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제왕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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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의 백미는 단연코, 변희봉, 이었다.
다른 사람에겐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그랬다.
변희봉, 을 다른 소설집에서 여러 작가들의 단편들과 어울려 한 번 읽고,
여기서 또 한 번 읽었다. 이 소설이 참 좋구나, 싶은 건
두 번을 읽었어도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심보가 못돼먹었는지, 대체로 두 번째 읽으면
느낌이 축소되거나 뻔하게 읽혔는데 이 단편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 읽을 때는 내게 읽히는 것이 타인에게는 읽히지 않는 것,
내게 보이는 것이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왠지 소통의 어려움 같은 것이 우둘투둘하게 와닿아서
별 이유도 없이 마음이 따듯해졌다.
한데 다시 읽어보니 이 소설집 속의 분위기와 어우러져서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비밀스럽게 조심조심 드러낸다.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눈으로 보고 듣는다.
물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는 것을 보고 듣는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것일까.
나는 변희봉이라는 배우를 좋아하며 무려 존경하고 동경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도, 변희봉이 누고? 하고 묻는다.
어디어디에서 나온 변희봉 선생 말야, 하고 목울대까지 울려가며 말하면  
거기는 김인문이야, 같은 대답이 쏜살같이 날아온다.
물론 이기 미친 기 아닌가, 하는 의문스러운 시선까지 보너스로 달려오기 십상.  

나는 그게 소통의 어려움보다는, 존재의 지점이 다른 게 아닐까, 하고 생각되었다.
나라는 존재가 서 있는 지점과 너라는 존재가 서 있는 지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죽은 자들의 세계와 산 자들의 세계가 혼재하여
눈 밝은 자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것. 아니, 어쩌면 눈 흐린 자만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것.
내 존재의 눈이 흐려 다른 존재와의 경계가 무너진 것.  

아, 물론 고백의 제왕, 도 좋았다.
끝없이 자기만의 내밀한 고백을 객관적인 사실과는 별개로
연이어 나오는 마술의 보자기처럼 줄줄 입 밖으로 꺼내놓는 남자의 이야기.
그러고 보면 누구나 고백할 이야기는 있다.
그걸 꺼낼 수 있는가, 아니면 내어놓을 만큼 이야기화하지 않는가, 의 문제.
남의 고백에 자신의 내밀한 고백을 묻어놓는 게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 단편, 썩 좋았지만 어쩐지 작가가 이야기를 하다 만 듯한 느낌에 아쉬웠다.
아니면 내가 작가의 좀 더 숨죽여 읽을 수 있는 고백을 듣지 못한 아쉬움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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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옷을 입은 아이들 보름달문고 36
김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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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옷이라는 장치가 재미있으면서도 어렵다.
거울로 둘러싸인 옷은 보는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그 옷을 입은 사람은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을 입은 채 정작 자신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내 얼굴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덧입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작가는 자기 안을 바라볼 수 있는 문을 잃어버린 아이들의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 모습은 보지 못하면서 다른 아이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은 어떨까.  

이를테면 소설 속의 지희는 가족을 배신한 아버지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
자기를 제외한 가족은 모두 아버지에게 매달리고 있다며 화를 낸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을 오히려 식구들에 대한 비난의 화살로 돌려
겨냥하고 있다는 건 깨닫지 못한다.
아버지의 빈 자리에 자기 몸을 넣어두고 허우적대고 있는 건 정작 자신인데도
그 모습을 엄마나 언니에게서 보고 있다며 화를 내는 것이다.  

어쩌면 학교라는 공간은 너무나 위험할 수도 있겠다.
비난의 화살을 예리하게 벼릴 줄 아는 존재도 있고,
툭 하면 그 화살에 맞아 살이 찢기는 존재도 있는 공간이다.
그 존재들은 아직 여물지 않았으면서도 스스로 여물었다고 자신을 독려하고
그 증거로 가장된 힘을 휘두를 수 있다.
절망에 허우적대는 자신의 감춰진 모습이 다른 이에게서 조금이라도 보이면
아무 피해도 주지 않는 작은 벌레를 일없이 눌러 죽이듯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간.  

그 공간 속에서는 어른은 한참 밀려나 있다.
일례로 아이들의 알력이 심해지고 왕따라는 날것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
담임의 일처리는 지나치게 유아적이다.
오히려 아이들의 가해의식을 한층 부채질해댄 꼴이 되었다.
물론 상처를 다스릴 줄 모르는 부모들도 아무 도움이 못 된다.
아이들은 어디에도 마음을 열어둘 곳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닫아걸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아마도 이런 문제제기를 한참 웃자라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제제기가 지나치게 어려운 비유로 둘러싸여 있다. 
조금 조숙하다 싶은 4학년 아이는 이 소설을 후딱 읽고나서도
별 재미가 없다는 말로 잘라 말했다. 
부피는 얄팍하지만 문제제기는 무거운 소설인데도
더는 생각을 열어놓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그건 생각의 힘이 아직 여물지 못한 아이들의 몫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쉽게 생각의 문을 열게 하는 작가의 몫이 아닐까. 
(하긴 여기 주인공들은 모두 6학년 13세 아이들.
4학년이면 아직 문제를 깨닫기에는 좀 이르긴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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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요 제12집 - 각종 창작동요제 수상곡 우리동요 시리즈 12
우리동요 사랑회 엮음 / 예성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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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책을 여러 권 사게 되면서 취향이 생긴다.
좋아하는 성향이 만들어지고, 좋아하는 작곡가나 작사가 부류가 생긴다.  

마냥 서정적인 가사보다는 논리가 있는 서정성이 마음에 와닿고,
추억을 떠올리는 어른이 개입된 아름다운 가사보다는
조금 유치해도 순진하고 귀여운 마음이 엿보이는 가사가 좋아진다.  
리듬도 그런 것이, 이건 동요예요, 라고 드러내는 선율보다는
뛰면서 부르고 싶거나 무릎이라도 치고 불러야 좋겠는 독특하고 재밌는 박자와 
물 흐르듯 이어지면서도 참신한 선율이 좋아진다.  

이 책에는 정말 최신이라고 할 수 있는 동요들이 실렸다.
동요의 흐름이 많이 달라지고 있지만 그래도 무턱대고 참신해지는 것보다는
동요의 기본을 토대로 한 동요를 부를 수 있는 게 좋은데,
그런 동요를 많이 발견할 수 있어 좋다.  
책 사이즈도 조금 큼직해져서 함께 나란히 놓고 보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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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16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인규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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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그림은 혁명의 주동자 아내가 손에 들고 있던 뜨게질이다.
그녀는 이 뜨게질 속에 혁명을 준비했다.
뜨게질의 문양은 복수해야 할 인물 같은 것을 암호로 만들어낸 것이다.
문양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원래의 실과 다른 색의 실이 끼여들어가야 할 것이다.
다른 색의 실 입장에서는 왜 이런 문양 속에 끼이는지 알지 못한다.
그건 뜨게질 주인의 몫. 바늘과 실에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치열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말려들어간 사람들은 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로지 그 역사의 장소에 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정한 수레바퀴에 말려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버리기엔 턱없이 불만족스럽다.
역사란 원래 그렇다니, 말도 안 된다.
사람이 자기의 의도와 관계없이 바늘 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종이인형처럼
배치된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소설 속에는 그냥 눈을 감았으면 그냥 모른 체했으면
원래의 실 속에 숨어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굳이 정의와 선의를 드러낸 것이 발목을 잡아채
눈에 띄는 문양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사람이 뜨게질 실과 다른 건,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오로지 그 장소에 있었기에 문양이 될 수도 있지만
사람이라 자기의 뜻에 따라서도 문양이 될 수도 있는 것.  

찰스 디킨스의 이 소설은 역사 속에서 선악이 뭉그러져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러니 말미에 부록으로 담은 여러 도움말처럼
우리의 4.19 혁명이나 광주민주화운동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나아가 피해자라고 마냥 선일 수는 없는 문제까지도 더듬어볼 수 있겠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면서 만들어내는 순환이랄까.
이를테면 역사의 희생자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는
엄청난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광주항쟁 속에 희생자가 광주시민뿐 아니라 광주를 학살하도록 지시받은
군인들까지 모두 해당되는 것처럼.  

원래 이런 축약본은 읽지 않는다.
어렸을 때 읽었던 걸리버 여행기를 오랜 시간이 흘러 원작으로 읽었을 때
마치 사기당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읽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원작소설은 수요자가 적어 금세 절판되는가 보다.
축약본은 마치 가려운 곳을 두툼한 천을 대고 긁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나마 이 책이라도 읽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것도 선택이겠다. 둔하게 긁을 바에 안 긁겠다, 와 둔하게라도 긁어야겠다, 의 선택.
후자였지만 그나마 찰스 디킨스의 이 대단한 소설을 읽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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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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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고니움을 키우면서 어찌나 귀엽게 자라는지 그 감상을 신나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걸 듣고서 누군가 이리 말했다. 어찌나 지엽말단적인 감상인지, 원...
워낙 그와 이 말 저 말 트고 지내는 터라 그리 화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당최 변하지 않는 그의 선입견은 괘씸했다.
그래서 내가 버럭 소리친 말은 이랬다.
뭐든지 사건은 지엽말단적인 데서 시작되는 거야! 

그가 동의하든 아니든 나는 그렇게 믿는다.
수습하기 힘든 사건도 실제로 그 시작은 구석진 데서 작고도 희미하게 시작되는 것이다.
소설은 그 구석진 곳에서 작고도 미비하게 시작되는 것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좋은 장치가 아닐까. 
그리고 김중혁의 소설도 내가 믿는 것에 맞춤하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어쩌다 내 생각에 맞았다는 거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죽는 건 억울하다,
뭐 이런 문장 하나로 목숨을 건사하게 된 청년이 있다.
그 문장에 대단한 힘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상황이 어땠느냐는 중요하다.
그는 교통사고로 몸이 부서지도록 붕 떠오른 상황에서 그 문장을 받아들였고,
결국 살아남았다. 그리고 급기야 그 문장이 자신을 살렸다고 믿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되기 위해, 그 후에 그가 보인 일련의 행동은
그다지 생각만큼 의미심장하지도 않다.
그는, 생각은 억울하니까 어쨌든, 하고 노력을 하고 싶었겠지만
사람 사는 일이 늘 그렇듯 생각과 행동은 일치되기 힘든 것.
그럼에도 시간이 의도와 다르게 묵묵히 흐르듯, 상황도 의도치 않게 흘러
그는 악기들의 도서관, 이란 걸 만들게 되었다.
어쩌면 악기들의 도서관, 이란 건 세상에 없어도 별 문제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이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 똑같이 처했다 해도
이 문장이 그를 살릴 것이라 장담은 못하겠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면 이렇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만들었으니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건 마찬가지지만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만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닌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만들었더라도, 그걸 만들며 기뻐하고 살아있음을 감사했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닐 것이다, 라고 나는 소설을 나 혼자서 마무리했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뭐 하나 재미없는 소설이 없다.
그 중에 가장 통렬하게(?) 재미있었다면, 내게는 <매뉴얼 제너레이션>. 
정말 매뉴얼처럼 기막히게 못 쓰는 책자가 있을까.
사용방법을 일러준다지만 매뉴얼로 통달하기에는 무리가 많으며,
그만큼 공을 들이고도 싶지 않다.
그래서 정말 제대로 된 매뉴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내게도 한때 있었다.
이 단편에는 제대로 됐다기보다는 그 자체로 감동이 있는 매뉴얼이 등장한다.
아무래도 작가는 시각보다는 청각과 촉각이 엄청 발달된 사람일 것이다.
그의 매뉴얼은 얼마나 귀엽게 상상이 되는지, 그 느낌을 전달받고는 감동마저 되는 것이다.
(그의 단편들도 거의 그랬다!)  

내가 귀엽게 열심히 자라는 싱고니움을 보며 가슴이 뛴 감동을
이 작가는 소설로 얘기해준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소설보다도 어쩌면 나름대로 열심히 혹은
나른하면서도 쉬지 않는 흐름을 가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존재들의 이야기가
감동은 더욱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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