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라틴어 한마디쯤은 알고 있죠. 코기토 에르고 숨. 코기토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르네 데카르트의 말입니다.



르네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스스로의 발로 처음 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유일한 자기증명법결국에는 신에 대한 부정으로 서서히 이어지는 아득한 바벨탑의 시초.

두 번째 코기토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나옵니다.
 
인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로 신은 존재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물론 이 언사는 그가 ‘금욕주의적 이상을 비꼬는 데 사용한 거지만실은 그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사용했다 해도 별로 놀랍지 않을 듯합니다그가 부정하고 싶었던 건 신이 아니라어리석은 인간들이었습니다한없이 어리석으면서도 이성이란 걸, ‘인식이란 걸 항상 갖고 있는 척하는 비천하고열등한 인간그리고 결정적으로 니체 자신의 우월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사실 ‘이란 그에게 있어서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이나 달성해야 할 최종 단계였습니다.

세 번째 코기토는 라캉의 세미나 무의식에 있어 문자가 갖는 권위 또는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에서.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한다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만 존재한(I thinkwhere I am notthereforeI am where I donot think).



자크 라캉


인간이 생각하는 주체-이성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데카르트의 신화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고이제 라캉은 코기토를 그답게 뒤틀며 말합니다그리하여 이 코기토는 자연스레 그의 스승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합니다프로이트는 자신의 분석학 강의의 열여덟 번째 강의 외상에 대한 고착무의식에서 인류는 지금까지 두 번의 커다란 모욕(첫 번째 모욕은 코페르니쿠스로부터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두 번째 모욕은 다윈으로부터인간이 창조에 의한 특권을 누린 유별난 존재가 아니라는)을 받았으며이제 마지막 모욕자아/주체가 존재의 주인이 아니라는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학에서의 코기토일반적인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로서의 코기토가 아니라글쓰는 존재에 대한 탐구로서의 코기토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에서 주운 마지막 코기토.
 
나는 다른 사람이다고로 존재한다.



오르한 파묵
이 글은 이치은 에세이,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알렙, 2020)에 수록된 단편을 재구성하여 쓴 것입니다.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는 책 읽기, 책 속의 그림, 책 속의 문장에 관해 쓴 이치은의 단편 에세이들입니다. 이치은 작가는 짤막한 단상이 잡문이나 메모 정도에 지나지 않고, 읽히는 글이 되게끔 세심하게 글감을 골랐습니다.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
도끼열쇠찌꺼기가 된 어느 소설가의 생각 부스러기들
이치은 지음 | 알렙 | 2020.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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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낳은 가장 혁신적인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1952년에 발표한 『또 다른 심문들』에는 유명한 동물의 분류 방식이 나옵니다.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사실 그는 프란츠 쿤 박사의 중국백과사전에서 인용했다고 주장했죠그리고 다시 미셸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재인용했고마지막으로 수다쟁이 아저씨 움베르토 에코가 궁극의 리스트에서 재재인용해서 더더욱 유명해졌습니다한번 볼까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a. 황제에 예속된 동물들
b. 박제된 동물들
c. 훈련된 동물들
d. 돼지들
e. 인어들
f. 전설의 동물들
g. 떠돌이 개들
h. 이 분류 항목에 포함된 동물들
i. 미친 듯이 날뛰는 동물들
j. 헤아릴 수 없는 동물들
k. 낙타털로 만든 섬세한 붓으로 그려진 동물들
l. 그 밖의 동물들
m. 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동물들
n. 멀리서 보면 파리로 보이는 동물들
 



움베르토 에코


그러면이 놀라운 분류 방식을 고안해 냈으면서도 짐짓 프란츠 쿤 박사에게서 인용했다고 주장하는 보르헤스의 말은 사실일까요?
그 백과사전의 제목은 바로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입니다물론 그건 보르헤스의 18번인 이른바 가짜 인용입니다.
당연히 이런 책은 존재하지 않으니 아마존이나 중국 헌책방을 찾아 헤매지 말아야 합니다*^^*

볼 때마다 웃음 짓게 하는 이 놀라운 분류 방식. 이런 놀라운 분류표를 고안해 낸(고안해 냈으면서도 짐짓 고안한 것이 아니라 타인이 쓴 글에서 빌려 왔다고 천연덕스럽게 농을 던지는) 보르헤스는 어디에 속할까요? 
당신은 어디에 속하는가요? 그리고 이 책을 쓴 이치은은 어디에 속할까요? 



이 글은 이치은 에세이,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알렙, 2020)에 수록된 단편을 재구성하여 쓴 것입니다.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는 책 읽기, 책 속의 그림, 책 속의 문장에 관해 쓴 이치은의 단편 에세이들입니다. 이치은 작가는 짤막한 단상이 잡문이나 메모 정도에 지나지 않고, 읽히는 글이 되게끔 세심하게 글감을 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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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읽을 대상으로서의 책은 무엇인가요? 쓰는 대상이 아니라!
독서의 대상으로서의 책에 대한 프란츠 카프카의 발언.
카프카가 책에 대해 말한 문장 중 가장 흔히 인용되는 건 아래 문장입니다.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문학잡지 악스트(도끼)

이 문장은 20살의 카프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조금은 과격하고 파격스러운 위 말과 달리지극히 카프카다운 말도 있습니다.
 
많은 책들은 자신의 성 안에 있는 어떤 낯선 방들에 들어가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하네.
 




카프카의 편지에는 놀랍게도 책에 대한독서에 대한 이야기가 드뭅니다.
하나 더 인용해 보자면이 글은 아쉽게도 카프카가 직접 남긴 말이 아니라구스타프 야누흐란 사람이 카프카와의 대화를 기록한 말입니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동안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들을 열거했다카프카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는 비교적 쉽게 그렇게 많은 책을 끄집어 낼 수 있지만책에서는 거의정말 거의 인생을 끄집어 낼 수 없어요.”

그러곤 카프카가 이렇게 덧붙였다고 구스타프 야누흐는 주장합니다.
 
글은 체험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아요.
 
보르헤스는 노란 장미에서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합니다.
 
책들은 세계의 거울이 아니라 세계에 새로 덧붙여진 어떤 무엇이라는 것.
 
당신에게 읽을 대상으로서의 책은 무엇인가요?
언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인가요?
자신의 마음 속 한번도 가지 못한 방을 여는 열쇠인가요?
체험의 찌꺼기일 뿐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체험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세계에 덧붙여진 부록 같은 건가요?



당신에게 책은 무엇인가요? 도끼? 열쇠? 찌꺼기? 아니면 부록?
이 글은 이치은 에세이,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알렙, 2020)에 수록된 단편을 재구성하여 쓴 것입니다.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는 책 읽기, 책 속의 그림, 책 속의 문장에 관해 쓴 이치은의 단편 에세이들입니다. 이치은 작가는 짤막한 단상이 잡문이나 메모 정도에 지나지 않고, 읽히는 글이 되게끔 세심하게 글감을 골랐습니다.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
도끼열쇠찌꺼기가 된 어느 소설가의 생각 부스러기들
이치은 지음 | 알렙 | 2020.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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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들에서 주운 부스러기에 대한 책이다지금까지 써 왔던 소설들보다는 한결 실용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 책쾌락을언제나 쉬이 사그라지고 마는 쾌락을 조금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글필사(必死)할 즐거움들을 보존하기 위해 행해지는 필사(筆寫).”
이치은(작가)



■ 간략 소개

책은 도끼인가, 열쇠인가, 찌꺼기인가?
어느 소설가의 생각 부스러기들
Celestial Emporium of Benevolent Knowledge

작가 이치은은 자신을 키운 건 팔할이 부스러기들이라고 한다. 10년이 더 넘은 작가의 습관이다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찾으면 당장 눈에 띌락 말락 한 dog ear를 만들고(책 한귀퉁이를 접고다 읽은 후에 포스트잇으로 옮겨 적기그리고 그렇게 만난 문장들을 부스러기라고 부르기.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에는 작가의 오랜 습관에 더해오랜 사색이 빚어낸 책과 그림들 그리고 시간과 기억에 관한 단상들이 펼쳐진다그리하여 보르헤스의 말처럼그가 읽어내고 간추린 부스러기들은 작가 이치은이 선구자들을 창조하는 데” 역할을 하고 있음을 고백한다삶과 창작의 원천으로서의 책 읽기이되가볍고 재치 있게사색의 단상을 펼쳐 보인다.


■ 출판사 서평

그것은 부스러기들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들에서 주운 부스러기에 대한 책이다지금까지 써 왔던 소설들보다는 한결 실용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 책쾌락을언제나 쉬이 사그라지고 마는 쾌락을 조금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글필사(必死)할 즐거움들을 보존하기 위해 행해지는 필사(筆寫).”
이치은(작가)
 
아르헨티나의 대작가 보르헤스는 1952년에 발표한 또 다른 심문들에서 동물의 분류 방식을 제시한다.
 
a. 황제에 예속된 동물들 b. 박제된 동물들 c. 훈련된 동물들 d. 돼지들 e. 인어들 f. 전설의 동물들 g. 떠돌이 개들 h. 이 분류 항목에 포함된 동물들 i. 미친 듯이 날뛰는 동물들 j. 헤아릴 수 없는 동물들 k. 낙타털로 만든 섬세한 붓으로 그려진 동물들 l. 그 밖의 동물들 m. 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동물들 n. 멀리서 보면 파리로 보이는 동물들
 
그는 이를 프란츠 쿤 박사의 중국백과사전에서 인용했다고 주장했다그 백과사전의 제목이 바로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이다다시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이를 재인용했고마지막으로 움베르토 에코가 궁극의 리스트에서 또 한 번 재재인용한다물론 그것은 보르헤스의 주특기인 이른바 가짜 인용이다보르헤스가 말한 이런 책은 존재하지 않으니 미국 아마존이나 중국 헌책방을 찾아 헤매지 않도록!
당연히이치은의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는 한국의 모든 서점에서 구할 수 있다!
작가 이치은은 자신을 키운 건 팔할이 부스러기들이라고 한다. 10년이 더 넘은 작가의 습관이다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찾으면 당장 눈에 띌락 말락 한 dog ear를 만들고(책 한귀퉁이를 접고다 읽은 후에 포스트잇으로 옮겨 적기그리고 그렇게 만난 문장들을 부스러기라고 부르기.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에는 작가의 오랜 습관에 더해오랜 사색이 빚어낸 책과 그림들 그리고 시간과 기억에 관한 단상들이 펼쳐진다그리하여 보르헤스의 말처럼그가 읽어내고 간추린 부스러기들은 작가 이치은이 선구자들을 창조하는 데” 역할을 하고 있음을 고백한다삶과 창작의 원천으로서의 책 읽기이되가볍고 재치 있게사색의 단상을 펼쳐 보인다.
 
 



당신에게 책은 무엇인가? 도끼인가, 열쇠인가, 찌꺼기인가?

 
당신에게 읽을 대상으로서의 책은 무엇인가언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인가자신의 마음속 한 번도 가지 못한 방을 여는 열쇠인가체험의 찌꺼기일 뿐인가아니면 우리의 체험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세계에 덧붙여진 부록 같은 것인가?
이치은이 카프카와 보르헤스의 입을 빌려 묻는다. “책은 무엇인가?” 도끼인가열쇠인가찌꺼기인가먼저카프카가 책에 대해 말한 문장 중 흔히 인용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이 문장은 1904그러니까 20살의 카프카가 친구인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한 문장이다이치은은 책은 도끼라는 카프카의 말이 전혀 카프카스럽지Kafkaesk 않다고 말한다이치은이 찾은 진짜로’ 카프카스러운 부스러기가 있다역시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이 말이 나온다.
 
많은 책들은 자신의 성 안에 있는 어떤 낯선 방들에 들어가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하네.”
 
카프카의 편지에는 책-독서에 대한 이야기가 드물다그리고 다음 글도 카프카가 직접 남긴 말이 아니라구스타프 야누흐란 사람이 카프카의 대화를 기록한 말이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동안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들을 열거했다카프카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는 비교적 쉽게 그렇게 많은 책을 끄집어 낼 수 있지만책에서는 거의정말 거의 인생을 끄집어 낼 수 없어요.”
글은 체험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아요.”
 
이치은에게 책은, (카프카스럽지 않지만도끼이며, (카프카스럽게도열쇠이며찌꺼기이다이치은은 더 나아간다보르헤스는 노란 장미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데,
 
책들은 세계의 거울이 아니라 세계에 새로 덧붙여진 어떤 무엇이라는 것.”
 
소설을 쓰는 이치은 작가에게 책이란 보르헤스적인 의미가 강하다보르헤스는 또 다른 심문Otras Inquisiciones이란 책에서 실제로 모든 작가들은 그들의 선구자를 창조했다.”고 말했다책은 도끼일 수도열쇠일 수도찌꺼기나 문일 수도 있지만이치은 작가에게 책은 기존의 세계에 새로 덧붙이는 어떤 무엇이며그렇게 덧붙여졌을 때에 그 기존의 세계가 유의미한 것이 되는 어떤 무엇이라는 것이다무작정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거나유행을 선도하는 동시대나 전시대의 거장을 따라한 게 아니라 스스로 새로움을 만들었다는 자신감어쩌면 어느 시대나 예술가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자세가 아닐까?
 
이치은은 스물여덟의 나이에 <오늘의 작가상>을 받고 화제로 떠올랐던 소설가였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대형 신인의 탄생이란 극찬을 했던 작가였다하지만오랜 공백으로 인해그리고 상당한 아방가르드적인 문학 성향으로 인해이치은은 그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작가가 되었다하지만이치은은 20년 동안 장편소설 6편과 단편소설집 1편을 펴낸그리 과작의 작가는 아니다.
이 책은 이치은 작가의 책 읽기에 대해 쓴 책이다작가에게 책 읽기란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든 커다란 쾌락이다작가는 자주 스스로에게 책 읽기가 더 큰 쾌락을 가져다주는지아니면 책 쓰기가 더 큰 쾌락을 가져다주는지 묻는다답은 그때 그때 다르지만 그래도 책 읽기가 답일 때가 더 많다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손에 든 바람에 괴로울 때도 수없이 많지만그래도 여전히 자신을 산산이 해체할놀라운 기쁨을 선사해 줄 또 다른 책을 만날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책 읽기, 책 속의 그림, 책 속의 문장에 관한 70편의 단상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의 중심지는 책 읽기책 속의 그림책 속의 문장에 관해 쓴 이치은의 단편 에세이들이다도끼로서의 책열쇠로서의 책 혹은 부스러기들로서의 책에 대해 자유롭고 아무 격식 없이 이야기한다이치은은 짤막한 단상이 잡문이나 메모 정도에 지나지 않고읽히는 글이 되게끔 세심하게 글감을 골랐다.
 
책도락(冊道樂)
책이 인생의 큰 도락인 작가에게는천국에도 책이 있을까 묻는다책도 없다면거기는 얼마나 지루하겠는가다행히 Hortus Conclusus(닫힌 정원)라는 그림을 보면 책은 있는 것 같아 안도하게 된다하지만만에 하나천국에는 없는 책들이 없지만(그러면 그건 정말 천국이라 불릴 만하겠다성경처럼 모두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쓰여 있다면거기야말로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옥이겠다.   
 
지극히 사적인 취향
글을 쓰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또 “SF에 대한 나의 편견을 둘러싼” 정반대의 변명도 있다이치은 작가는 지극히 사적인추리소설들을 위한 명예의 전당에 자신만의 리스트를 올린다취향이란 존재에 닿아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그것은 DNA에 적혀 있거나 아니면 기억하기 힘든 아주 어렸을 적부터 형성된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다.
 
순환되거나 역전되는 현상세계
이치은 작가의 소설 작품들의 경향과 유사하게이야기의 주제는 순환되거나 역전되는 시간과 기억에 관한 것으로 옮아간다. “시간에 대한 SF 작가들의 상상력”, “역행하는 시간, Through the Looking-Glass”에서 시간과 기억은 종종 역전된다(왕의 시종이 있어지금 벌을 받아서 감옥에 갇혀 있지재판은 다음주 수요일에나 열릴 거야당연히 범죄는 가장 나중에 저질러지지.) (뒤로만 작용을 하다니 형편없는 기억이로구나.)
영국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네 번째 앨범 움마굼마(1969)의 커버 사진은사진 속의 사진들로 반복된다반복되면서 조금씩 변주되는 사진들그들의 아방가르드한 음악처럼 천천히 응시하면 점점 더 빨려들 것 같은 이상한 사진.
 
또 다른 호사그림책 속의 그림 속의 책……
이치은 작가가 호사스럽게 누리는 또 다른 책에 관한 사치는책을 통해 그림(회화)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이 책의 2부에는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작가가 그림을 찾은 팔 할 이상의 장소는 책이었다나머지 일 할 오 푼의 그림은 인터넷에서나머지 오 푼의 그림은 박물관-미술관에서이다작가는 책에서 그림을 보는 것을 선호한다그림책화집도록미술 비평서부스러기들처럼작가는 조금은 다른 방식이지만 작가에게 커다란 희열을 가져다주었던 그림들 한 장 한 장을 정성스레 도려내어 펼쳐놓는다.
그 방식은 역시 호사가의 취미처럼 다양하다자신에게 푼크툼Punctum이 되었던 그림자신만의 빌보케를 만드는 현대미술의 경향책 속의 그림그림 속의 책랭보의 5가지 색깔과 매칭되는 화가들페스타이올로들이상한 제목의 그림들 등……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미술 비평이 아닌다양한 방식의 미술작품 감상법을 선보인다.
 
부스러기들책 읽기에 대해 쓴다는 것
그리고 작가의 10년도 더 넘은 실용적인 목적의 습관에서 비롯된 글들이 있다책 읽기에 대해 쓰는 것은 책 쓰기와는 또 다른 차원의 행위다책 읽기와 책 쓰기는 각각 커다란 쾌락을 작가에게 가져다주지만책 읽기에 대해 쓴다는 것은 단지 쾌락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다약간은 실용적인 목적도 있다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작가에게 주어졌던 커다란 즐거움을 완전히 잊지 말고 가끔씩 꺼내보기 위해작가는 책 읽기에 대해 써 왔다.
처음에는 아주 사적인 형식의 글들이었다작은 메모들작은 쪽지들작은 낙서들이치은은책 속에 묻혀 있는 짧은 문장들을 찾아서 그것들을 메모의 형식으로 남겨 두었다그런 문장들을 작가는 부스러기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하여이 책은 작가가 좋아하는 책들에서 주운 부스러기에 대한 책이다.
 



작가 소개

 
이치은
인생은 금물이라는 가르침을 듣지 않고 197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공업화학과 졸업같은 곳에서 석사학위 획득. 1998년 권태로운 자들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이다로 제22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그닥 별스런 꿈 때문에 새벽잠을 설치는 일도 없이 아직 마루가 꺼지지 않은 은신처에서 가족들과 함께 정신은 그 어떤 결심에 의지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라는 엉터리 선인의 말만을 붙들고 오늘도 매일매일 하루하루 별일 없이 산다.
 
2003년 유대리는 어디에서어디로 사라졌는가?, 2009년 비밀 경기자, 2014년 노예 틈입자 파괴자(2014년 세종도서 문학 부문 선정), 2015년 키브라기억의 원점, 2018년 보르헤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논쟁마루가 꺼진 은신처를 발표하였다.
 
 

천상에 있는 친절한 지식 중심지
도끼, 열쇠, 찌꺼기가 된 어느 소설가의 생각 부스러기들
이치은 지음 | 알렙 | 2020. 1. 30.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들에서 주운 부스러기에 대한 책이다. 지금까지 써 왔던 소설들보다는 한결 ‘실용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 책. 쾌락을, 언제나 쉬이 사그라지고 마는 쾌락을 조금 더 오래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글. 필사(必死)할 즐거움들을 보존하기 위해 행해지는 필사(筆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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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을 두드리면, 손가락은 이미 뇌가 있듯, 서로 상관없이 무심코 흐르듯 한 것들을 끈끈이 파리지옥에 달라붙인다. 파리는 달라붙어 말라 죽지만, 이미지들이 만들어낸 느낌과 생각들은 기억 속에서 집적되어, 다시 물 흐르듯 흐른다. 여기에서 나는, 인문의 희열을 맛본다. 그러니 그 긴 여정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이 되는 셈이다.

— 이광수(사진가, 역사학자)







■ 간략 소개

사진 놀이를 통해 자유로이 펼치는 사유의 세계(2009-2019)
사진은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

사진 찍는 인문학자 이광수 교수에게는 사진이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이다. 이광수 교수는 디지털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기계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하는 또 하나의 인문의 행위는 무엇일까를 묻는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봄(시선)’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권력은, ‘봄’과 ‘보임’ 그리고 ‘보여줌’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그 사이의 차이가 나와 당신의 사이에서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냈다. 모든 게 보기 나름이고, 보이기 나름이고, 보여주기 나름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시선)’을 통해서 서로 나누어 보는 것, 그것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의 세계다.

■ 출판사 서평

사진 놀이를 통해 자유로이 펼치는 사유의 세계(2009-2019)
사진은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


사진 찍는 인문학자 이광수 교수에게는 사진이 생각의 도구이자 인문의 행위이다. 이광수 교수는 디지털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기계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하는 또 하나의 인문의 행위는 무엇일까를 묻는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봄(시선)’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권력은, ‘봄’과 ‘보임’ 그리고 ‘보여줌’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그 사이의 차이가 나와 당신의 사이에서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냈다. 모든 게 보기 나름이고, 보이기 나름이고, 보여주기 나름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시선)’을 통해서 서로 나누어 보는 것, 그것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의 세계다.

이광수 교수는 인도 종교와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이자 사진비평가이다. 인도 근대사 연구 중에 사진이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비평의 길로 들어섰다. 또한 2009년부터 2019년까지 한 해에 2-3차례 인도에 방문, 체류하여 인도 세계의 종교, 문화, 생활, 역사의 현장 등을 사진에 담아 왔다.

이광수 교수의 신작 『나는 본다, 사진이 나를 자유케 하는 것들』은 사진 놀이를 통한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를 펼쳐보이는 인문 에세이이다. 지난 10년간(2009-2019) 이광수 교수는 필사적이다시피 카메라를 메고 인도로 향했다. 인도 세계에 가면, 보지 못했던 것들, 잊힌 것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거기 어떤 신성함이 드러내준 존재들을 카메라라는 기계를 대동해 몸뚱이 육안으로 보고 읽고 해석하다가 이내 자유케 되는 기쁨을 만끽해 갔다. 이런 시간을 본격적으로 가진 지 10년째다.

저자가 접한 세계 안에 정해진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보기 나름이고 해석하기 나름이다. 그것이 자연이든 자연이란 이름으로 드러난 신의 본질이든, 저자는 저자 마음대로 보고 해석한다. 그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봄의 이치”이다. 이는, 힌두 세계에서 말하는 알현謁見의 이치와 비슷하다. 그는 드러내고, 나는 보는 이치. 그 안에서는 자신이 보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그가 드러내주는 것이 우선인 이치다. 그래서 마음대로 보고 해석한다지만, 결국 그 자연이라는 존재에 대한 경외가 그 밑바탕에 깔린다. 저자는, 그 경외 위에서 그렇게 대상을 접하고, 자신의 눈으로 잡아내 자신이 해석하는 것을 인문을 긷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 인문을 긷는 것은 카메라로 할 때 가장 자유스럽다. 이를테면, “카메라가 나를 자유케 해주는 것”이다.

이 책 『나는 본다, 사진이 나를 자유케 하는 것들』은 카메라로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을 통해 서로 나누어 보는 것, 디지털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 우리가 하는 인문의 행위는 무엇일까를 탐사한다. 한국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들, 우리에게 잊힌 것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사진(순간)으로 포착하면서, 사진가의 렌즈에 비친 언어(봄)와 그 세계가 나누는 것들(권력)에 대해 사유해 간다. 그 세계에서 단순한 느낌이나 한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그 대상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사진으로 하는 인문적 사유의 세계이다.


사진은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사진으로, 봄(시선)과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다.

이광수 교수는 사진과 글이 자유롭게 교차하는 이 책에서 사진, 봄의 이치, 그리고 권력에 관한 인문학적 사유를 전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진은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이 교수는 이를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한 구절, “이것은 해석이지, 텍스트는 아니다.”에서 전거를 인용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봄’에 관한 이 세계의 이치다. 사진을 매개로 하여 말하자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고, 있는 사물에 대해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벗어나 카메라의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다. 인간의 눈과 카메라의 눈은 모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기계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어떻게 조절하느냐 즉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저자는, 힌두 세계의 ‘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간이 그렇게 보는 것은 신이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드러내는 것이니 그의 뜻에 따라 그 성안聖眼을 알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본질을 볼 수 없으니, 그 상을 만들어 그 신을 보게 된다. 그 안에는 신이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성안의 ‘보여줌’이 있고, 그 후에야 비로소 인간이 하는 알현의 ‘봄’이 가능해진다. 보여줌과 봄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봄’과 ‘보여줌’과 ‘보임’의 세계, 그것은 신에 대한 알현은 인간의 주체이지만, 신의 주체이기도 해서 결국 하나가 되어 가능해진다.     
‘봄’의 문제는, 그래서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인간을 보든, 자연을 보든, 신의 상을 보든 그것은 본질이 드러내는 것을 알현할 뿐이다. 그것을 숭배하거나 보존하거나 하는 것은 어떤 우열을 가리거나 그 질의 규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본질을 알현하려 하지 않고, 드러난 모습을 숭배하려 든다. 변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것을 숭배하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서 하는 짓이다.
저자는 질서라는 권력자들이 설정한 세계는 서로 다른 ‘봄’이 공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본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이 ‘봄’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진이란 세계를 자신이 보는 바에 따라 해석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전유하는 행위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봄 안에 들어 있는 권력

권력은 물질의 수단을 어느 한쪽 소수가 차지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수단을 독차지한 소수는 다수로 하여금 자신들이 해석한 세계 안에 들어와 그 정한 가치에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하도록 만든다. 여러 가지 이름이 있겠지만, 모두 강제다. 그 안에서 달리 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그렇게 세계를 ‘봄’은 자연을 부정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질서라는 이름으로 세우는 전통과 문법이 된다. 그리고 그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것은 질서의 파괴자로 규정하여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 저항의 시도는 전통과 문법의 틀에 따라 때로는 유치한 것으로, 때로는 위험한 짓으로, 때로는 미치광이로, 때로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매도당하고 처벌당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저항하는 위험한 자들로 하여금 전통과 문법의 틀 안으로 돌아오라고 끊임없이 가르친다. 그것이 도덕이고 그것이 종교다. 도덕과 종교는 회개하고 회심하는 자를 용서하고 품에 안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자는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시킨다. 그들이 달리 보지 말라는 것을 끝까지 부인할 때 말이다.
질서라는 권력자들이 설정한 세계는 서로 다른 ‘봄’이 공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세계 안에서 팩트는 존재하나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어떤 생각은 어떤 기준에 맞춰져 균질하게 되고 단순화되어 진리로 자리 잡는다. 그것이 종교다. 그 종교는 처음에는 진리를 찾아 구도하는 단순 발심에서 시작하지만, 이후로 조직과 돈을 갖추게 되면서 진정한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그 틀은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일방적으로 통용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널리 유통된다. 결국, 종교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군림하는 반(反)진실의 토대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진리 안에서 자유롭다는 신화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진을 한다는 것은 이 ‘봄’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진이란 세계를 자신이 보는 바에 따라 해석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전유하는 행위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마찬가지로 남도 그가 원하는 대로 보고 해석하고 전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자신이 카메라로 보고 만들어내는 그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우와 열을 가리지도 않고, 그것으로 물질을 구하지도 않으며, 남이 만든 그만의 ‘봄’과 그 결과물을 평가하지도 않으려 한다. 자신 아닌 다른 이도 사진으로 줄 서고, 줄 세우고 하는 일에서 자유로웠으면 한다. 그것이 사진 안 대동세상일 것이다. 카메라를 들어 세계로 가까이 가볼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이야말로 디지털이라는 피할 수 없는 기계의 숲으로 덮인 이 시대에서 우리가 하는 또 하나의 인문의 행위이다.


봄 안에 자리 잡은 욕망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무엇일까? 저자는, 욕(欲)이라 본다. 욕이 없다면 행위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어떤 관계도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면 세상의 삶도 없을 것이다. 욕의 삶을 부인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 절대 고독 속에서 궁극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개인으로서 욕을 제어하는 삶에 도달하긴 했다지만, 그것의 최대치는 결국 개인 차원에서일 뿐이다. 그들의 제자는 결국 다시 세상 안으로 들어와 관계를 맺게 되니, 욕을 버리는 것을 부정하는 기제는 이전보다 더 강고하게 되어 더욱 세상적으로 되고, 그 안에서 욕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도돌이표의 인류사는 인간 삶의 뿌리가 절대적으로 욕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욕망은 변증법적으로 변태하여 커지고 그 변태된 새로운 욕망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그것이 역사가 된다. 역사는 결국 욕망을 통해 인간 본성이 구체화되도록 운동하는 힘의 궤적이다. 우리는 누구든 시간이 흐르고 그것이 역사를 만들어내는 한 욕망을 버릴 수는 없다.
내가 안간힘을 다해 잡으려, 잡으려 애쓰는 그 욕은 나를 변화시키는 본질이 된다. 나에게 세계는 거울이나 창에 비친 아무런 에너지가 없는 반영이 아니다. 누군가가 정해 준 도덕이나 질서에 따라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살아가는 그런 삶이 아니고, 나의 욕이 추동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세계 한가운데 고독하게 서 있는 독자적으로 완전한 존재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그 세계는 나와 우리가 만드는 변화하는 어떤 비실체적 실체다. 그래서 욕은 인간이 살아나가는, 인간을 품어 움직이게 하는 자연의 일부다. 애써 살아가는 욕을 집착으로 규정하는 것은 세계를 환(幻)으로 보는 것이다. 소수가 만들어낸 초월성 혹은 신에 굴복한 ‘봄’이 만들어내는 세계 안에서의 일이다. 그 안에서 인간은 희생을 강요당하고, 그 강요 위에서 희생당한 자는 신화로 포장된다. 그리고 그를 희생시키는 공동체는 물질의 번영을 만끽한다. 그러나 그 번영은 소수의 것일 뿐이다.
카메라는 눈앞에 보이는 실체를 아무 본질 없는 허탄한 이미지로 만들어버리는 기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허탄한 이미지를 어떤 실체가 있는 본질로 삼는다. 그 위에서 진실을 규명하고, 남의 ‘봄’을 규정하고 판단하고 그것으로 사람마저 재단한다. 그리고 권력이 된 어떤 소수가 정한 문법 위에서 그 ‘봄’의 가치를 평가하고, 그것으로 권력과 부와 명성을 쌓는다. 본질적으로 사람도 없고, 삶도 없고, 사랑도 없는 이미지의 세계 안에서 누군가 쌓은 권위 아래로 스스로들 굴복하여 들어가고 줄을 선다. 욕망이라는 사람이 살기 위해 가동시켜야 할 에너지가 이미지에 덮여 사람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는 카메라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곰곰이 무겁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봄’과 ‘나’ 사이, 사진

사진은, 니체의 언설을 빌려 말하자면,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것, 그것이 카메라를 둘러싼 ‘봄’의 이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앞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에 대해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벗어나 카메라의 눈으로 보고 그 대상의 일부만을 취해 사람들이 보도록 재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눈과 카메라의 눈은 모두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성과 감성을 통제하는 ‘나’에 의해 제어될 수밖에 없고, 기계라 하더라도 결국 그 사람의 눈에 따라 보는 것이 조절되고 통제될 수밖에 없다. 대상 가운데서 무엇을 보느냐, 왜 보느냐, 어떻게 보이게 하느냐를 정해야 사진하는 행위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다 보니, 사진이란 ‘봄’과 ‘나’ 사이에서 만들어진 행위의 결과다. 결국 ‘나’의 문제다.
‘봄’의 이치는 그가 사람을 보든, 자연을 보든, 신의 상을 보든 그것은 그 대상의 본질이 드러내는 것을 보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재현하거나 그 재현물을 전시하거나 숭배하는 것은 어떤 우열을 가리거나 그 질을 규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도 재현할 수 있어야 하고, 저렇게도 전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숭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에 따르고, 세계를 운항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본질에 더 합당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본질을 알현하려 하지 않고, 드러난 재현의 겉모습을 전시하고 숭배하려 든다. 종교가 그러더니, 물질이 그렇고 요즈음은 사진하는 것이 가장 그렇다.
중요한 것은 사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선 아는 일이다. 사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카메라라는 기계, 그 기계로 대상을 취하는 ‘봄’ 그리고 그 ‘봄’을 통제하는 ‘나’. 당신은 그 셋의 메커니즘 안에서 카메라라는 도구로 뽑아낸 이미지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왜 그 많고 많은 도구 중에 사진이라는 것을 택하는지? 그림도 있고, 동영상도 있고, 글도 있는데, 왜 당신은 그 카메라라는 도구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혹시 카메라가 조작하기 쉽고 그것으로 뭔가를 말하기가 쉬워서인지는 아닌지 계속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디지털의 시대에 글보다 그림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진으로 인문을 하는 일이다. ‘봄’과 ‘보임’ 그리고 ‘보여줌’의 차이에 대해 사색해 보자. 그 사이의 차이가 나와 당신의 사이에서 어떻게 또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살펴보자. 모든 게 보기 나름이고, 보이기 나름이고, 보여주기 나름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유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세계를 ‘봄’을 통해서 서로 나누어 보자. 그것이 사진으로 긷는 인문의 세계다.

필자 소개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이자 사진비평가이다.
시민운동가로서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만원의 연대’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 진보 정당 당원으로 활동해 왔다. 인도 근대사 연구 중 사진도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비평의 길로 들어섰다.
저술로는 인도사에 관한 것으로 『슬픈 붓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등의 지은 책이 있고,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성스러운 암소 신화』 등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에 관한 책으로 『사진 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최희철과 공저), 『사진으로 생각하고 철학이 뒤섞다』(최희철과 공저), 『카메라는 칼이다』 등의 지은 책과 『사진으로 제국 찍기』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은, 니체의 언설을 빌려 말하자면, 해석이다. 텍스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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