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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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떤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라기 보다는 병에걸린 사람끼리 서로를 치료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것 같았다. 구경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탕한 기색은 전연 없고 자못 엄숙하고 심각했다. 동학란을 일으키기 직전, 사랑방에서 녹두장군의 열변을 듣고 있는 머슴들의 표정이 아마 이러했으리라... 다시 말해서 목숨을 걸어놓고 자기의 인생을 구원해보려는 자들이 가질 수 있는 표정들이었다.
-390쪽

서양의 고전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형의 얼굴엔 지성이 만들어준 표정이 있습니다. 개가 개를 알아보듯이 저는 얘기가 통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수 없는 사람을 가릴줄압니다...
-395쪽

그러나 도인으로서는 , 솔직히 말해서 그의 얘기가 단순한 신세타령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대중잡지 따위에도 그보다는 훨씬 고생한 사람들의 얘기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고생한 사람들이 있다고해서 그가 고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신세가 다른 사람의 관심속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자리잡을 수 있는가, 쯤은 대강이라도 알고 있어야 예의가 아닐까?
-398쪽

미국은, 아니 외국이면 어디라도 좋습니다만, 생각하기조차 싫은 자기의 어두운 과거를-그런 과거가 있는 사람은 말입니다-더이상 부채처럼 지고 살지 않아도 되는 곳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말하자면 외국으로 가서 산다는 것은 가톨릭신자의 고해성사와 같은 것이죠. -404쪽

물질적인 면에서 그런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자기의 능력을 사용했다고 해서 나무랄 수 있을까요? 사랑은 어쩌면 '사기詐欺'와 사촌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이 다른 점은 하나는 자기도 돕고 사랑하는 상대도 돕는 결과를 수반하게 되는데 다른 하나는 자기도 파멸하고 상대방도 골탕을 먹는다는 결과를 수반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406쪽

진정한 혁명에서는 그것을 지배했던 이성과 지성의 빛이 무엇보다도 두드러져 보이듯이 인간을 무더기로 도살했던 과거 역사적인 사람들에게 공통되게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정열이라고 도인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정열이란 말처럼 서먹서먹하고, 아니 두렵기까지 한 말은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속에서 정열을 제거해버리려고 노력해왔으며, 모든 사람들이 정열을 내세우지 말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화학기사의 입에서 '당신은 정열이 없어보인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도인은 이상스럽게도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정열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는 얘기에선 패배감조차 느꼈다...중략
아니다. 이제야 도인은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열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과도한 정열이, 또는 정열로 위장한 추잡한 욕망이 빚어내는 인간에 대한 과오를 경계한 나머지 이제 그에게는 이성과 지성에서 나온 판단을 밀고 나갈 힘이 되어줄 최소한의 정열조차 닳아 없어져버린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416-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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