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뭐 대단한 존재라고! 절망이 오히려 희망이라네! [철학자의 서재]

 

마크 트웨인의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김의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내가 보기에 진화는 엉터리다. 인간은 정말로 한심한 실패작이다.”
-커트 보네거트, <나라 없는 사람>(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19쪽)

아동 작가에서 신랄한 독설가로

10년 전만 해도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의 모험 소설 작가로만 알려져 있었다. 적어도 나에겐. 70년대를 유년 시절로 보낸 또래들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읽은 추억담이 있을 것이다. 소설만 아니라 TV에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도 방영됐다.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아동 모험 소설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사회 비판가, 아니 독설가로 더 유명하다.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 대외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는 유년기의 기억 외에 그에 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실상을 알고 크게 놀랐다. 오히려 사회 비판가로서의 말년 행보가 그를 이해하는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마크 트웨인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작가 커트 보네거트를 통해서였다.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직한 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지치고 뉴스가 너무 끔찍하면 유머는 효력을 잃게 된다.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은 인생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그 끔찍함을 농담과 웃음으로 희석시켰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와 단짝 친구와 두 딸이 죽은 후였다.” (<나라 없는 사람>, 126쪽)

커트 보네거트의 소개에 따르자면, 마크 트웨인은 노년기에 이르러 미국이란 나라와 나아가 인류에게 희망을 잃은 듯하다. 실제로 그의 책 번역본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가 이 책을 쓴 시기는 60세를 바라보는 시기였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그의 부인 올리비아는 책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은 책 출간을 만류했다. 그래서 1904년 부인이 사망할 때까지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1906년 처음 발간되긴 하였으나, 특히 성직자들의 반응이 두려워 250부만 찍어 주변 지인들만 돌려봤다고 한다. 그리고 마크 트웨인 사후 7년이 되어서야(1917년) 정식 출간되었다.” (마크 트웨인,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 할까>(박영선 옮김, 북인 펴냄) 203쪽, 내용 요약)

선행은 자기만족에 불과

그런 마크 트웨인이 보기에 애초에 인간은 기계에 가깝다. 이 기계가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아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이때 외부의 힘은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 그리고 교육도 외부에서 받은 영향의 결과물인데 그 영향의 대부분은 인간관계다(위의 책 90쪽). 즉 기질 차이만 제외하면 인간은 소속된 사회의 교육과 훈련에 의해 그 판단과 행동이 좌우된다. 여기서 인간관계는 사회적 관계로 풀어도 무방할 듯하다. 마르크스가 말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구절이 연상된다.

마크 트웨인(1835~1910)



기질은 타고난 성질인데 이것만은 아무리 교육을 해보아도 없앨 수 없다고 한다.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기질에 압력을 가해 살짝 눌러 놓을 뿐이라는 것(위의 책 103쪽)이다. 프로이트는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서한에서, 인간의 공격 충동을 영구히 없앨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조절하는 노력은 가능한데 그게 바로 (교육을 포함한) ‘문화’다.

 

“인간의 공격적 충동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격적 충동을 전쟁으로 발산할 필요가 없도록 그 충동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입니다.” (…) “문화 발전은 어떤 종의 동물을 길들이는 것과 비교할 수 있고, 신체적 변화를 수반하는 게 분명합니다. (…) 문화 발전에 수반되는 ‘신체적’ 변화는 두드러지고 명백합니다. 그것은 본능이 지향하는 목표를 차츰 다른 데로 돌리고, 본능적 충동을 억제합니다.”

프로이트가 볼 때 본능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방향을 조절할 뿐이다. 마크 트웨인이 볼 때 타고난 성질은 없앨 수 없다. 문화로 관리할 뿐이다. 그래서 양자 공히 인간 형성의 주요 기제로 문화의 역할을 거론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격렬한 논란은 선행이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주장에서 비롯됐다. 무릇 선행이란 누구에게나 지지와 동의를 얻는 보편적 행위, 즉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동등하게 대우하고 요즘 식으로 말하면 ‘힐링’하는 그런 행위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의 의미를 굳이 궁색하게 말하는 건 당시 미국 사회상과 관련 있을 것이다. 앞서 밝혔듯 종교계의 비난이 두려워 초판 간행수를 최소화했다는 게 단서다. 19세기 미국은 청교도 영향 하에 있었으니까, 사고방식과 행동 전반은 종교라는 이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주홍글씨>(1850)가 그렇고,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 <크루서블(The Crucible)>(1998)의 어처구니없는 마녀사냥도 그렇다. 행동강령이 외부에서 주어지면 행동을 규제하는 건 당연지사고 규제의 정도 차가 있을 뿐이니까.

“오로지 타인을 위해 선의를 베풀 것을 요구한다네, 온전히 우선 의무를 위한 의무를 다할 것, 자기희생의 행위를 하라는 식의 요구를 내놓는 거야. (…) 인간의 내부에 깃든 절대 최고의 군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네. 그리고 우리 인간들 모두는 그 앞에 끓어 엎드려서 그 절대군주에게 호소하는 것이지. 그런데 거기가 틀리지. 다른 무리들은 교묘하게 속여서 몸을 바꾸니까.”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 108쪽)

때문에 애써 밖에서 찾지 말고, 나를 진정 기쁘게 하는 행위를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타인이 느끼는 감사함, 고마움은 부차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일단 선행의 이유가 내가 만족하고 즐거워야 한다. 나아가 사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행에서 만족감(일종의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교육을 통해 유도해야 한다.

“스스로를 만족시킴과 동시에, 이웃과 넓게는 사회에도 선을 뿌리는 행위가 있어야 해. 그래서 그런 행위 속에서 우선 최대의 기쁨을 발견해낸다는 경지에 오르도록 뜻을 두어야겠지.” (위의 책, 106쪽)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선행에서 최대의 만족을 얻는 것은 일정 수준의 도야를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느끼는 기쁨이 반드시 선행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도 일상다반사니까.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자기만족의 전제 – 타인의 행복, 상호 존중

그런데 읽으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선행의 원칙은 무엇이어야 할까? 어떤 행위를 해야 나도 만족할 수 있으며, 또한 타인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타적 행위가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 주도적 행위라면 내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면 될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배님의 글에서 그 실마리를 가져왔다. 다소 길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어서 인용한다.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묻는다. ‘한 마디 말로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한다. ‘그것은 서(恕)로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편)

이 가르침은 이미 서(恕)라는 글자 안에 다 들어 있다. 서(恕)는 마음(心)이 같다(如)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는 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라’는 식의 긍정형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형으로 표현했을까? 공자뿐만 아니라 성인(聖人)의 가르침 거의 모두가 부정형이다. 우선 긍정형으로 가르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공자가 만약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했다면, 세상 끝장나게 돌아간다. 알다시피 우리는 그리 도덕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힘이 센 나쁜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이 가진 좋은 것을 빼앗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공자가 거기에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고 하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빼앗게 될 것이다. 착한 사람은 자기 것을 남을 위해 내놓고 싶을 것이다. 마침 착한 사람과 게임을 하게 되면 그만큼 또는 그 이상 돌려받겠지만, 그러나 나쁜 사람을 만나서 자기 것을 내놓으면 그것으로 거래는 끝이 난다.

반면에 부정형으로 하면 사정이 바뀐다. 누구도 자기 것을 남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싶지 않다. 따라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대로 남을 대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 착한 사람도 부정형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나쁜 사람이 더러운 게임을 하고 싶더라도, 이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이 그런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기에 나쁜 짓을 그만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부정형은 무엇보다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남이 나에게 해를 끼쳤을지라도, 내가 보복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보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줘라’는 말의 숨은 뜻이다.”
(김범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철학박사), ‘철학 강의(15) 사람의 도움원리’ 중에서 인용, ☞바로 가기 다음(DAUM) 카페 ‘fridaybeer’)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 인류사에 등장한 모든 참혹한 반인륜 사건, 인권침해의 공통점은 이 가르침과 상반된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의 강요에 의해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친위대장교는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강제로 타인의 강압에 의해 성행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광주 인화학교 직원은 장애인 학생을 성추행한다.

결국 자기만족은 타인에게 억압이나 폭력이 아니어야 하며 타인의 행복이 전제될 때 비롯한다. 그리고 타인의 행복은 내 즐거움을 원해서 나 스스로가 선택한 행동이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자기 주도적인 선행은 타인의 행복을 동반할 수 있다. 결국 이 원칙은 상호 존중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인권침해 예방의 원리로서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착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책 전반에서 마크 트웨인은 인간이 변변치 못한 존재임을 누차 강조한다. 허나 책을 읽고 나서는 그 일관된 냉정한 태도야말로 인간에게서 희망의 근거를 찾기 위한 역설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정녕 인간에게 환멸을 느꼈다면 그런 주제에 관한 책을 쓸 의욕조차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마크 트웨인처럼 인간의 가능성에 붙어 있는 화려한 수사와 막연한 믿음을 제거해야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 섣부른 희망은 결국 착각인데 이 착각이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조급한 희망의 결과는 상반된 현실이다. 그런데 이 현실은 직면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결과적으로는 절망의 과잉 상태에 빠진다.

지난 대선에서 나는 정권의 변화를 염원했다. 하지만 야당이 실력 없고 긴장감 없고, ‘허당’이라는 인식은 이미 지난 총선과정에서 확인됐고, 그 불안의 전조는 민선 5기 지방선거의 승리를 해석하는 당시 야당지도부의 태도에서 조짐이 보였다(기존 여당이 싫어서 반대급부로 찍어준 것뿐인데 자기들이 잘해서 이긴 거라고 자화자찬 하다니!). 하지만 이 정권 하에서 사는 게 하도 고통이라 이번만큼은 무조건 야당 단일 후보에 ‘올 인’했다. 그 후 회자되는 단어는 ‘멘붕’이다. 대선 이후 한 달 넘게 미디어의 정치면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나는 뉴스를 다시 보는데 2주일 걸렸다).

어떻게 보면 멘붕은 좀 더 냉정하지 못한 나 스스로가 선택한 착각의 결과일 것이다. 미래가 불투명해서 조급히 선택하는 미완성의 희망은 후폭풍이 거세다. 그럴 바에야, 냉정을 유지하는 것, 그 버티는 힘이 오히려 희망의 싹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버팀의 시작은 나와 타자가 동시에 행복해지도록, 거기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도록 훈련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 프로그램으로 제안해야 한다. 상호존중과 연대 그리고 냉정! 마크 트웨인의 독설에서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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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문성원, 알렙 간행) 두 번째 포스팅...... 이번엔 구보 씨가 뱀파이어를 생각합니다. 이 글은 e 시대와 철학에 한 코너로 연재되었던 것으로, 책으로 엮을 때 개고되었습니다. http://bit.ly/1aI9IhS

 

 

구보씨 뱀파이어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

이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2009)에 나오는 대사다. 뱀파이어가 된 태주(김옥빈 분)가 자신을 책망하는 상현(송강호 분)에게 내뱉는 말이다. 상현도 뱀파이어다. 그는 가톨릭 신부였는데, 수혈을 받고 뜻하지 않게 뱀파이어가 되었다.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지만,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식물인간이 된 환자의 피나 자살하는 사람의 피를 받아먹는다.

반면, 태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당당하다. 그녀는 신선한 피를 위해 거리낌 없이 인간을 죽인다. 그녀는 뱀파이어고, 뱀파이어는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녀가 인간을 죽이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태주는 상현의 어정쩡한 태도를 비웃는다.

“너는 남의 피로 연명하면서 네 피 한 방울 나눠주는 건 그렇게 아깝냐?”

이것도 <박쥐>에 나오는 대사다. 눈 먼 노(老)신부(박인환 분)가 자길 뱀파이어로 만들어주길 거부하는 상현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뱀파이어가 되어서라도 다시 이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그렇게도 보고 싶으세요? 이 캄캄한 세상이?” 상현은 그러한 욕망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피를 탐하는 노신부를 찔러 죽인다. “가서 쉬세요.” 그러면서 상현은 그가 죽인 노신부의 심장에서 솟아나는 피를 빨아먹는다.

상현은 스스로의 욕망을 쉽게 저버리지 못하면서도 그런 욕망의 탐닉을 막으려 든다. 그는 뱀파이어지만, 윤리적이고자 하는 뱀파이어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정녕 윤리적일 수 있는가? 상현의 말과 행동이 블랙 코미디가 되는 바탕은 여기에 있다. 그는 비닐 팩에 피를 담아 냉장고에 두고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조금 빨아먹다 버리는 건 일종의 인명경시가 아닐까?”

그런데 이런 블랙 코미디의 무대는 영화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는 건 틀림없는 과장이겠지만,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게다가 돈은 뱀파이어와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물질적 지배와 안락만이 아니라 깨끗한 피부와 성형의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 돈의 위력을 가진 이들은 이제 인간 세상의 한 부류로 자리 잡는다. <트와일라이트> 시리즈의 뱀파이어가 어둠과 경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인간 사회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닭을 잡아먹는 여우가 동네에 내려와 닭들과 동거하며 닭들을 관리하기에 이른 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닭이 아닌 여우가 되고자 한다. 기왕이면 멋지고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한다. “뱀파이어면 어때?” 사람들은 피를 탐하는 <박쥐>의 노신부처럼 되뇐다.
영화 ‘박쥐’의 한 장면구보씨가 DVD로 영화를 여기저기 돌려보아 가며 여기까지 얼기설기 썼을 때다. 어느 틈엔가 옆에 와 있던 Y가 끼어든다.

“구보야, 너는 어떻게 영화를 봐도 그렇게 기괴한 영화만 보니? 그 박쥔지 생쥔지 하는 영화는 벌써 몇 번째 틀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참 취미도 괴상하다, 너.”

“어, 미안. 시끄럽다면 헤드폰 끼고 볼께. 난 곧 이 영화로 강의도 하고 글도 써야 하거든. 이제 겨우 한 페이지 썼어. 강의 노트는 아직 시작도 못했고… 근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영화 진짜 볼 만한 영화야. 박찬욱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다구.”

“글쎄, 난 박찬욱 좋은지 모르겠더라. 그 사람 영환 어딘지 좀 구겨진 것 같애.”

“하하…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근데, 어딘가 구겨진 마음이 없다면 영화건 문학이건 불가능하지 않겠어? 구겨진 주름에 세상이 이렇게 또 저렇게 담기고, 그걸 풀어내는 데서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치, 그럼, 주름 많은 사람은 다 예술가겠네? 박찬욱은 그것도 아니고 이제 쉰이 다 된 얼굴이 뺀질 통통하던데?”

“유심히도 봤다. Y, 너 은근히 박찬욱 좋아하는 건 아냐?”

“아니라니까. 난 잔인하고 기괴한 장면들 싫어해. 그런 걸 왜 우리가 영화에서도 봐야 하니?”

“외면한다고 그런 면이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그런 걸 극적으로 제시해서 우릴 자극하고 정화(淨化)하는 게 필요한지도 몰라. 거기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것이고 말이야.”

“기껏 뱀파이어가 그런 거야? 덜떨어진 서양 귀신이 피 빨아먹는 게?”

“Y야, 그게 꼭 그렇진 않다구.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어.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런 걸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잖아. 게다가 원래 뱀파이어는 경계적 존재였어. 이런 존재에게는 정상적 존재에게선 찾기 힘든 갈등과 문제가 있다구. 생각해 봐. 뱀파이어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라구 할 순 없어. 그렇다구 신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네 말대로 귀신인 것도 아냐. 분명히 몸뚱이를 가진 생명체라구. 그러나 짐승이라고 할 수도 없어. 말하자면 일종의 괴물인 거지. 경계적 괴물. 그래서 이걸 어디에서부터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흥미로운 얘기들이 나올 수 있는 거야. 박쥐라는 동물도 원래 경계적 존재잖아. 그런 점에서 이 영환 우리말 제목이 영어 제목보다 나아.”

“영어 제목은 뭔데?”

“Thirst. 갈증… 너무 평면적이지. 하긴 뭐, 저주스런 갈증, 그런 정도의 뜻이고 이미지겠지만.”

“저주스런 갈증? 거기 저주는 왜 붙어?”

“Y야, 이거 뱀파이어 영화라구. 뱀파이어는 피를 마셔야 살잖아. Y 네가 뱀파이어가 됐다고 생각해 봐. 피를 빨아먹는 게 기꺼운 일이겠어? 근데 이걸 욕망 일반으로 해석할 수 있거든. 욕망이라는 게 대부분 희소성이 있는 대상을 향하는 거고, 그래서 누군가를 밀쳐내야 충족될 수 있으니까. 때론 억압하고 착취하고 해서 말이지. 그거 일종의 피 빨아 먹는 거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고 또 만일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면 저주스런 거지. 저주스런 욕망, 저주스런 갈증.”

“구보야, 그건 정말 난센스고 오버센스야. 네 말은 우리 모두가 일종의 뱀파이어란 말이잖아. 그게 말이 돼?”

“내 참, Y야, 그건 내가 좀 전에도 했던 말이야. 넌 대체 내 말을 듣고 있기나 한 거니? 내가 그랬잖아, 뱀파이어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봐. 우리가 다른 생물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꼭 사슴피를 받아먹고 곰의 쓸개즙을 빼내먹는 인간들만 뱀파이어가 아니라구.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해 먹어치우는 방식은 정말 잔인한 거야. 뱀파이어가 차라리 고상할 정도지. 입가에 피 안 묻히고 점잖은 척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한다고 해서 잔인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당하는 동물 입장에서는 더 기가 막힐 노릇 아닐까. 사람들이 사는 부근엔 사육당하는 동물 이외엔 대형 동물들이 남아나질 않아. 특히 육식 동물들은 거의 멸종이야. 경쟁자가 없는 뱀파이어가 인간인 거지. 그뿐만 아니라구. 인간은 인간도 사육하고 착취하잖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말이지. 서로가 서로 피를 빨아먹는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잖아? 아닌 게 아니라, 이 박쥐라는 영화에는 서로 피를 빨아먹는 장면이 있어. 상현이 제 피를 태주에게 먹이면서 태주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 말이야. 실은, 박찬욱이 이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 머리 속에 그려뒀던 장면이 바로 그거라는 거야. 그걸 중심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거지. 재밌잖아?”

“재밌다구? 구보야, 넌 정말 이상해. 잔인하다고 하더니 재밌다는 건 또 뭐니? 잔인한 게 재밌다는 거잖아. 도대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소리야? 박찬욱이나 너나 괜한 과장을 해서 잔인한 면을 만들어내고는 그걸 재밌다고 즐기는 거 아냐? 그건 가학 취미라구. 니들이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거구,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여기는 거야. 니들이야말로 뱀파이어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도 뒤집어씌우는 거 아니겠어? 안 그런 척 하는 너희들도 다 뱀파이어다, 이렇게 세상에 대구 외치는 거잖아. 그거 꼬리 잘린 여우 심정인 거야.”

“아니, Y야, 난 가학적인 걸 즐기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욕망의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거야. 박찬욱은 그런 걸 영화로 표현해 보는 거고… 박쥐의 상현을 봐.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구. 어쩔 수 없이 욕망의 수렁에 말려들어가면서도 거기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지. 그가 악을 행하는 건 다른 악을 막기 위해서야. 가령 뱀파이어가 되려는 신부를 죽인다든가, 태주를 학대한다고 생각하고 강우를 죽인다든가 하는 일이 그래. 그리고 그런 게 더 큰 악을, 파국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자 태주와 함께 목숨을 버리는 쪽을 택하지. 물론 내 얘긴 그런 결말이 좋다거나 필연적이라는 건 아냐. 중요한 건 그렇게 벗어나려는 자세와 시도가 있다는 거지. 그게 일종의 희망 아닐까. 저주받은 갈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 같은 거…”

“구보야, 내가 보기엔 욕망을 적대시하는 네 생각이 애초부터 잘못된 거야. 구원은 무슨 구원이니? 그건 병주고 약주는 것일 뿐야. 옛날부터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작자들이 해 온 짓이라구. 욕망이 있으면 잘 충족시킬 길을 찾아야지, 억지로 억누르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 그게 없어지니? 사실은 그렇게 해놓고 뒷구멍으로 지들만 즐기는 놈들이 따로 있잖아. 구보, 너 같이 정신 못 차리는 철학자나 괜히 구원이니 뭐니 하며 헛물켜는 종교인들이 거기 들러리를 서고 말이야. 그러니까 결국 사람이 구겨지는 거야. 박찬욱도 철학과 출신이지? 그것도 가톨릭 계통 학교를 다녔잖아. 그래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것 아닐까?”

“어, Y야, 그거 인신공격이야. 그리고 근거 없는 얘기라구. 박찬욱이 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철학과를 나와서 영화에 조금이라도 더 깊이가 있는 걸 거야. 박찬욱 영화는 생각보다 치밀하고 섬세하다구. 예를 들어 여기 이 장면도 봐. 장면 배치나 소도구 하나까지도 예사롭지 않아. 동양과 서양, 근대와 현대 따위를 섞어놓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구.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까지 경계적인 면을 찾아 표현하려 한 거야. 한 오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어. 자, 이걸 좀 볼래…”

“됐거든. 구보야, 나 바쁘거든. 그리고 그 영화엔 볼만한 남자 배우 하나 없이 다 구보 너처럼 칙칙한 애들만 나와서 관심 없거든. 그러니 너나 열심히 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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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문성원, 알렙 간행) 첫 번째____구보 씨, 누드모델을 꿈꾸다

이 글은 e시대와 철학에 한 코너로 연재되었던 것을, 단행본에 수록하였던 것입니다.
문성원 교수님(부산대 철학과)은 수년 전부터 본인의 닉네임을 '구보씨'라 하여, 글을 써오고 있죠. 자칫 어려워지는 철학의 형식을 부드럽게 해보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마침 연재 지면에서 콘텐츠가 아주 사라지기 전에, 글을 읽을 수 있답니다. ...
이 글을 읽고 나서 좋으시면, '댓글'과 "퍼담기", 꼭 해주세요.^^

이참에 80년 만에 부활한 한국문학사의 가장 독특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 중 하나인 "구보 씨"를 철학자로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원래 지면에서 읽고 싶으면, 아래 주소를 누르세요.

http://ephilosophy.kr/han/?p=203

구보씨 누드모델을 꿈꾸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제 목
구보씨 누드모델을 꿈꾸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더운 날씨다. 무덥고 갑갑하다. 훌훌 벗어던지고 싶은 때다. 구보씨가 딱히 여름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벗는 건 좋아한다. 아니, 그보다는 걸치고 입는 것을 그닥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렇다 보니, 이런 날씨에 집에 있을 때면 거의 벌거벗고 있을 때가 많다.

원래 인간은 열대 동물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퍼져가기 시작한 것은 대략 4, 5만 년 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정도 기간은 생물학적 변이가 일어나기에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오늘날도 지구상에서 인간이 옷가지나 보온 장치 없이 살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넓지 않다.

그러니까, 온대(溫帶)인 우리네 환경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맞는 계절은 여름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생물학적 본성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 여름인 셈이다. 자연스러움으로 잘 지낼 수 있는데 거기에 굳이 인위(人爲)를 덧붙일 필요는 없어, 라고 구보씨는 벗은 몸으로 생각해 본다.

인위는 과잉(過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특정한 목적에만 딱 들어맞는 것은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잉은 대부분 예기치 않은 문제들을 야기한다. 물론 인간의 문화는 그런 과잉의 자극으로 말미암아 발전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옷은 열대의 ‘털 없는 원숭이’ 출신인 인간이 그 활동 범위를 한대(寒帶) 지역으로까지 넓혀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막상 더운 계절에는 거추장스러워지는 것이 옷이다.

어찌 옷뿐이겠는가.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장치와 제도들이 그렇다. 거추장스러워지기만 하면 다행이다. 쉽게 억압적이 되어버린다. 인위의 질서가 자연스러움을 덮고 순응을 강요한다. 그렇게 하여 인위의 본성이 마련된다. 이제 자연은 낯선 것이 되고 만다. 아마존의 조에 족을 생각해 보라. TV 화면에 비친 그들의 벌거벗은 자연스러움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인위의 문명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신체 부위를 가리는 모자이크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옷에 배어있는 인위의 질서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복식(服飾)에서다. 하지만 복식은 사극(史劇)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보씨는 옷차림새 때문에 대우가 달라지는 일을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요즘도 옷이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옷에 대한 태도는 사회 질서에 대한 태도를 함축한다. 히피들이 괜히 옷을 찢고 벗어던졌겠는가. 그들의 벗은 몸은 인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표시다.

그런데 이 인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것은 쉽게 찢어지지도 벗겨지지도 않으며, 도리어 벗은 몸에 파고든다. 오늘의 실태를 보라. 몸짱 열풍을 거쳐 신체 부위 하나하나를 지배하는 촘촘한 시선. 꿀벅지니 빨래판 복근이니 하는 따위의 웃지 못 할 규정들이 판을 친다. 은희경의 표현대로, 인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고 주눅 들게 하며, 알몸까지 스며든 징글맞은 소비의 질서에 매달리고 아부하게 한다. 오늘날 전시된 벗은 몸은 또 하나의 값비싼 옷이다.

이런 세상에서 구보씨는 누드모델을 꿈꾼다. 물론 구보씨가 몸짱일 리는 없다. 빨래판 복근? 그의 배는 전통의 중년남자가 지닌 봉긋한 여유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 구보씨가 엉뚱한 꿈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본 영화 한 편 때문이었다.

「캐쉬백」이라는 제목의 영국 영화였다. 주인공 청년이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그 실연의 상처 가운데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되는 과정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졌던 것 같다. 세상이 정지된 속에서 자신만 움직일 수 있다고 상상하는 장면들이 재미있었다. 멈춰진 시간, 그 속에서 홀로 누리는 자유로움 ― 이것이 힘든 상황을 잠시나마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프로이트가 말하듯, 유머는 현실에 대한 이런 종류의 거리두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상상의 특권적 거리가 당장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비틀어보게 하고 그 틈에서 숨 쉴 수 있게 한다.

정작 구보씨에게 필이 꽂힌 것은 영화의 전개에 핵심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한 장면에서였다. 주인공 청년은 슈퍼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난한 미술학도였는데, 실연을 당하고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처지에서 미술실기 수업에 들어왔다. 누드 데생 실습 시간이다. 당연히 누드모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누드모델이 머리가 백발인 할아버지였다. 몸매는 물론 몸짱과 거리가 한참 멀다. 그래도 당당하고 거리낌이 없다. 모델을 서면서 ‘뿌우윙’하고 방귀까지 뀐다.

“익스큐즈 미.”

영화 ‘캐쉬백’의 한 장면.

구보씨는 ‘익스큐즈 미’라는 표현이 그토록 적절하고도 미묘한 톤으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색함과 미안함, 뭐 그래도 생리현상인데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약간의 뻔뻔함까지 적절하게 담겨 있다. ‘뿌윙’. 그 시퀀스가 끝나기 전에 할아버지 모델은 다시 방귀 한 방을 날린다.

“익스큐즈 미.”

그래, 바로 저거야, 하고 구보씨는 생각했다. 누드모델이라고 꼭 잘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 오히려 필요한 것은 감춰져 있고 억압되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용기야.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는 약간의 용기 말이지. 그런 것만 있으면 누구나 모델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저렇게 할아버지도 모델을 설 수 있다면, 철학자에게 적절한 노후의 부업은 바로 누드모델이 아닐까. 모름지기 철학자란 은폐된 것을 파헤치고 드러낼 줄 알아야 하니까 말이야.

사람들이 쉽게 벌거벗지 못하는 까닭은 추워서가 아니다. 옷의 질서가 주는 안정을 벗어나는 게 두려워서다. Y도 예외가 아닌 것일까. 그만하면 멋진 몸매인데도 그녀는 노출을 싫어했다. 밝은 곳에서는 좀처럼 맨몸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구보씨가 갑자기 불을 켰을 때 알몸이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 시트를 끌어당겼다.

“아깝다, Y야. 너야 말로 누드모델로 딱인데…”

구보의 농담을 Y가 차가운 시선으로 받는 바람에, 구보씨는 황급히 다시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넌 여전히 남성 위주의 시선으로 날 보는 거야. 난 그게 싫다구.”

“엉? 어차피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잖아.”

“그런 뜻이 아니거든. 대체 그게 철학자가 할 말이야? 니들은 항상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폭로니 탈은폐니 하고 떠든다구. 그러면서 실제로 이용당하고 유린당하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않아.”

“아니, 그건 오버센스야. 내 얘긴 때로 불필요하고 억압적인 틀이나 감싸개를 벗어던지고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거야. 인위적인 것에 대해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그런 반성에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가 말한 여자, 남자는 자연스러움 속에서의 얘기일 뿐이라구.”

구보씨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다. 이런 식의 어설픈 변명이 그대로 통할 리 만무했다. 성(性)의 사회적 성격이니 젠더(gender)니 하는 얘기는 차치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벌거벗음 앞에서 공평치 않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잘못하다간 버티기 어려운 논란에 말려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스스로가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수긍하느니만 못하다.

“자연스러운 남자와 여자는 없어.”

Y는 단호했다. 그렇다. 엄격히 말하면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벌거벗어도 진짜 자연스러움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니 더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만큼 우리는 더 더듬고 더 갈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하는 우리의 눈길과 손길이 그래서 더 절실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도 니들의 속임수고 도피처야. 포착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 그렇지만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 ― 그 따위 말로 너네가 노리는 게 뭔지 생각해 봐. 결국은 눈에 보이는 문제를 덮고 회피하는 거야. 남자들이 여자의 몸이나 성을 노리개로 삼고 지배하는 현실, 그건 눈에 보이는 거잖아. 그런데, 왜 그런 문제를 놔두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니들 철학자들이 자꾸 외면당하는 거라구.”

“하하, Y야. 그렇게 흥분하지 마. 그런 면이 있겠지. 하지만 우리도 나름 진지하다구. 그리고 내가 누드를 얘기하는 건 성(性)의 대상화나 상품화, 그런 것 하곤 상관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르겠어. 네 말대로 히피들이 옷을 벗는 데에는 아마 진정성이 있을 거야. 그런데 누드모델은 좀 아니잖아. 그런 게 우리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겠어? 옷을 벗어던지는 용기라구? 그런 건 차라리 동물보호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누드 시위에서 찾는 게 나을 거야.”

“그럼, 넌 나보구 누드모델의 꿈을 포기하라는 거야?”

“꿈? 그런 게 꿈이라도 돼? 그건 그냥 자족적인 냉소거나 유머야. 네가 그랬잖아, 유머라는 게 현실에 초연한 척해서 위안을 얻는 거라구.”

이크. 구보씨는 이쯤 되면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벌거벗음에 대해 아직 할 말은 많지만, 이럴 때는 굳이 열을 올려가며 대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옷을 벗어젖히는 것만으로는 자연스럽게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라고 구보씨는 여전히 벌거벗은 몸뚱이로 생각해 본다.

문성원(부산대,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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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문성원 지음|256쪽|13,000원
2013년 10월 10일|ISBN 978-89-97779-29-1 03100

분야 : 인문/철학/철학 에세이

 

 

 

 


 
- 누드모델을 꿈꾸는 철학자 구보 씨의 철학 강좌!
-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개성 있는 인물, 구보 씨가 재치 있는 입담가로 다시 등장하다.
- 철학의 현황을 드러내고 진짜 ‘철학’에 남은 문제를 이야기하다.

 

 

 

 

책 소개
한국 문학사의 가장 개성 있는 인물,
구보 씨가 지금 여기에 서서 세상을 본다면?

 

 

∥ 1934년 박태원이「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발표하였다. 1960년대 말부터 최인훈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연작을 발표하여 구보 씨를 다시 불러냈다. 주인석은 ‘소설가 구보 씨의 하루’라는 부제로 『검은 상처의 블루스』라는 연작소설집을 냈다. 2002년에는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앨런 테인 더닝&존 라이언, 그물코)라는 환경 책이 나왔다.
∥ 그리고 2013년에 구보 씨는 철학자로 다시 등장하였다.


20세기 소설가 구보 씨가 근대 조선의 지식인상을 보여주었다면, 21세기에 다시 철학자로 태어난 구보 씨는 ‘지금, 여기’ 이 세상을 어떻게 볼까?
구보 씨가 재치 있는 입담과 유쾌한 생각을 가진 ‘철학자’로 돌아왔다. 문학과 철학, 현실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철학자 구보 씨는 경쾌한 사유의 향연을 펼친다. 이 책에서 문성원 교수(부산대 철학과)는 철학의 현황과 지평을 보여주기 위해, 구보 씨라는 캐릭터를 철학자로 되살려냈다. 저자는 구보 씨를 통해 벌거벗음의 사유를 선보인다. 그것은, 오늘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너머를 지시하고자 하는 사유의 몸짓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벌거벗음, 뱀파이어, 크기와 소통, 동물과 인간 등 현대 철학의 독특한 영역을 거침없이 횡단하며, 유쾌한 생각의 담화들을 펼쳐보인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개성 있는 인물이었던 ‘구보 씨’를 다시 등장시켰다. 구보 씨는 처음 한국 근대문학의 기수인 박태원에 의해 등장했을 때부터, 소시민이자 지식인의 표상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최인훈의 ‘구보’도, 1990년대 주인석의 ‘구보’도, 시대를 걱정하는 반성적인 지식인이었다. ‘구보 씨’만큼 사색적이고 철학적이었던 사람도 찾기 힘들다고 저자는 말한다. 철학자 ‘구보 씨’는 저자의 생각을 대변하면서도 현실 공간이 아닌 가상현실을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체험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철학의 대작들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철학을 논의하는 경우가 많다. 문성원 교수도 어려운 내용을 딱딱하게 하지 않고, 쉬운 이야기를 경쾌하게 하기 위한 방식으로 ‘구보 씨’를 철학자로 등장시켜 그의 연인인 Y와의 담화를 통해, 세상의 온갖 실재적인 것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다.

문성원 교수는 전작 <해체와 윤리> <배제의 배제와 환대> 등에서 해체의 철학과 윤리의 철학을 접목하는 등 현실 철학의 새로운 조망을 시도한 바 있다. 논증적 글쓰기와 학문적 엄정함으로 철학의 첨예한 핵심 부분만을 연구해 오던 문성원 교수는 이 책에서 논증 대신 진실한 말하기(발본적 파르헤지아) 방식을 택한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 원래 철학은 어려운 학문이다. 아직 분명한 해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궁리하는 게 철학이므로, 어렵고 골치 아플지 모른다. 오늘날 철학자는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며, 개념적 사고를 오래된 직업병처럼 갖고 있다. 철학자 구보 씨의 강의에 대한 평가에도 위와 같은 평이 달렸었다. 문성원 교수가 철학자 구보 씨를 세상 속으로 끄집어내고, 발가벗겨 보고, 진실한 말하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는 이유는, 이제 “쉬운 얘기를 쉽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처지 내지 철학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고투(苦鬪)인 것이다.

 

 

철학의 남은 문제는 무엇일까? 존재 아닌 윤리!

 

문성원 교수는 “철학에서 제1의 과제는 존재가 아니고 윤리”라고 말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지적과 같이 철학에 남은 과제를 가치(규범)의 영역이라고 본다. 과거에는 중요하게 여겨졌던 철학적 문제들 가운데는 이미 해결되었거나 탐구 영역이 다른 분야로 넘겨진 것들도 많다. 이를테면, 우주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은 천체 물리학이나 미립자 물리학이 다룬다. 인식론적 문제들은 심리학과 생리학의 소관이 되었다. 인간 사유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조차 오늘날은 진화심리학이나 뇌생리학 등에서 다루어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결국 철학에 남은 것은 이제 사실의 문제들이 아니라, 가치의 문제, 규범의 문제들이라고 할 만하다. 사고의 규범을 다루는 논리학, 행위의 규범을 다루는 윤리학이 아직 철학의 고유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은 오히려 철학의 본래 영역에 가깝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행적을 보여주었다. 그저 사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중요함을 역설한 책이 <대화편>이다. 문성원 교수 역시 철학자 구보 씨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철학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현실에서 철학에 남아 있는 문제가 바로 가치의 영역, 규범의 영역이라 보기 때문이다.
“가치의 문제는 의미의 문제와 엮여 철학을 겨냥한다. 모름지기 철학자란 여전히 삶의 의미나 세상의 존재 의미 같은 거창한 문제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철학은 예술이나 종교와 같은 전선에 선다. 물론 예술이나 종교의 무기가 감성이나 신앙인 것과는 달리, 철학의 무기는 사유다.”(253쪽)
결국, 철학자 구보 씨는 철학의 제1의 문제인 가치의 영역과 의미의 영역을 탐색하고자 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세상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 영역이다. 문성원 교수는 이런 주제들을 탐색하기 위해, 현대 철학에서 논의되었던, 생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영역들을 탐색한다. 바로 사유라는 철학의 무기를 가지고 말이다.

문성원 교수는 철학자 구보 씨를 여러 가지 알레고리로 표상하였다. 무엇보다, ‘벌거벗은 누드모델’이 표상하는 바를 보자. 구보 씨는 무엇보다도 ‘누드모델이’ 되기를 꿈꾼다(문성원 교수는 구보 씨의 생각을 빌려 철학자에게 적절한 노후의 부업은 누드모델이 아닐까 하고 쓰고 있다). 이때, 벌거벗음(노출)은 진실한 말하기(발본적 파르헤지아, 푸코의 용어)로 이어지며, 또 벌거벗음은 초월, 즉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철학자 구보 씨가 누드모델을 꿈꾸는 이유는, 진실한 말하기 혹은 초월(새로움의 추구)의 의미가 담긴 것이다.
또, 구보 씨는 뱀파이어가 되기도 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를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것을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다.
주로 존재와 진리, 의미와 주체 등을 논하는 대신, 이 책에서 철학자 구보 씨는 누드모델, 뱀파이어, 크기, 동물 등 낯선 영역들을 탐색한다. 그렇지만, 조르조 아감벤이나 질 들뢰즈의 논의에서 진행된 이러한 주제들이 생소하지만 사소한 것은 아니다. 아감벤식으로 보면 벌거벗음의 사유, 들뢰즈식으로 보면 뱀파이어의 사유, 스티븐 제이 굴드식으로 보면 크기의 사유이다. 또, 동물과 인간성, 식육과 채식에 대한 사유도 빼놓을 수 없다.
문성원 교수는 유쾌한 상상력으로 철학자 구보 씨의 벌거벗은 사유를 펼쳐 보여, 세상에 철학의 쓴 소리를 내뱉고자 한다.

 

 

벌거벗음의 사유, 유쾌한 상상력으로
‘돈의 맛’ 아는 세상에 철학의 쓴 소리를 내뱉다!

 

구보 씨, 벌거벗다!
구보 씨가 탐색하는 첫 번째 영역은 벌거벗음이다. 구보 씨가 생뚱맞게 누드모델이 되겠다고 꿈꾸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옷을 입는 것은 인위이고 과잉이다. 히피들의 벗은 몸은 인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표시다. 그런데 이 인위는 만만하지 않다. “오늘날 벗은 몸은 또 하나의 값비싼 옷”이라고 구보 씨는 본다. “은희경의 표현대로, 인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고 주눅 들게 하며, 알몸까지 스며든 징글맞은 소비의 질서에 매달리고 아부하게 한다.” 이런 세상에서 구보 씨는 누드모델을 꿈꾼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영화감독)는 “수치심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돌아보라는 얘기다. 그래서 수치란 인간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라고 본다. 구보 씨는 디나 알 카심(주디스 버틀러의 제자)이라는 여성 학자와의 가상(꿈) 대화를 통해, 노출(벌거벗음)을 발본적(radical) 파르헤지아(진실한 말하기)라는 미셸 푸코가 말년에 자주 썼던 용어로 풀이하고 있다. 이것을 ‘노출’과 연관 지으면, 스스로를 과감히 드러내는 것, 자신의 박탈당한 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형성하는 능동적 계기가 될 수 있다. “적나라한 노출은 자기 성찰의 조건이 될 것”이고 “생각으로만 하는 성찰이 아닌 삶으로 꾸려지는 성찰”이 될 것이다. 이후의 구보 씨와 디나 알 카심의 담화를 통해, 노출은 말하기와, 파르헤지아와 관련이 있음을 지적한다.

구보 씨는, 벌거벗음을 초월과 연관짓는다. 옷을 입는 것은 현재의 차원을 지키는 것이고, 벌거벗음은 현존의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다. 현재의 테두리로 관장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면 그게 초월이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 벌거벗음은 그것을 준비한다. 만일 새로움과의 관계가 고갈된다면 그것은 생명이 다함을, 즉 죽음을 뜻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새로움의 추구를 지속해야 한다. 구보 씨가 누드모델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이런 면에 대한 고려가 있었던 것이다.

 

구보 씨, 소통하다!
구보 씨는 소통을 생각한다. 소통 부재의 사회가 돼버린 작금의 현실 때문이다. 정치나 정권의 차원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소통이 어렵다. 진정성의 기반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인간성이라는 막연한 것이었을까?
구보 씨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비판한 존 그레이(『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의 논의에서 시작해 본다. 자연은 인간을 지푸라기 개(추구, 芻狗)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겸손함을 깨우치라는 얘기다. 자연과의 소통은 자연을 매개로 한 인간의 소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여기서 구보 씨는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라는 맑스식의 발상이 갖는 한계를 지적한다. 윤구병 선생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명제는 ‘만드는 문명’의 소산이다. 아직도 세상에는 ‘만드는 문명’이 한창이지만, 그 한계에 대한 지적은 이미 진부해졌다. 현대 철학의 주요 흐름이 이 만드는 문명의 자기 폐쇄성을 공격해 온 지도 오래다. ‘만드는 문명’은 ‘기르는 문명’을 압도하고 잡아먹었다. 농작물도 가축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통은 이 생산과정에 종속되어, 그 수단의 일부로 취급받는다. 소통은 그저 만들기의 효율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현대 철학은 이런 생산의 모델이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모든 폐쇄적 체계는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애를 써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환경 문제(원전 등)를 단순히 관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잘못일 것이다. 결국 철학의 문제고, 현실적으로는 원전과 같은 생산물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결국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의존해 산다. 자연과 우리 문명의 비대칭성을, 자연의 우위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이고, 우리의 태도를 가다듬는 소통방식이라고 구보 씨는 덧붙인다.

 

구보 씨, 뱀파이어가 되다!
구보 씨의 세 번째 탐구 영역은 뱀파이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는 건 물론 과장이겠지만,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돈은 뱀파이어와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한다. 돈은 깨끗한 피부와 성형의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것을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다.
저자는 뱀파이어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대비시키기 위해, 이와 관련된 문학, 예술 작품들을 동원한다. 예를 들면, 들뢰즈의 『카프카』에서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 그리고 영화 「박쥐」나 「렛미인」 , 그리고 <나꼼수>를 들어, 뱀파이어의 여러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유비시킨다.

구보 씨는 먼저 ‘흡혈’의 개념을 연결시킨다. 질 들뢰즈는 뱀파이어를 철학적 논의에 끼워 넣은 보기 드문 철학자이다. 들뢰즈는 펠릭스 가타리와 같이 쓴 『카프카』라는 책에서, ‘흡혈’의 개념을 들었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는 카프카와 들뢰즈와 K를 거치는 인연을 통해 구보 씨에게 이른 셈이다.
“펠리체와의 관계에서 카프카가 두려워한 건 무엇보다 결혼이었을 거야. 그리고 어쩌면 육욕의 관계고.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천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어. 그러나 정작 만난 건 몇 번뿐이라구. 그리고 두 번이나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하거든. 나는 들뢰즈가 카프카의 편지를 흡혈과 관련지은 건 탁월하다고 생각해. 육식 동물에 대한 채식주의자의 흡혈. 이건 세상에 대한 카프카의 관계를 잘 형상화하고 있거든. 카프카는 세상의 살을 뜯어 삼킬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러기에는 이 현실이 너무 탐욕적이고 맹목적이며 공포스러웠던 거지. 그래서 그는 항상 출구를 꿈꾸면서 외설적 세상의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흡혈을 하는 방식을 택했던 셈이지. 너 혹시 우리가 어렸을 때 추송웅이 공연했던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을 기억해? 최근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 나온 추상미가 그 딸이라구. 뭐, 몰라? 하여튼 너는 디테일에 문제가 있어. 어쨌든 그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이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잖아. 거기서 카프카는 원숭이의 입을 빌려 말하지. 그 대산 알지? ‘저는 자유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출구를 찾았을 뿐입니다.’ 카프카가 흡혈의 에너지로 연명하려 한 건 자기의 존재를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면 탈주하기 위해서라구.”(113쪽)

또, 뱀파이어는 경계 외적 존재이다. 하지만 체제 내적 관점에서 보아서 그렇다. 세상이 선이라면, 뱀파이어 같은 괴물은 악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 일종의 체제 내 수법과 같다. 말이 막히면 말 많다고 내친다. 또 말 많은 놈은 빨갱이라고 하는 식이다. 예컨대 <나꼼수>의 경우, 일종의 내화(內化)한 뱀파이어의 모습일지 모른다. ‘쫄지 마’라는 구호는 내화한 뱀파이어의 증식 수단인 셈이다.

뱀파이어는 욕망과 초월의 키메라다. 영화 「박쥐」를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는 구보 씨는, 욕망이 지배하는 수평적 공간의 세계와 가치가 만드는 상승과 하강의 깊이가 나란히 간다고 생각한다. 내재와 초월은 부딪혀 얽히지만,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한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가의 문제는 아니다. 카르페 디엠의 쾌락과 영원성의 약속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박찬욱이 내놓은 답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고 구보 씨는 생각한다. 그것은 낡은 구두의 이미지로 잘 드러나는 사랑이다.

뱀파이어는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의 산물이기도 하다. 영화 「렛미인」에서 엘리와 같은 뱀파이어도 그렇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못하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어둠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장치다. 우리는 뜻대로 안 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을 찾고 갈구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뜻과 어긋나는 대가가 따를 수 있음을 어렴풋하게 예감한다. 구보 씨는 “뜻이 여럿인 세상을 뜻대로 사는 손쉽고 안락한 길은 없지 않을까.”하고 덧붙인다.

 

구보 씨, 크기를 생각하다
구보 씨는 사회적 크기에 대해서 사유한다.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100여 명 정도, 많아야 200명이 못 되는 규모의 집단 생활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제 아무리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도 지속적으로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백 명 남짓이다. 군대로 따지면 중대 규모의 집단이 정서적 교감을 지니고 가장 큰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대 단위이다. 그런데 집단이 이 크기를 넘어서면 서로 속속들이 알기도 어렵고 정서적으로 일체감을 느끼기도 곤란해진다. 직접적인 접촉으로 유지될 수 있는 집단의 크기가 생래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크기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로 삶을 꾸려가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마음과 사회 환경, 심정과 사회 조직 사이에 괴리가 생겨난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무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령 일국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관계하는 일차적인 집단의 크기는 백여 명 남짓이다. 물론 각각의 사람들이 관계하는 일차 집단은 서로 같지 않게 중첩된다. 그러나 이런 중첩적인 관계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퍼져가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틈새들을 따라 서로의 간극은 크게 벌어지며 집단들끼리의 엮임도 쉽게 적대적인 선들로 균열된다. 심정적 집단의 크기와 실제의 사회적 관계로 얽힌 집단의 크기 사이에서 온갖 문제들이 생겨난다.”(189~190쪽)
이 점은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자유주의냐 공동체주의냐를 나누는 차이도 여기서 나타난다. 구보 씨는 자유주의자들이 이런 문제를 도외시해 왔고, 인간을 일종의 레고 조각처럼 보고 필요에 따라 이어다 붙이면 어떤 규모의 어떤 사회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왔다고 비판한다. 공동체 단위에 대한, 즉 코뮌 단위에 대한 생각이 없다.

구보 씨는 생물의 크기에 대해 생각한다. 구보 씨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에 실린 ‘크기와 형태’라는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

언젠가 나는 뉴욕 시의 어느 운동장에서 어린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다. 소녀 둘이 개의 크기를 따지고 있었다. 한쪽이 물었다. “개가 코끼리만큼 자랄 수 있을까?” 다른 아이가 대꾸했다. “아니야. 코끼리만큼 커지면 모양이 코끼리 같을 거야.” 정곡을 찌른 대답이었다.

지상의 동물들은 일정한 크기를 넘어서면 형태상의 제약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거미나 벌이 일정 정도 이상 커지면 중력을 이겨낼 수 없다. 대왕오징어나 고래처럼 거대한 생물은 중력의 부담이 적은 물 속에서 산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꼭 크고 복잡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구보 씨는 본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이 이 지구의 지배적인 생물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적인 편견이라는 것이다. 굳이 지구에 주인인 생물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박테리아 같은 종류다.

구보 씨는 먹는 것과 크기를 연관시킨다. 먹는 행위는 파괴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먹는 일은 내가 아닌 것들을 부수고 찢어서 나의 일부로 재구성해 내는 절차다. 철학적으로 풀자면, 타자의 해체와 동일화가 먹는 행위의 목표다.
물론 먹는 일은 중요하다. 먹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키우고 유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라는 포이어바흐의 말은 이런 의존성을 잘 드러내 준다.

 

 


저자 소개
문 성 원 文晟源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공부했고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경기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문화철학, 역사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철학의 시추』(백의, 1999), 『배제의 배제와 환대』(동녘, 2000), 『해체와 윤리』(그린비, 2012) 등의 책을 썼고, 철학적 사유가 오늘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를 꾸준히 모색하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라는 철학 단체의 웹진에 2010년 봄부터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해 왔는데, 이번에 그 글들을 묶어 책으로 내게 되었다.


 

 

 

책 속으로

누드모델을 꿈꾸는 구보 씨의 철학 강좌

 

▩ 구보 씨, 누드모델을 꿈꾸다


“음냐, Y야, 초월은 뭐 그렇게 거창한 것만 뜻하는 게 아니야. 우리가 현재의 테두리로 관장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가면 그게 초월이지. 초월이란 말이 원래 그런 거잖아. 초월(超越), 넘어서 건너가는 것.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것. 벌거벗음은 그런 걸 준비한다는 얘기지. 그래서 벌거벗음은 생명의 견지에서 보면 에로틱한 거야.”(59쪽)

 

▩ 구보 씨, 소통을 말하다


 ‘만드는 문명’은 ‘기르는 문명’을 압도하고 잡아먹었다. 이제는 농작물도 가축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통은 이 생산과정에 종속되어, 그 수단의 일부로 취급받는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이런 모델을 잘 따르는 모범적인 사례다. 만드는 공정, 그것도 반성도 검증도 결여된 급속한 만들기의 공정을 통해 온 땅과 물을 덮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소통은 이런 만들기의 효율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것으로 대접받는다.(77쪽)

 

▩ 구보 씨, 뱀파이어가 되다


“어쨌든 그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이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잖아. 거기서 카프카는 원숭이의 입을 빌려 말하지. 그 대산 알지? ‘저는 자유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출구를 찾았을 뿐입니다.’ 카프카가 흡혈의 에너지로 연명하려 한 건 자기의 존재를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면 탈주하기 위해서라구.”(113쪽)

 

▩ 구보 씨, 크기를 생각하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무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령 일국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관계하는 일차적인 집단의 크기는 백여 명 남짓이다. 물론 각각의 사람들이 관계하는 일차 집단은 서로 같지 않게 중첩된다. 그러나 이런 중첩적인 관계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퍼져가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틈새들을 따라 서로의 간극은 크게 벌어지며 집단들끼리의 엮임도 쉽게 적대적인 선들로 균열된다. 심정적 집단의 크기와 실제의 사회적 관계로 얽힌 집단의 크기 사이에서 온갖 문제들이 생겨난다.(189~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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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블로그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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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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