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구판절판


마가렛 말러의 <유아의 심리적 탄생>에는 엄마가 곁을 떠나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아기가 거울 앞에 서서 종일토록 자기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사례가 나온다. 아기는 스스로를 달래면서 리비도를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자기를 달랜다는 개념을 도널드 위니콧은 ‘자기 안아주기’라고 표현한다. 엄마가 부재하는 아기는 안아주고 안길 대상을 잃은 후 양팔을 가슴에서 교차하여 스스로를 안아준다.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이기도 해서, 성인들도 자기를 안 듯 양팔을 가슴에서 교차시켜 팔짱을 끼곤 한다. 자기 안아주기든, 자기 달래기든 그것은 열정과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는 뜻이다.
리비도가 회수되어 자기를 향할 때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되는 시기를 거치게 된다. 한동안, 진심으로, 모든 관심과 열정을 자기 자신에게 쏟는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때는 심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성적으로도 강렬한 자기 성애적 특성이 나타난다. 상대로부터 거두어온 성적 에너지를 쏟아부을 새로운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그것이 자기 자신을 향해, 과도하게 향유되는 것이다. -123쪽

자살욕구는 자신을 벌주고 싶은 마음과 떠난 사람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남겨진 사람은 납득되지 않는 이별 앞에서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나르시시즘으로 미화된 이미지를 쏟아붓고 , 그 반대의 부족하고 못난 측면은 자신이 떠안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일부였던 대상이 사라졌으므로 내면의 일부분은 이미 죽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하여 자책과 죄의식 속에서 내면의 일부처럼 죽을 것인가, 혼자 남아 고통 속에서 계속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167쪽

사랑을 잃고 자기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일은 아주 쉽다. 에로스의 뒷면이 타나토스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주었던 에로스를 되돌려 받을 때 그것은 모양을 바꾸어 자기 파괴적인 욕망으로 변화한다. 리비도를 가만히 두면 자기 파괴적인 길로 접어드는 일은 당연한 수순같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파괴적으로 행동할 때조차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잃은 것을 되찾는 일, 떠난 사랑이 되돌아오는 일이다. 그 일은 어렵고 자기 파괴적 행동은 쉽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쉬운 해결책에 매달린다. 상대를 용서하는 일보다, 힘들게 애도작업을 진행하는 것보다, 강물에 뛰어드는 일은 쉽기에 유혹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 죽음을 향해가던 길을 멈추고 온 힘을 다해 삶 쪽으로 헤엄쳐 나와야 한다. -168쪽

슬픔의 유용성, 울음의 정화 기능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인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비극을 만들어 대중 앞에 공연하면서 관객들을 울게 만들었다. 한바탕 울고 나면 마음속에서 들끓던 야수 같고 어수선한 것들이 걷히면서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화가 찾아온다. 그럴 때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도 생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그 현상을 카타르시스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 211쪽

자기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내면에 깃든 묵은 상처를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노래한 기형도 시인은 놀라운 통찰력으로 애도와 치유의 핵심을 한 줄로 압축해낸 셈이다.
<애도>라는 책을 쓴 베레나 카스트는 "학대받는 아동이 갖게되는 예술 취향은 불행 속의 오아시스다"라고 말했다. 예술 취향과 내적 슬픔은 비례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 애도해야 할 것이 더 많이 쌓여 있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글쓰기, 그림그리기, 춤추기등 내면을 표현하는 모든 예술 행위가 동시에 마음을 치료하는 직접적인 방법들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동시대인들의 무의식적 집단 애도 작업을 대신하거나 도와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217쪽

비전에 대해 쓰기
그동안 애도 일지를 써왔다면 지금쯤 한번 읽어본다. 상실의 첫 순간에 비해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졌는지 알 수 있고, 그만큼 미래에 대해서도 낙관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는 애도작업이 끝난 후의 자기 모습, 앞으로의 목표나 비전 등에 대해서도 써본다. 두세 달 걸리는 단기 계획부터 한두 해 걸리는 장기 계획까지 어떤 것이든 좋다. 목표와 비전이 생의 추진력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기억한다.
-223쪽

정신분석을 받은 이후에야 독서행위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독서는 먹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처음에 독서는 우선 구강기 대체물이었을 것이다. 내가 책의 종류와 유형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던 것은 내 무의식 속 빈 공간이 그토록 크고 깊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228쪽

과거의 자기를 떠나보내는 일은 애도 작업이면서 동시에 변화와 성장의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과거의 자기를 죽이고 떠나보낸다. 알프레드 알바레즈는 <자살의 연구>에서 자신이 자살을 시도한 행위가 무의식적으로 "어른이 되기 위해 과거의 자기를 죽이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통찰해낸다.
-247쪽

모든이들로부터 배운다
정말 배울 점이 없는 사람조차 훌륭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떠난 이들을 내면화하여 자기 일부로 만들었다면 이제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부모의 지시에 따르는 태도, 연인에게 동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삶을 찾아 나선다.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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