 미화해 왔고산업화 세력으로부터 탄압받았던 민주화 세력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업적을 애써 무시해 왔다이에 따라 박정희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진영 논리의 틀에 갇혀 박정희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이에 따라 필자는 국제적 시각으로 박정희를 재평가해 보는 것이 박정희를 객관화하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다른 나라 지도자와 비교해 보면 박정희가 과연 반신반인의 자격이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멀리 갈 것도 없다마침 중국에는 반신반인이라고 불리는 지도자가 있다바로 마오쩌둥이다

신중국을 건설한 마오쩌둥은 집권 후 수천만 명을 아사시키는 등 실정을 거듭했다그래도 중국인들은 그들을 먹고 살게 해준 덩샤오핑보다 마오쩌둥을 훨씬 더 좋아한다

저자가 중국 취재 여행을 다닐 때중국인들에게 왜 당신들은 잘살게 해준 덩샤오핑보다 수천만 명을 아사시킨 마오쩌둥을 더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약속이나 한 듯 덩샤오핑은 우리에게 돈을 벌게 해주었다. ‘마오주시(毛主席그들은 반드시 이렇게 부른다)’는 우리의 체면을 살려주었다돈은 언제라도 벌 수 있지만 한번 깎인 체면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는 답을 듣곤 했다

마오쩌둥은 중국 땅에서 모든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중국의 자주를 확보했다만약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했더라면 중국은 제2의 일본이 됐을 것이다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었겠지만 자주를 잃었을 것이다일본이 미국의 핵우산 아래 들어가는 순간일본이 세계 최강국이 될 가능성은 사라졌다장제스가 집권을 했더라면 중국은 제2의 일본이 됐을 것이다그러나 중국은 마오쩌둥 덕에 미국의 핵우산 아래 들어가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만큼 뛰어난 업적이 있었고또 마오보다 훨씬 세련된 리더십을 구사했다만약 덩샤오핑이 없었더라면 중국은 소련의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그러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덕분에 중국은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위협하는 유일한 나라가 됐다덩샤오핑은 또 천안문 사건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래도 중국을 통치했다이에 비해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을 위협받자 문화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탈환했다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마오는 권력으로 통치했지만 덩은 권위로 중국을 통치한 것이다덩이 마오보다 한 차원 높은 리더십을 구사한 셈이다.

그럼에도 덩은 중국에서 반신반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중국에서 반신반인의 대접을 받는 현대 인물은 마오쩌둥이 유일하다돈은 언제라도 벌 수 있지만 한 번 잘못 쓰인 역사는 다시는 바로잡을 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박정희도 덩샤오핑처럼 한국의 백성들을 먹고 살게 했다그러나 그는 덩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덩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만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젊음을 바쳤을 때박정희는 일본군(만군)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의 첨병 노릇을 했다그리고 박정희는 집권 과정도 정당성이 없었다박정희는 쿠데타로 집권했다마오와 덩도 무력으로 집권했다그러나 이들은 정당성이 있었다중국은 쑨원이 청조를 무너트리고 중화민국을 열었으나 위안스카이의 반정으로 공화정이 곧바로 막을 내렸다이후 중국은 군벌과 국민당 공산당이 내전을 벌였다마오와 덩은 이 내전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난세의 영웅들이었다그러나 한국은 1948년 해방 이후 민주주의를 채택했다박정희가 정치를 하고 싶었다면 출마해 국민의 선택을 받는 것이 규칙이었다박정희는 이 같은 규칙을 무시하고 쿠데타로 집권했다

 

저자는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을 평가절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그가 한국의 경제 발전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박정희는 조국을 근대화한능력 있는 정치인이었다그러나 반신반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정통성이 너무 취약하다박정희가 위인도 아닌 반신반인이라면 그의 이력도 완벽해야 한다그러나 박정희는 혈서를 써가면서까지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했고헌정 질서를 유린하고 정권을 잡았으며그것도 모자라 유신이라는 제2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사실 박정희는 반신반인은 물론 위인의 범주에 넣기도 힘들다위인은 보고 배울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박정희가 위인이라면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식민 시대가 다시 온다면 식민 종주국에 충성해라앞으로 다시 군부독재 시절이 온다면 군부독재에 협력해라그리고 반칙을 일삼더라도 무조건 출세해라.”

 

내용 속으로 

 

 

■ 정당한 권력”(마오쩌둥덩샤오핑) vs “부당한 권력”(박정희)

 

저자는 먼저 박정희마오쩌둥덩샤오핑의 공통점을 찾는다이들은 모두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고 독재자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권력의 재구축을 위해서도박정희는 유신마오쩌둥은 문화혁명덩샤오핑은 천안문 학살을 지시했다

이들은 젊은 시절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냈기 때문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마오쩌둥의 어록)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마오는 대장정항일 전쟁국공 내전을 치렀다덩샤오핑도 항일 전쟁과 국공 내전 과정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 유능한 지휘관이었다박정희도 만주에서 팔로군과 싸웠고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저자는 이들이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마오와 덩은 정당성이 있었지만박정희는 정당성이 없었다박정희는 헌정 질서를 무너뜨렸지만마오와 덩은 그렇지 않았다마오쩌둥은 농민의 영웅이었을 뿐 아니라중국 땅에서 모든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신중국을 건설한 민족의 영웅이었다그러나 박정희는 정권을 잡기 위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총칼을 사용했다박정희가 정치를 하고 싶었다면 군복을 벗고 출마해 국민의 심판을 받았어야 했다

 

 

■ 경제 실정”(마오쩌둥) vs “경제로 제건국”(덩샤오핑박정희)

 

마오쩌둥은 집권 후 대약진운동문화혁명 등 실정을 거듭했다특히 그는 대약진운동으로 중국 경제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붕괴 직전의 중국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지도자가 바로 덩샤오핑이다박정희도 기아선상을 헤매던 한국의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박정희와 덩샤오핑은 경제로 제2의 건국을 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박정희와 덩샤오핑은 집권 후 세계의 보편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박정희는 만주와 일본미국을 직접 경험한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코즈모폴리턴(국제인)이었다덩샤오핑 또한 젊은 시절 대부분을 프랑스와 소련에서 보냈다실제 이들은 집권과 함께 조국을 세계의 보편 질서에 편입시켰다박정희는 국민의 엄청난 반대에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함으로써 한미일 삼각동맹에 가입했다한미일 삼각동맹은 전후 동북아시아의 보편 질서였다박정희는 한미일 삼각동맹에 가입함으로써 안보와 경제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덩샤오핑도 집권 이후 대외에 문호를 개방했다덩샤오핑은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기술과 자본을 들여와야 하고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미국 등 선진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집권 직후 잇따라 일본과 미국 방문에 나서 양국과 국교를 정상화했다중국에 있어 일본과 미국은 한때 전면전을 불사하던 불구대천의 원수였다그러나 중국은 나라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이들의 자본과 기술이 필요했다그리고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화가 긴요했다.

박정희와 덩샤오핑이 조국을 세계적 보편 질서에 편입시킨 덕분에 한국과 중국은 빠르게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이들 때문에 중국은 미국과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고대한민국은 세계 15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다경제적 관점으로만 볼 때박정희와 덩샤오핑 모두 반신반인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박정희와 덩샤오핑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덩샤오핑이 중국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청춘을 바쳤을 때박정희는 일제를 위해 젊음을 바쳤다이뿐 아니라 덩샤오핑은 박정희보다 훨씬 세련된 통치술을 구사했다

 

 

■ 폭력으로 통치한다”(마오쩌둥박정희) vs “권위로 통치한다”(덩샤오핑)

 

박정희와 마오쩌둥 리더십의 핵심은 폭력이었다이들은 정치적 리더십이 바닥났을 때 동원한 것이 폭력이었다박정희와 마오쩌둥은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특히 이들은 문화혁명과 유신이라는 체제를 동원했다마오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을 위협받자 문화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탈환했다박정희는 더 이상 법률에 의한 정상적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유신을 선포했다유신과 문화혁명 기간 수많은 사람이 박정희와 마오쩌둥에 의해 희생됐다이들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정적을 제거하거나 억눌렀다마오의 제물은 류샤오치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등이었고박정희의 제물은 김대중장준하 등이었다.

세 독재자 중 그나마 정당한 리더십을 행사한 인물은 덩샤오핑이다덩샤오핑도 집권 후 폭력을 쓴 적이 있다덩은 천안문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그러나 이는 일시적 폭력이지 구조적 폭력은 아니었다이에 비해 문화혁명과 유신은 일시적 폭력이 아닌 구조적 폭력이었다

덩샤오핑은 천안문 사건 이후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래도 중국을 통치했다권력이 아닌 권위를 빌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박정희의 유신과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은 그들이 죽자마자 부정됐다이들은 권위가 아닌 권력으로 통치했기 때문이다권력이 아닌 권위로 통치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덩샤오핑은 마오쩌둥박정희보다 한 차원 높은 리더십을 구사한 것이다.

 

 

■ 박정희를 반신반인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까닭은

 

그럼에도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반신반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중국에서 반신반인의 대접을 받고 있는 현대 인물은 마오쩌둥이 유일하다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이라는 탁월한 업적마오와 함께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항일 전쟁에도 직접 참전한 정당성그리고 마오와 박정희보다 한 수 위의 리더십을 갖추었음에도 반신반인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정당성 또는 정통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단연 김구 선생이다김구 선생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국 현대 인물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 1위를 도맡아 한다김구 선생은 업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는 독립운동을 했다그러나 독립은 김구의 광복군이 아니라 미국에 의해 이뤄졌다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은 항복했고이에 따라 한국은 독립했다김구 선생은 또 정권 쟁취에도 실패했다그만의 업적을 쌓을 기회조차 잡아보지 못한 것이다그럼에도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그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국민을 먹여 살린 덩샤오핑이 아니라 국민을 굶주리게 했지만 중국 현대사의 정통성을 한 몸에 구현한 마오쩌둥이 반신반인의 대접을 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저자는 반신반인이라는 단어는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업적도 업적이지만 무엇보다도 정당성을 완벽하게 갖추어야 한다박정희보다 정당성을 더 갖추고 한 차원 높은 리더십을 행사한 덩샤오핑도 반신반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하물며 일제 타도의 선봉에 서기는커녕 일제 침략 전쟁의 첨병 노릇을 했고헌정 질서를 유린해 가며 집권한 박정희가 반신반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 한국·중국 독재자 3인의 12가지 리더십

 

마오쩌둥

정통성 마오쩌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질 때마다 정통성이란 무기로 그 위기를 돌파했다.

지적 능력 마오는 정치가이기 이전에 당대 최고의 사상가였다마오는 지적으로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자주 마오는 평생을 자주로 일관한 정치가였다.

폭력 마오쩌둥은 폭력의 화신이었다특히 반대파를 무자비한 폭력으로 억눌렀다.

 

 

덩샤오핑

화합 정치의 달인인 그는 친구의 극대화적의 극소화라는 명제를 뼛속 깊이 체화한 인물이었다.

권위 덩샤오핑은 권력이 아닌 권위로 중국을 통치했다

유연 덩샤오핑은 유연한 발상을 했다덩샤오핑은 발상뿐 아니라 정치 리더십도 부드러운 지도자였다.

보편 덩샤오핑은 평화를 지향했고합리적이었다그는 특히 세계의 보편적 질서를 존중했다.

 

 

박정희

가난 극복 박정희의 개인적 가난은 그 자신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우리 국민에게는 행운이었다그의 가난 극복 리더십이 경제 발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실력과 소탈 박정희는 탁월한 실력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박정희는 실력과 인격을 겸비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마이웨이  박정희는 반대가 많아도 국익 또는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면 자신의 길을 걸었다.

폭력 집권 이후 박정희 리더십의 요체는 폭력이었다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을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는 빠른 승진을 선물했다.

 

 

 

저자 소개 박형기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성곡재단 펠로우로 홍콩 중문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광주일보홍콩특파원을 지내면서 중국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다. 10여 년 동안 <머니투데이국제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브릭스와 친디아’ 개념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등 국제문제에 천착했다. <머니투데이국제부장온라인 총괄부장 등을 지낸 뒤 현재는 고향에서 가업을 잇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친디아덩샤오핑-개혁개방의 총설계사중화경제의 리더들친디아의 비밀병기 화교 인교』 등이 있다

 

 

목차

 

프롤로그 반신반인이라는 말을 한국에서 처음 듣고…… 

 

 

1부 독재자와 권력자:

한국·중국 독재 권력의 세 얼굴

 

1 자주의 마오쩌둥 vs 보편의 덩샤오핑

2 박정희마오쩌둥덩샤오핑 권력의 유형

 

 

2부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박정희마오쩌둥덩샤오핑의 권력 쟁취 과정

 

1 박정희와 군사 쿠데타 

 

2 마오쩌둥과 공산혁명

 

3 덩샤오핑과 신중국 건설

 

3부 잘살아 보세” vs 개혁개방:

베이징 컨센서스서울 컨센서스

 

1 대한민국 근대화의 기수박정희

 

2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덩샤오핑 

 

4부 독재 권력은 어떻게 합리화되었는가?

마오쩌둥덩샤오핑박정희의 권력 재구축 과정

 

1 마오쩌둥과 문화혁명

 

2 덩샤오핑과 천안문 사태 

 

3 박정희와 10월 유신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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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 - 개그와 함께하는 3일간의 논리 여행 청소년 인문학 캠프 시리즈 3
김성우.송진완 지음 / 알렙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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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

개그와 함께하는 3일간의 논리 여행

 

김성우, 송진완 지음|232쪽|판형 국판변형(140*205)|13,000원 

2014년 11월 25일|ISBN 978-89-97779-45-1 43170

 

 

 

 

 

분야 : 청소년 / 인문

 

<열여덟을 위한 철학 캠프>, <신화 캠프>에 이어, 청소년 인문서 제3탄 <논리편> 출간!

개그 공연을 즐기면서 논술을 공부하는 초ㆍ중ㆍ고 공통 창의체험 활동

「논술 개그」시즌 1 공연 단행본 출간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부러웠던 지점은 내가 만들고 있고 만들어왔던 코미디 콘텐츠도 누군가가 숨어 있는 의미와 철학을 끄집어 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코미디는 그 시대의 문명, 문화 그리고 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는 내가 꿈꾸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고맙고도 고마운 책이다. 부디 이 책을 통해 학생들과 대중들이 보다 쉽고 친숙하게 논리학에 접하고, 생각하는 재미에 푹 빠지시기를 바란다.

─ 김석현 PD(tvN 「코미디빅리그」 대표 PD)

 

 

 


인기 개그 코너 속에 숨은 웃음의 코드는 무엇일까?

 



 

 

경고: 이 영화를 보다가 어패류 이름을 말하면 죽는다. 

 

김준호: 야 심현섭! 머리가 왜 이 모양이야. 나랑 같이 머리 하러 미장원 가자.

심현섭: 아이, 귀찮어.

김준호: 그러지 말고 나랑 가자 미장원 (당황하며) 가자미장원!! 가자미!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스크림>, 「개그콘서트」(1999)

 

「개그 콘서트」 <스크림>은 요즘 보면 다소 썰렁할 수도 있는 추억의 말놀이 개그이다. 그런데 이 개그는 단순한 말놀이, 말장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논증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논증의 구조가 큰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철학자 김성우와 공연 기획자 송진완이 만나서, 웃음과 유머를 논리와 철학에 결합하는 색다른 시도를 했다.『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개그 프로그램을 소재로, 그 속에 숨은 통찰과 가치에 대한 도전, 그리고 웃음 코드를 짚어내는 책이다. 

웃음은, 철학자들의 오랜 탐구 대상이자 일반 대중이 철학적 문제의식에 쉽게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이었다. 특히, 현대 철학에서는 웃음을 철학적 사유 방법으로 삼아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연구와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철학과 웃음이 모두, 날카로운 통찰과 창의적인 표현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획은 웃음에 관한 여러 콘텐츠 중에서 특히 TV 속 개그 코너를 철학에 접근하는 로 사용하여 일반인들이 더욱 쉽고 재미있게 철학과 인문학에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논리 지식은 덤이다. 

 

 

「개그 콘서트」, 「코미디빅리그」, 「웃찾사」, 「코미디의 길」…… 

수많은 개그들의 웃음 코드를 논리와 철학으로 풀어보는 유쾌한 사색의 시간!

 

이 책은 독자가 실제로 즐겨 보고 있는 유명 개그 코너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개그 콘서트」 「웃찾사」「코미디의 길」「코미디빅리그」 등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선보였던 수많은 개그 코너들을 통해 웃음의 철학과 웃음의 논리를 다루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개그 콘서트」의 <스크림>이라는 코너는 철학자 베르그송의 기계적 경직성이라는 웃음 이론으로 분석할 수 있다.(39쪽) <꺾기도>가 선보였던 개그계 최고의 필살기 꺾기라는 웃음 코드는 철학자 칸트의 웃음의 불일치 이론과 쇼펜하우어의 웃음의 지혜, 그리고 그를 숭배했던, 인류가 낳은 최고의 코미디언인 찰리 채플린의 웃음 철학과 맞닿아 있다.(67쪽)

 

그뿐인가? 「코미디 빅리그」의 <사망 토론>, 「개그 콘서트」의 <박대박>이라는 토론 개그 코너는 프로이트가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말한 농담 기술, 즉 전치(前置, 자리바꿈)와 관련 있다.(108쪽)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는마요네즈 소스와 연어 요리라는 유명한 유머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바로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이용한 유머다. 

 

어느 몰락한 남자가 부자 친척에게 자신의 딱한 처지를 여러 차례에 걸쳐 호소한 결과 돈을 빌렸다. 그러나 바로 그날 그 부자 친척은 식당에서 마요네즈 소스를 친 연어 요리를 앞에 놓고 있는 그와 마주치게 된다. 친지가 비난을 퍼붓는다. 

아니, 나한테서 돈을 빌려 연어 요리를 먹다니! 이러기 위해서 내 돈이 필요했던 거요?

그가 대답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돈이 없을 땐 연어 요리를 먹을 수 없고, 돈이 있을 때는 연어 요리를 먹어선 안 되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난 언제 연어 요리를 먹어야 합니까?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중 마요네즈 소소의 연어 요리라는 유머

 

박영진은 유명한 야구 선수이다. 기자인 박성광이 야구 선수인 박영진에게 질문을 한다.

박성광: 야구는 어떤 계기로 하게 되었나요?

박영진: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선수가 있었는데 그 선수를 보면서 꿈을 키웠어.

박성광: 그 선수가 누구인가요?

박영진: 데이비드 베컴.

박성광: (당황하며) 축구 선수를 좋아했다면 축구 선수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박영진: 무슨 소리야, 그럼 여자 좋아하면 여자 되냐? 난 여자 좋아하는데 왜 여자가 안 됐어?

박성광: ?                                                                                    ――『개그 콘서트』 <박대박> 중에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이 책에서 논증의 오류를 이용하여 농담을 만드는 다양한 기술을 소개한다. 위처럼,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의도 확대의 오류)를 활용한 농담 기술도 이 책에 등장한다. 이 농담 기술을 그는 자리바꿈(전치, displacement)이라고 부른다. 전치는 심리적인 에너지가 투자되는 대상의 바꿔치기가 일어남을 의미한다. <박대박>에서 박영진 씨가 박성광 씨의 주장을 왜곡하여 엉뚱한 것으로 제시하며 논점을 일탈시키는 행위가 바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자리바꿈에 해당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논증의 오류들이 개그에서 활용되는 방식들을 분석한다. 개그는 구성이 매우 압축되어 있고, 웃음 코드도 핵심을 찌르는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논증의 오류를 공부하기에 매우 적합한 교재이다.

그동안 유머, 위트 등 웃음의 일반적인 사례를 논리적 사고력의 소재로 다루는 책들이 출간된 적은 있지만, 독자들이 직접 흥미를 느낄 수 있고 TV를 통해 실제로 잘 알고 있는 개그 코너들을 논리 훈련으로 풀어내는 것은 이 책이 최초로 시도하는 작업이다. 논리 훈련에는 명칼럼, 명연설, 명문장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 책은 개그 코너를 소재로 다루어 공부와 함께 재미까지 추구하고 있다. 

 

 

개그가 논리, 철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웃음에 관한 짧은 철학사

 

이 책은 개그가 논리, 철학과 관계를 맺는 기본적인 측면을 주목한다. 

 


우선, 개그가 논리적인 사고력을 높여줄 수 있음을 제시한다. 1부 첫 마당에 등장하는 개그 코너인 <마른인간 연구소>는 완벽히 연역적인 논증 형태로 재구성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개그 속에 숨어 있는 논리적인 구조가 나타나며, 이로써 개그가 논리적인 사고력과 관계 맺는 단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서기 2222년 지구는 우리 비만인들이 지배하게 됩니다. 마른인간들은 거의 멸종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비만인들은 과거에 지구에 살았다는 마른인간에 대해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마른인간들은 앉아서 다리 꼬기가 가능했다고 한다. 우리 비만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마른인간들이 먹던 초콜릿은 뒷면에 알 수 없는 칸이 있다. 혹시 나눠먹는 용도였을까? 비만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 마른인간들은 몸짱이라는 질병을 앓았다고 한다. 몸에 왕(王) 자가 나타나고 몸이 근육으로 딱딱하게 굳어간다고 한다. 비만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질병이다.

       ――「폭소클럽」 <마른인간 연구소> 중에서

 

 

요즈음 「개그 콘서트」의 대세인 개그맨 유민상 씨가 갓 데뷔할 무렵 선보였던 <마른인간 연구소>라는 개그이다. 유민상 씨는 이처럼, 외모 지상주의라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꼬는 내용의 황당한 전제를 통해 황당한 결론들이 이끌어져 나오는 논리적인 상황(필연성)을 제시하여 웃음을 자아낸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개그 코너는 표면적으로는 전혀 논리적인 사고와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논리적인 구조로 재구성되거나 논리적인 사고력을 전제로 한다. 이런 면에서 개그 프로그램은 논리적인 사고 능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강박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캐릭터가 등장하는 「코미디 빅리그」 <죽지 않아>에서는 연역 논증의 기계적 논리성을 예증하며, 찰리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를 통해서는 귀납 논증의 약점을 보여줌으로써 보통사람들에게 논리학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줄 수 있다.

이 책의 3부는 개그를 통해서 인문학 고전에 쉽게 접근하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실제로 웃음에 관한 저서를 남겼던 쇼펜하우어, 베르그송, 프로이트, 니체, 브레히트의 저서를 분석하며 그들이 학문적으로 관심을 보였던 코미디와 웃음에 관한 이론에 그들의 철학적 핵심이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베르그송의 웃음론은 베르그송의 핵심 사상인 삶의 철학을 웃음이라는 관점에서 실험적으로 드러낸 것이며, 프로이트의 웃음론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농담을 통해 무의식을 파헤친 작업이다. 웃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상가, 즉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헤겔, 라캉, 지젝 등에 대해서도 에필로그를 통해 철학사적으로 개괄해 보았다.

이런 내용 전개를 통해 개그가 논리와 철학의 주요한 측면, 논리적 사고, 인문학적 문제의식, 명쾌한 표현 능력과 연관성이 있음을 재미있게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내용적 특징이다.

 

1부 <웃음과 논리>에서는 개그 코너를 논리학 차원에서 논리적 구조물로 재구성하여 논리 공부에 실용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일반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2부 <논증의 오류>편 역시 대표적인 논리 오류 사례를 통해서, 논리적 사고력을 갖추기 위한 훈련을 해보고자 한다. 

3부 <웃음에 관한 짧은 철학사>에서는 웃음을 연구한 주요 철학자들의 생각을 개괄해 보고, 그들의 웃음 연구가 일회성 외도가 아니라 인류 지성의 발전 과정이라는 큰 맥락에서 역사적으로 시도되었다는 점을 밝힌다. 또한 철학자들의 웃음 연구가 단순히 사변적인 차원에서 머무른 것이 아니라 현대의 일반사람들이 즐겨보는 개그 코너에도 담겨 있다는 사실을 분석함으로써, 어렵게만 느껴지는 인문학 고전을 보다 쉽게 접근하고 읽을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 이 책은 애초에 「개그 논술」(대학로 공연)의 기획자인 송진완 씨가 김성우 교수에게 공연의 자문을 부탁하면서 기획되기 시작했다. 개그 코너와 논리·철학 지식을 결합한다는 발상에서, 두 사람의 공저가 이루어진 것이다. 웃음과 논리가 만나고, 유머와 철학이 만나는 낯선 융합이 시도되었다. 공저자 두 사람은, 지난 1년 동안, 개그 코너 속의 웃음 코드를 발견해 내는 유쾌한 지적 작업을 해왔다. 주로 개그의 웃음 코드를 분석하며, 논증의 기본 구도와 연결하는 작업은 송진완 씨가 맡았고, 김성우 교수는 이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다. 

하지만 공저자들의 작업은 형식논리학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코미디철학의 짧은 역사를 다룬 3부와 에필로그를 통해, 웃음의 철학의 내용적 측면을 다루고자 한 것이다. 논리와 철학은 추상적이지만, 개그는 구체적이다. 공저자들이 찾아낸 건강한 시민의 웃음은 반전과 전복의 웃음이다. 공저자들은, 이러한 모순과 불일치의 유머, 해방과 저항의 개그, 위대한 화해와 지혜로운 통찰의 코미디들이 우리 사회의 웃음의 철학적 코드를 드러냈다고 본다. 공저자들은 정치인들의 블랙유머와 냉소는 가짜 웃음이며, 권력에 도구로 이용되는 웃음, 현실에 복종하는 웃음이라 말한다. 그것은 우리 시민에게는 한숨이며 불편함일 것이다. 

공저자들은 결국, 형식논리학이 개그의 반전과 코미디의 전복과 결합한다면 저항의 논리와 통찰의 논리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웃음과 유머에서 삶과 현실의 모순에 대한 통찰과 전통 가치에 대한 도전을 읽어낸다.


추천의 글

 

흥미 있게 읽었던 책 중에 「철학개그콘서트」라는 번역서가 있었다. 하버드대 출신의 두 명의 철학자가 쓴 책으로 유머 속에서 철학을 끄집어내어 알기 쉽게 설명해 주려는 노력이 녹아 있는 책이다.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부러웠던 지점은 내가 만들고 있고 만들어왔던 코미디 콘텐츠도 누군가가 숨어 있는 의미와 철학을 끄집어 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코미디는 그 시대의 문명, 문화 그리고 철학을 그대로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열여덟을 위한 논리 개그 캠프」는 내가 꿈꾸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고맙고도 고마운 책이다. 부디 이 책을 통해 학생들과 대중들이 보다 쉽고 친숙하게 논리학에 접하고, 생각하는 재미에 푹 빠지시기를 바란다.

─ 김석현 PD(tvN 「코미디빅리그」 대표 PD)

 

 

저자 소개

김성우

 

비극을 좋아하는 인간, 우습게도 코미디에 관해 쓰다. 난해함을 사랑하는 학인,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의 대중화에 앞장서다.『스무 살의 철학 멘토』로 대학생을 지적으로 고문하고, 『로크의 정부론』으로 청소년을 테러하다. 영화를 철학으로 읽는 『청춘의 고전』, 미술 걸작의 철학적 분석을 시도한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 문학 고전과 철학의 융합을 시도한 『열여덟을 위한 철학 캠프』 등을 공동 기획/저술을 하다. 우리 눈으로 다시 읽는 교양 수준의 철학사인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를 공동 기획/저술을 하다.

존재의 논리와 실천의 논리의 연계를 고민하는 철학도, 떠돌이처럼 가끔씩 스피노자, 비트겐슈타인, 칸트, 로크, 롤스도 흘겨보며, 한동안 하이데거, 푸코, 아도르노, 니체, 마르크스주의에 열중하다가, 지금은 주로 헤겔, 지젝, 불교, 정신분석학을 읽다. 가르치기보다 책보기를 더 좋아하는 연구자, 역설적이게도 현재 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및 『ⓔ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을 맡고, 여러 대학과 도서관에 출강하며, 초등학생부터 일반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철학으로 만나다.

 

송진완

 

코미디를 좋아하는 인간, 우울하게도 철학에 관해 쓰다. 온라인 언론사, 홍보대행사, 광고대행사 등 미디어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던 직장인, 우연히 개그 극단의 창립에 참여하며 공연 예술이 주는 미학적 힘에 매료되다. 개그 콘텐츠의 인문학적 가치에 눈을 뜬 공연인, 겁도 없이 철학 전공과는 무관하게 10년간 일하다가 철학의 대중화에 뛰어들다.학습과 인성에 도움이 되는 개그 공연을 만들자는 목표를 세워 제작한 「논술 개그」 시리즈를 손에 들고 신인 개그맨들과 무작정 학교로 돌진하여 유쾌한 배움의 장을 열다.

현재 대학로 명품 코미디 연극 「당신이 주인공」을 제작하고, 개그맨 안상태 1인 코미디 연극 「상태 좋아?」를 만들고, 개그 극단 김대범 소극장의 공연기획 실무를 맡고 있으며, 공연기획사 구운피망의 대표이기도 하다. 서울교육대학교 산학협동단과 MOU를 체결하고 「유쾌한 인성교육을 위한 개그 공연」 개발에 여념이 없다.

 

 

 

차례 

 

 

서문  웃음과 유머에 바치는 서

 

첫 날. 웃음을 모르고 논리를 따지남?

 

1마당논리와 뒤집기: 웃음의 코드에는 논리가 있다

2마당기계라서 웃음이 나와: 연역 논증의 웃음 코드 

3마당바보짓에 숨은 논리: 연역 논증의 웃음 코드 

4마당반전은 힘이 세다: 귀납 논증의 웃음 코드 

5마당성급한 일반화는 위험하다: 귀납 논증의 웃음 코드 

 

둘째 날. 오류를 알아야 논리가 보인다람쥐

 

1마당형식에 오류가 있어 웃는다: 형식적 오류

2마당논리 말고 심리!: 비형식적 오류

3마당너의 근거는 불충분해: 불충분한 근거가 문제가 되는 오류

4마당오류투성이 말장난 개그: 애매함과 가정에서 오는 오류

5마당우물에 독 풀어라: 반박을 미리 봉쇄하는 오류

 

셋째 날. 웃음에 관한 짧은 철학사

 

1마당때로는 독설도 웃기다: 쇼펜하우어의 웃음 철학

2마당웃고 춤추자!: 니체의 웃음과 부정의 철학

3마당인간은 왜 웃는가?: 베르그송의 웃음론

4마당유머는 반항이다: 프로이트의 유머론

5마당웃음, 너 되게 낯설다: 브레히트의 웃음론

 

에필로그. 망각에 갇힌 코미디 철학의 짧은 역사

 

 

 

 

책 속으로

 

<스크림>의 등장인물들은 전제의 참, 거짓에 상관없이 곧이곧대로 기계처럼 타당하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어패류 이름을 말하면 죽는다고 했으니 어패류 이름을 말하면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크림>을 보고 웃었다면 베르그송의 웃음 이론이 적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스크림>의 등장인물들이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계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웃은 것입니다. 물론 베르그송은 『웃음』에서 연역 논증이니 논리적 타당성이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웃음 이론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기계적인 경직성이 바로 연역 논증의 기계적인 타당성과 유사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베르그송의 웃음 이론은 연역 논증과 깊은 관련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개그 코너가 다름 아닌 <스크림>입니다.(39-40쪽)

 

개그맨뿐만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웃음의 비밀을 연구한 철학자들도 웃음의 불일치 이론을 통해서 꺾기가 매우 중요한 웃음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순수이성비판』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바로 웃음의 불일치 이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칸트 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1권 13장과 2권 8장)를 통해서 불일치 이론을 더욱 집대성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의 웃음 이론들은 비록 쉽게 읽을 만한 저작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실 생활의 웃음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코미디언이라고 평가받는 찰리 채플린은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 평생 쇼펜하우어의 웃음 이론을 공부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쇼펜하우어 필생의 저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40년 넘게 읽어보려 애를 썼지만 끝까지 다 읽지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비평가들은 채플린의 주옥같은 영화들 속에서 쇼펜하우어의 웃음 이론이 번뜩인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67쪽)

 

이제부터 살펴볼 비형식적인 오류들은 논리가 아닌 마음이나 인간에 호소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상대방의 의도나 주장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공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천만 명이 관람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매우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 논증은 전형적으로 대중이나 다수에 호소하는 오류를 보여줍니다. 다수가 봤다는 전제와 뛰어난 작품이라는 결론 사이에 필연적이거나 개연적인 연관성이 없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다수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소수자가 된다는 서러움과 차별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 논증은 두려운 마음이라는 심리적인 요소에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천동설이 지배하던 당시에 소수의 몇몇 학자가 지동설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면 다수의 사람들이 주장한 천동설이 진리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숫자로 진리를 판가름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대중이나 다수에 호소하는 것이 오류가 됩니다. (99-100쪽)

 

<큰 세계>에서는 뚱뚱함이 곧 세상을 살아가는 권력이다라는 엉뚱한 가정을 참인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고, <부산특별시>에서는 부산이 대한민국의 서울이다라는 거짓 상황을 참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일어나는 황당한 상황들이 웃음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그들이 성공하려면 단순히 거짓된 가정을 참인 전제로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결론 역할을 하는 상황들이 매우 자세하고 디테일하게 제시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전제는 거짓임을 알고 있지만 그 전제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들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럴 때 웃음이 생기는 것이죠. (130쪽)

 

안어벙은 메이드 인 인도네시아(Made in Indonesia)에서 메이드(Made)를 독일어 식으로 소리 나는 대로 마데로 읽습니다. 이를 마치 회사 이름인 것처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언어를 애매하게 사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론을 이끄는 경우도 전제 자체에 문제가 있는 오류입니다. 논리학에서는 이를 애매한 언어를 사용하는 오류 또는 이중 의미의 오류라고 부릅니다. 위의 에피소드에서는 마데 인 인도네시아를 인도네시아의 마데전자로 번역했지만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인도에서 네시에 만들어진이라는 의미로 웃음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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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뭐 대단한 존재라고! 절망이 오히려 희망이라네! [철학자의 서재]

 

마크 트웨인의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김의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내가 보기에 진화는 엉터리다. 인간은 정말로 한심한 실패작이다.”
-커트 보네거트, <나라 없는 사람>(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19쪽)

아동 작가에서 신랄한 독설가로

10년 전만 해도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의 모험 소설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70년대를 유년 시절로 보낸 또래들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읽은 추억담이 있을 것이다. 소설만 아니라 TV에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도 방영됐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아동 모험 소설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사회 비판가, 아니 독설가로 더 유명하다.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 대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는 유년기의 기억 외에 그에 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실상을 알고 크게 놀랐다. 오히려 사회 비판가로서의 말년 행보가 그를 이해하는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마크 트웨인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작가 커트 보네거트를 통해서였다.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직한 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지치고 뉴스가 너무 끔찍하면 유머는 효력을 잃게 된다.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은 인생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그 끔찍함을 농담과 웃음으로 희석시켰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와 단짝 친구와 두 딸이 죽은 후였다.” (<나라 없는 사람>, 126쪽)

커트 보네거트의 소개에 따르자면, 마크 트웨인은 노년기에 이르러 미국이란 나라와 나아가 인류에게 희망을 잃은 듯하다. 실제로 그의 책 번역본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가 이 책을 쓴 시기는 60세를 바라보는 시기였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부인 올리비아는 책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은 책 출간을 만류했다. 그래서 1904년 부인이 사망할 때까지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1906년 처음 발간되긴 하였으나, 특히 성직자들의 반응이 두려워 250부만 찍어 주변 지인들만 돌려봤다고 한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 사후 7년이 되어서야(1917년) 정식 출간되었다.” (마크 트웨인,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 할까>(박영선 옮김, 북인 펴냄) 203쪽, 내용 요약)

선행은 자기만족에 불과

그런 마크 트웨인이 보기에 애초에 인간은 기계에 가깝다. 이 기계가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아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이때 외부의 힘은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 그리고 교육도 외부에서 받은 영향의 결과물인데 그 영향의 대부분은 인간관계다(위의 책 90쪽). 즉 기질 차이만 제외하면 인간은 소속된 사회의 교육과 훈련에 의해 그 판단과 행동이 좌우된다. 여기서 인간관계는 사회적 관계로 풀어도 무방할 듯하다. 마르크스가 말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구절이 연상된다.

마크 트웨인(1835~1910)



기질은 타고난 성질인데 이것만은 아무리 교육을 해보아도 없앨 수 없다고 한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기질에 압력을 가해 살짝 눌러 놓을 뿐이라는 것(위의 책 103쪽)이다. 프로이트는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인간의 공격 충동을 영구히 없앨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조절하는 노력은 가능한데 그게 바로 (교육을 포함한) ‘문화’다.

 

“인간의 공격적 충동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격적 충동을 전쟁으로 발산할 필요가 없도록 그 충동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입니다.” (…) “문화 발전은 어떤 종의 동물을 길들이는 것과 비교할 수 있고, 신체적 변화를 수반하는 게 분명합니다. (…) 문화 발전에 수반되는 ‘신체적’ 변화는 두드러지고 명백합니다. 그것은 본능이 지향하는 목표를 차츰 다른 데로 돌리고, 본능적 충동을 억제합니다.”

프로이트가 볼 때 본능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방향을 조절할 뿐이다. 마크 트웨인이 볼 때 타고난 성질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관리할 뿐이다. 그래서 양자 공히 인간 형성의 주요 기제로 문화의 역할을 거론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격렬한 논란은 선행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주장에서 비롯됐다. 무릇 선행이란 누구에게나 지지와 동의를 얻는 보편적 행위, 즉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우하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힐링’하는 그런 행위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의 의미를 굳이 궁색하게 말하는 건 당시 미국 사회상과 관련 있을 것이다. 앞서 밝혔듯 종교계의 비난이 두려워 초판 간행수를 최소화했다는 게 단서다. 19세기 미국은 청교도 영향 하에 있었으니까, 사고방식과 행동 전반은 종교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주홍글씨>(1850)가 그렇고,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 <크루서블(The Crucible)>(1998)의 어처구니없는 마녀사냥도 그렇다. 행동강령이 외부에서 주어지면 행동을 규제하는 건 당연지사고 규제의 정도 차가 있을 뿐이니까.

“오로지 타인을 위해 선의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네, 온전히 우선 의무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 자기희생의 행위를 하라는 식의 요구를 내놓는 거야. (…) 인간의 내부에 깃든 절대 최고의 군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네. 그리고 우리 인간들 모두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서 그 절대군주에게 호소하는 것이지. 그런데 거기가 틀리지. 다른 무리들은 교묘하게 속여서 몸을 바꾸니까.”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108쪽)

때문에 애써 밖에서 찾지 말고, 나를 진정 기쁘게 하는 행위를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타인이 느끼는 감사함, 고마움은 부차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일단 선행의 이유가 내가 만족하고 즐거워야 한다. 나아가 사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행에서 만족감(일종의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유도해야 한다.

“스스로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이웃과 넓게는 사회에도 선을 뿌리는 행위가 있어야 해. 그래서 그런 행위 속에서 우선 최대의 기쁨을 발견해낸다는 경지에 오르도록 뜻을 두어야겠지.” (위의 책, 106쪽)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선행에서 최대의 만족을 얻는 것은 일정 수준의 도야를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느끼는 기쁨이 반드시 선행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도 일상다반사니까.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자기만족의 전제 – 타인의 행복, 상호 존중

그런데 읽으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선행의 원칙은 무엇이어야 할까? 어떤 행위를 해야 나도 만족할 수 있으며, 또한 타인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타적 행위가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 주도적 행위라면 내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 될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배님의 글에서 그 실마리를 가져왔다. 다소 길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어서 인용한다.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묻는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

이 가르침은 이미 서(恕)라는 글자 안에 다 들어 있다. 서(恕)는 마음(心)이 같다(如)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는 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라’는 식의 긍정형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형으로 표현했을까? 공자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의 가르침 거의 모두가 부정형이다. 우선 긍정형으로 가르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공자가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했다면, 세상 끝장나게 돌아간다. 알다시피 우리는 그리 도덕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힘이 센 나쁜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이 가진 좋은 것을 빼앗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공자가 거기에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하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빼앗게 될 것이다. 착한 사람은 자기 것을 남을 위해 내놓고 싶을 것이다. 마침 착한 사람과 게임을 하게 되면 그만큼 또는 그 이상 돌려받겠지만, 그러나 나쁜 사람을 만나서 자기 것을 내놓으면 그것으로 거래는 끝이 난다.

반면에 부정형으로 하면 사정이 바뀐다. 누구도 자기 것을 남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싶지 않다. 따라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대로 남을 대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 착한 사람도 부정형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나쁜 사람이 더러운 게임을 하고 싶더라도, 이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런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기에 나쁜 짓을 그만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부정형은 무엇보다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남이 나에게 해를 끼쳤을지라도, 내가 보복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줘라’는 말의 숨은 뜻이다.”
(김범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철학박사), ‘철학 강의(15) 사람의 도움원리’ 중에서 인용, ☞바로 가기 다음(DAUM) 카페 ‘fridaybeer’)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 인류사에 등장한 모든 참혹한 반인륜 사건, 인권침해의 공통점은 이 가르침과 상반된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의 강요에 의해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친위대장교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강제로 타인의 강압에 의해 성행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광주 인화학교 직원은 장애인 학생을 성추행한다.

결국 자기만족은 타인에게 억압이나 폭력이 아니어야 하며 타인의 행복이 전제될 때 비롯한다. 그리고 타인의 행복은 내 즐거움을 원해서 나 스스로가 선택한 행동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기 주도적인 선행은 타인의 행복을 동반할 수 있다. 결국 이 원칙은 상호 존중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인권침해 예방의 원리로서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착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책 전반에서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변변치 못한 존재임을 누차 강조한다. 허나 책을 읽고 나서는 그 일관된 냉정한 태도야말로 인간에게서 희망의 근거를 찾기 위한 역설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정녕 인간에게 환멸을 느꼈다면 그런 주제에 관한 책을 쓸 의욕조차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마크 트웨인처럼 인간의 가능성에 붙어 있는 화려한 수사와 막연한 믿음을 제거해야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 섣부른 희망은 결국 착각인데 이 착각이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조급한 희망의 결과는 상반된 현실이다. 그런데 이 현실은 직면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결과적으로는 절망의 과잉 상태에 빠진다.

지난 대선에서 나는 정권의 변화를 염원했다. 하지만 야당이 실력 없고 긴장감 없고, ‘허당’이라는 인식은 이미 지난 총선과정에서 확인됐고, 그 불안의 전조는 민선 5기 지방선거의 승리를 해석하는 당시 야당지도부의 태도에서 조짐이 보였다(기존 여당이 싫어서 반대급부로 찍어준 것뿐인데 자기들이 잘해서 이긴 거라고 자화자찬 하다니!). 하지만 이 정권 하에서 사는 게 하도 고통이라 이번만큼은 무조건 야당 단일 후보에 ‘올 인’했다. 그 후 회자되는 단어는 ‘멘붕’이다. 대선 이후 한 달 넘게 미디어의 정치면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나는 뉴스를 다시 보는데 2주일 걸렸다).

어떻게 보면 멘붕은 좀 더 냉정하지 못한 나 스스로가 선택한 착각의 결과일 것이다. 미래가 불투명해서 조급히 선택하는 미완성의 희망은 후폭풍이 거세다. 그럴 바에야, 냉정을 유지하는 것, 그 버티는 힘이 오히려 희망의 싹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버팀의 시작은 나와 타자가 동시에 행복해지도록, 거기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훈련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 프로그램으로 제안해야 한다. 상호존중과 연대 그리고 냉정! 마크 트웨인의 독설에서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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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문성원, 알렙 간행) 두 번째 포스팅...... 이번엔 구보 씨가 뱀파이어를 생각합니다. 이 글은 e 시대와 철학에 한 코너로 연재되었던 것으로, 책으로 엮을 때 개고되었습니다. http://bit.ly/1aI9IhS

 

 

구보씨 뱀파이어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

이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2009)에 나오는 대사다. 뱀파이어가 된 태주(김옥빈 분)가 자신을 책망하는 상현(송강호 분)에게 내뱉는 말이다. 상현도 뱀파이어다. 그는 가톨릭 신부였는데, 수혈을 받고 뜻하지 않게 뱀파이어가 되었다.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지만,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식물인간이 된 환자의 피나 자살하는 사람의 피를 받아먹는다.

반면, 태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당당하다. 그녀는 신선한 피를 위해 거리낌 없이 인간을 죽인다. 그녀는 뱀파이어고, 뱀파이어는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녀가 인간을 죽이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태주는 상현의 어정쩡한 태도를 비웃는다.

“너는 남의 피로 연명하면서 네 피 한 방울 나눠주는 건 그렇게 아깝냐?”

이것도 <박쥐>에 나오는 대사다. 눈 먼 노(老)신부(박인환 분)가 자길 뱀파이어로 만들어주길 거부하는 상현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뱀파이어가 되어서라도 다시 이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그렇게도 보고 싶으세요? 이 캄캄한 세상이?” 상현은 그러한 욕망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피를 탐하는 노신부를 찔러 죽인다. “가서 쉬세요.” 그러면서 상현은 그가 죽인 노신부의 심장에서 솟아나는 피를 빨아먹는다.

상현은 스스로의 욕망을 쉽게 저버리지 못하면서도 그런 욕망의 탐닉을 막으려 든다. 그는 뱀파이어지만, 윤리적이고자 하는 뱀파이어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정녕 윤리적일 수 있는가? 상현의 말과 행동이 블랙 코미디가 되는 바탕은 여기에 있다. 그는 비닐 팩에 피를 담아 냉장고에 두고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조금 빨아먹다 버리는 건 일종의 인명경시가 아닐까?”

그런데 이런 블랙 코미디의 무대는 영화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는 건 틀림없는 과장이겠지만,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게다가 돈은 뱀파이어와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물질적 지배와 안락만이 아니라 깨끗한 피부와 성형의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 돈의 위력을 가진 이들은 이제 인간 세상의 한 부류로 자리 잡는다. <트와일라이트> 시리즈의 뱀파이어가 어둠과 경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인간 사회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닭을 잡아먹는 여우가 동네에 내려와 닭들과 동거하며 닭들을 관리하기에 이른 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닭이 아닌 여우가 되고자 한다. 기왕이면 멋지고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한다. “뱀파이어면 어때?” 사람들은 피를 탐하는 <박쥐>의 노신부처럼 되뇐다.
영화 ‘박쥐’의 한 장면구보씨가 DVD로 영화를 여기저기 돌려보아 가며 여기까지 얼기설기 썼을 때다. 어느 틈엔가 옆에 와 있던 Y가 끼어든다.

“구보야, 너는 어떻게 영화를 봐도 그렇게 기괴한 영화만 보니? 그 박쥔지 생쥔지 하는 영화는 벌써 몇 번째 틀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참 취미도 괴상하다, 너.”

“어, 미안. 시끄럽다면 헤드폰 끼고 볼께. 난 곧 이 영화로 강의도 하고 글도 써야 하거든. 이제 겨우 한 페이지 썼어. 강의 노트는 아직 시작도 못했고… 근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영화 진짜 볼 만한 영화야. 박찬욱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다구.”

“글쎄, 난 박찬욱 좋은지 모르겠더라. 그 사람 영환 어딘지 좀 구겨진 것 같애.”

“하하…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근데, 어딘가 구겨진 마음이 없다면 영화건 문학이건 불가능하지 않겠어? 구겨진 주름에 세상이 이렇게 또 저렇게 담기고, 그걸 풀어내는 데서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치, 그럼, 주름 많은 사람은 다 예술가겠네? 박찬욱은 그것도 아니고 이제 쉰이 다 된 얼굴이 뺀질 통통하던데?”

“유심히도 봤다. Y, 너 은근히 박찬욱 좋아하는 건 아냐?”

“아니라니까. 난 잔인하고 기괴한 장면들 싫어해. 그런 걸 왜 우리가 영화에서도 봐야 하니?”

“외면한다고 그런 면이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그런 걸 극적으로 제시해서 우릴 자극하고 정화(淨化)하는 게 필요한지도 몰라. 거기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것이고 말이야.”

“기껏 뱀파이어가 그런 거야? 덜떨어진 서양 귀신이 피 빨아먹는 게?”

“Y야, 그게 꼭 그렇진 않다구.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어.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런 걸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잖아. 게다가 원래 뱀파이어는 경계적 존재였어. 이런 존재에게는 정상적 존재에게선 찾기 힘든 갈등과 문제가 있다구. 생각해 봐. 뱀파이어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라구 할 순 없어. 그렇다구 신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네 말대로 귀신인 것도 아냐. 분명히 몸뚱이를 가진 생명체라구. 그러나 짐승이라고 할 수도 없어. 말하자면 일종의 괴물인 거지. 경계적 괴물. 그래서 이걸 어디에서부터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흥미로운 얘기들이 나올 수 있는 거야. 박쥐라는 동물도 원래 경계적 존재잖아. 그런 점에서 이 영환 우리말 제목이 영어 제목보다 나아.”

“영어 제목은 뭔데?”

“Thirst. 갈증… 너무 평면적이지. 하긴 뭐, 저주스런 갈증, 그런 정도의 뜻이고 이미지겠지만.”

“저주스런 갈증? 거기 저주는 왜 붙어?”

“Y야, 이거 뱀파이어 영화라구. 뱀파이어는 피를 마셔야 살잖아. Y 네가 뱀파이어가 됐다고 생각해 봐. 피를 빨아먹는 게 기꺼운 일이겠어? 근데 이걸 욕망 일반으로 해석할 수 있거든. 욕망이라는 게 대부분 희소성이 있는 대상을 향하는 거고, 그래서 누군가를 밀쳐내야 충족될 수 있으니까. 때론 억압하고 착취하고 해서 말이지. 그거 일종의 피 빨아 먹는 거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고 또 만일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면 저주스런 거지. 저주스런 욕망, 저주스런 갈증.”

“구보야, 그건 정말 난센스고 오버센스야. 네 말은 우리 모두가 일종의 뱀파이어란 말이잖아. 그게 말이 돼?”

“내 참, Y야, 그건 내가 좀 전에도 했던 말이야. 넌 대체 내 말을 듣고 있기나 한 거니? 내가 그랬잖아, 뱀파이어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봐. 우리가 다른 생물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꼭 사슴피를 받아먹고 곰의 쓸개즙을 빼내먹는 인간들만 뱀파이어가 아니라구.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해 먹어치우는 방식은 정말 잔인한 거야. 뱀파이어가 차라리 고상할 정도지. 입가에 피 안 묻히고 점잖은 척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한다고 해서 잔인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당하는 동물 입장에서는 더 기가 막힐 노릇 아닐까. 사람들이 사는 부근엔 사육당하는 동물 이외엔 대형 동물들이 남아나질 않아. 특히 육식 동물들은 거의 멸종이야. 경쟁자가 없는 뱀파이어가 인간인 거지. 그뿐만 아니라구. 인간은 인간도 사육하고 착취하잖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말이지. 서로가 서로 피를 빨아먹는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잖아? 아닌 게 아니라, 이 박쥐라는 영화에는 서로 피를 빨아먹는 장면이 있어. 상현이 제 피를 태주에게 먹이면서 태주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 말이야. 실은, 박찬욱이 이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 머리 속에 그려뒀던 장면이 바로 그거라는 거야. 그걸 중심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거지. 재밌잖아?”

“재밌다구? 구보야, 넌 정말 이상해. 잔인하다고 하더니 재밌다는 건 또 뭐니? 잔인한 게 재밌다는 거잖아. 도대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소리야? 박찬욱이나 너나 괜한 과장을 해서 잔인한 면을 만들어내고는 그걸 재밌다고 즐기는 거 아냐? 그건 가학 취미라구. 니들이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거구,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여기는 거야. 니들이야말로 뱀파이어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도 뒤집어씌우는 거 아니겠어? 안 그런 척 하는 너희들도 다 뱀파이어다, 이렇게 세상에 대구 외치는 거잖아. 그거 꼬리 잘린 여우 심정인 거야.”

“아니, Y야, 난 가학적인 걸 즐기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욕망의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거야. 박찬욱은 그런 걸 영화로 표현해 보는 거고… 박쥐의 상현을 봐.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구. 어쩔 수 없이 욕망의 수렁에 말려들어가면서도 거기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지. 그가 악을 행하는 건 다른 악을 막기 위해서야. 가령 뱀파이어가 되려는 신부를 죽인다든가, 태주를 학대한다고 생각하고 강우를 죽인다든가 하는 일이 그래. 그리고 그런 게 더 큰 악을, 파국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자 태주와 함께 목숨을 버리는 쪽을 택하지. 물론 내 얘긴 그런 결말이 좋다거나 필연적이라는 건 아냐. 중요한 건 그렇게 벗어나려는 자세와 시도가 있다는 거지. 그게 일종의 희망 아닐까. 저주받은 갈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 같은 거…”

“구보야, 내가 보기엔 욕망을 적대시하는 네 생각이 애초부터 잘못된 거야. 구원은 무슨 구원이니? 그건 병주고 약주는 것일 뿐야. 옛날부터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작자들이 해 온 짓이라구. 욕망이 있으면 잘 충족시킬 길을 찾아야지, 억지로 억누르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 그게 없어지니? 사실은 그렇게 해놓고 뒷구멍으로 지들만 즐기는 놈들이 따로 있잖아. 구보, 너 같이 정신 못 차리는 철학자나 괜히 구원이니 뭐니 하며 헛물켜는 종교인들이 거기 들러리를 서고 말이야. 그러니까 결국 사람이 구겨지는 거야. 박찬욱도 철학과 출신이지? 그것도 가톨릭 계통 학교를 다녔잖아. 그래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것 아닐까?”

“어, Y야, 그거 인신공격이야. 그리고 근거 없는 얘기라구. 박찬욱이 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철학과를 나와서 영화에 조금이라도 더 깊이가 있는 걸 거야. 박찬욱 영화는 생각보다 치밀하고 섬세하다구. 예를 들어 여기 이 장면도 봐. 장면 배치나 소도구 하나까지도 예사롭지 않아. 동양과 서양, 근대와 현대 따위를 섞어놓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구.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까지 경계적인 면을 찾아 표현하려 한 거야. 한 오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어. 자, 이걸 좀 볼래…”

“됐거든. 구보야, 나 바쁘거든. 그리고 그 영화엔 볼만한 남자 배우 하나 없이 다 구보 너처럼 칙칙한 애들만 나와서 관심 없거든. 그러니 너나 열심히 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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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문성원, 알렙 간행) 첫 번째____구보 씨, 누드모델을 꿈꾸다

이 글은 e시대와 철학에 한 코너로 연재되었던 것을, 단행본에 수록하였던 것입니다.
문성원 교수님(부산대 철학과)은 수년 전부터 본인의 닉네임을 '구보씨'라 하여, 글을 써오고 있죠. 자칫 어려워지는 철학의 형식을 부드럽게 해보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마침 연재 지면에서 콘텐츠가 아주 사라지기 전에, 글을 읽을 수 있답니다. ...
이 글을 읽고 나서 좋으시면, '댓글'과 "퍼담기", 꼭 해주세요.^^

이참에 80년 만에 부활한 한국문학사의 가장 독특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 중 하나인 "구보 씨"를 철학자로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원래 지면에서 읽고 싶으면, 아래 주소를 누르세요.

http://ephilosophy.kr/han/?p=203

구보씨 누드모델을 꿈꾸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제 목
구보씨 누드모델을 꿈꾸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더운 날씨다. 무덥고 갑갑하다. 훌훌 벗어던지고 싶은 때다. 구보씨가 딱히 여름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벗는 건 좋아한다. 아니, 그보다는 걸치고 입는 것을 그닥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렇다 보니, 이런 날씨에 집에 있을 때면 거의 벌거벗고 있을 때가 많다.

원래 인간은 열대 동물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퍼져가기 시작한 것은 대략 4, 5만 년 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정도 기간은 생물학적 변이가 일어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오늘날도 지구상에서 인간이 옷가지나 보온 장치 없이 살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니까, 온대(溫帶)인 우리네 환경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맞는 계절은 여름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생물학적 본성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 여름인 셈이다. 자연스러움으로 잘 지낼 수 있는데 거기에 굳이 인위(人爲)를 덧붙일 필요는 없어, 라고 구보씨는 벗은 몸으로 생각해 본다.

인위는 과잉(過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특정한 목적에만 딱 들어맞는 것은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잉은 대부분 예기치 않은 문제들을 야기한다. 물론 인간의 문화는 그런 과잉의 자극으로 말미암아 발전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옷은 열대의 ‘털 없는 원숭이’ 출신인 인간이 그 활동 범위를 한대(寒帶) 지역으로까지 넓혀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막상 더운 계절에는 거추장스러워지는 것이 옷이다.

어찌 옷뿐이겠는가.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장치와 제도들이 그렇다. 거추장스러워지기만 하면 다행이다. 쉽게 억압적이 되어버린다. 인위의 질서가 자연스러움을 덮고 순응을 강요한다. 그렇게 하여 인위의 본성이 마련된다. 이제 자연은 낯선 것이 되고 만다. 아마존의 조에 족을 생각해 보라. TV 화면에 비친 그들의 벌거벗은 자연스러움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인위의 문명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신체 부위를 가리는 모자이크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옷에 배어있는 인위의 질서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복식(服飾)에서다. 하지만 복식은 사극(史劇)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보씨는 옷차림새 때문에 대우가 달라지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요즘도 옷이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옷에 대한 태도는 사회 질서에 대한 태도를 함축한다. 히피들이 괜히 옷을 찢고 벗어던졌겠는가. 그들의 벗은 몸은 인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표시다.

그런데 이 인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것은 쉽게 찢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으며, 도리어 벗은 몸에 파고든다. 오늘의 실태를 보라. 몸짱 열풍을 거쳐 신체 부위 하나하나를 지배하는 촘촘한 시선. 꿀벅지니 빨래판 복근이니 하는 따위의 웃지 못 할 규정들이 판을 친다. 은희경의 표현대로, 인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고 주눅 들게 하며, 알몸까지 스며든 징글맞은 소비의 질서에 매달리고 아부하게 한다. 오늘날 전시된 벗은 몸은 또 하나의 값비싼 옷이다.

이런 세상에서 구보씨는 누드모델을 꿈꾼다. 물론 구보씨가 몸짱일 리는 없다. 빨래판 복근? 그의 배는 전통의 중년남자가 지닌 봉긋한 여유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 구보씨가 엉뚱한 꿈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본 영화 한 편 때문이었다.

「캐쉬백」이라는 제목의 영국 영화였다. 주인공 청년이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그 실연의 상처 가운데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졌던 것 같다. 세상이 정지된 속에서 자신만 움직일 수 있다고 상상하는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멈춰진 시간, 그 속에서 홀로 누리는 자유로움 ― 이것이 힘든 상황을 잠시나마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프로이트가 말하듯, 유머는 현실에 대한 이런 종류의 거리두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상상의 특권적 거리가 당장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비틀어보게 하고 그 틈에서 숨 쉴 수 있게 한다.

정작 구보씨에게 필이 꽂힌 것은 영화의 전개에 핵심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한 장면에서였다. 주인공 청년은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난한 미술학도였는데, 실연을 당하고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처지에서 미술실기 수업에 들어왔다. 누드 데생 실습 시간이다. 당연히 누드모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누드모델이 머리가 백발인 할아버지였다. 몸매는 물론 몸짱과 거리가 한참 멀다. 그래도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다. 모델을 서면서 ‘뿌우윙’하고 방귀까지 뀐다.

“익스큐즈 미.”

영화 ‘캐쉬백’의 한 장면.

구보씨는 ‘익스큐즈 미’라는 표현이 그토록 적절하고도 미묘한 톤으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색함과 미안함, 뭐 그래도 생리현상인데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약간의 뻔뻔함까지 적절하게 담겨 있다. ‘뿌윙’. 그 시퀀스가 끝나기 전에 할아버지 모델은 다시 방귀 한 방을 날린다.

“익스큐즈 미.”

그래, 바로 저거야, 하고 구보씨는 생각했다. 누드모델이라고 꼭 잘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 오히려 필요한 것은 감춰져 있고 억압되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용기야.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는 약간의 용기 말이지. 그런 것만 있으면 누구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저렇게 할아버지도 모델을 설 수 있다면, 철학자에게 적절한 노후의 부업은 바로 누드모델이 아닐까. 모름지기 철학자란 은폐된 것을 파헤치고 드러낼 줄 알아야 하니까 말이야.

사람들이 쉽게 벌거벗지 못하는 까닭은 추워서가 아니다. 옷의 질서가 주는 안정을 벗어나는 게 두려워서다. Y도 예외가 아닌 것일까. 그만하면 멋진 몸매인데도 그녀는 노출을 싫어했다. 밝은 곳에서는 좀처럼 맨몸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구보씨가 갑자기 불을 켰을 때 알몸이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 시트를 끌어당겼다.

“아깝다, Y야. 너야 말로 누드모델로 딱인데…”

구보의 농담을 Y가 차가운 시선으로 받는 바람에, 구보씨는 황급히 다시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넌 여전히 남성 위주의 시선으로 날 보는 거야. 난 그게 싫다구.”

“엉? 어차피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잖아.”

“그런 뜻이 아니거든. 대체 그게 철학자가 할 말이야? 니들은 항상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폭로니 탈은폐니 하고 떠든다구. 그러면서 실제로 이용당하고 유린당하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아.”

“아니, 그건 오버센스야. 내 얘긴 때로 불필요하고 억압적인 틀이나 감싸개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거야. 인위적인 것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그런 반성에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말한 여자, 남자는 자연스러움 속에서의 얘기일 뿐이라구.”

구보씨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이런 식의 어설픈 변명이 그대로 통할 리 만무했다. 성(性)의 사회적 성격이니 젠더(gender)니 하는 얘기는 차치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벌거벗음 앞에서 공평치 않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잘못하다간 버티기 어려운 논란에 말려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스스로가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수긍하느니만 못하다.

“자연스러운 남자와 여자는 없어.”

Y는 단호했다. 그렇다. 엄격히 말하면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벌거벗어도 진짜 자연스러움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니 더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만큼 우리는 더 더듬고 더 갈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하는 우리의 눈길과 손길이 그래서 더 절실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도 니들의 속임수고 도피처야. 포착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 그렇지만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 ― 그 따위 말로 너네가 노리는 게 뭔지 생각해 봐. 결국은 눈에 보이는 문제를 덮고 회피하는 거야. 남자들이 여자의 몸이나 성을 노리개로 삼고 지배하는 현실, 그건 눈에 보이는 거잖아. 그런데, 왜 그런 문제를 놔두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니들 철학자들이 자꾸 외면당하는 거라구.”

“하하, Y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 그런 면이 있겠지. 하지만 우리도 나름 진지하다구. 그리고 내가 누드를 얘기하는 건 성(性)의 대상화나 상품화, 그런 것 하곤 상관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네 말대로 히피들이 옷을 벗는 데에는 아마 진정성이 있을 거야. 그런데 누드모델은 좀 아니잖아. 그런 게 우리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겠어? 옷을 벗어던지는 용기라구? 그런 건 차라리 동물보호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누드 시위에서 찾는 게 나을 거야.”

“그럼, 넌 나보구 누드모델의 꿈을 포기하라는 거야?”

“꿈? 그런 게 꿈이라도 돼? 그건 그냥 자족적인 냉소거나 유머야. 네가 그랬잖아, 유머라는 게 현실에 초연한 척해서 위안을 얻는 거라구.”

이크. 구보씨는 이쯤 되면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벌거벗음에 대해 아직 할 말은 많지만, 이럴 때는 굳이 열을 올려가며 대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옷을 벗어젖히는 것만으로는 자연스럽게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라고 구보씨는 여전히 벌거벗은 몸뚱이로 생각해 본다.

문성원(부산대,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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