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사람들은 제임스 맥더모트를 가리켜 내 애인이라고 했다. 신문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런 걸 그런 식으로 만천하에 공개하다니 구역질 나는 짓이다.
남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들 정말로 관심을 갖는 부분이 그런 남녀 관계다. 내가 누굴 죽였건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수십 명의 목을 땄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군인이 그랬다면 박수까지 보낸다. 내가 정말로 애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여부가 그들의 주요 관심사인데, 애인이었길 바라는지 아니었길바라는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한다.
- P44

특정 종류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절대 틀린 말을 하는 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방귀를 뀌는 법도 없다. 메리 휘트니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그런 사람들과 방에 있을 때 방귀 소리가 나면 너가 뀌었으려니 생각하는 게 맞아. 만약 자기가 뀐 게 아니더라도 입을 다물어야지, 그러지 않고 건방지게 굴었다가는 구둣발로 등짝을 얻어맞고 길거리로 쫓겨날 거야.
- P53

로 코나 어디 다른 곳을 파고 있을지도 몰라. 아무리 고상한 숙녀라도 기려우면 긁어야 할 거 아냐. 그리고 침대 밑으로 고개를 내민 뾰족구두 한 쌍이 보이기든 모르는 척하는 게 최고야. 이 사람들이 낮에는 신사 숙녀일지 몰라도 밤에는 하나같이 변변찮은 것들로 변하거든.
- P58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온다. 내 또래이거나 나이가 조금 더많아 보이는 젊은 남자이다. 여자의 경우에는 안 그렇지만 남자가그 나이면 젊다고 할 수 있다. 내 또래 여자는 노처녀로 분류되지만남자는 쉰이 넘어야 노총각 소리를 듣고, 메리 휘트니의 말에 따르면 남자는 쉰이 넘어도 여자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 - P59

사실은 먹는 동안 그가 날 쳐다보는 게 싫다. 내 허기진 모습을 보여 주기 싫다. 저들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게 있으면 알아내서 악용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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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96년이라고 말하면 나는 그를 돌아본다. 그 뒤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고 적지 않은 사건이 있었지만 1996년은 덜 삼킨덩어리처럼 목구멍 어디엔가 남아 있다. 오감이 다 동원된 물리적 기억으로. - P172

서수경과 나는 1996년의 고립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않았다. 각자가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를 말이다. 그 고립의 기억은 잊혀지지는 않고 다만 묻혀 있다가2008년 6월 10일, 광화문 대로에 명박산성이 등장했을 때와 2009년 1월 20일, 용산에서 남일당 건물이 불타오르기시작했을 때 구체적으로 환기되었다.
- P187

유레카. 고위 관리 중에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물리적으로 고립시키고, 폭력이라는 틀을 씌운다. 수단으로써 그것은 철저하고도 완전한 발견이었을 거야. 물리적 봉쇄와 이념적 봉쇄, 운동과 일상의 격리. 말하자면 일상적인것에서 정치적인 것의 ….… 박리, 뭐가 됐든 차벽이 그것을 완성시킬 것이다. 차벽은 말이지 차벽은…… 벽으로써 시위 관리에 동원되지만 시위대가 그것에 손을 대고흔들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더는 벽이 아니고 재산이되잖아. 국가의 재산, 시위대의 움직임은 가로막힌 길을뚫는 돌파 행위가 아니고 재산 손괴 행위가 된다. 관리자들이 행복해진다. 관리가 쉬워지니까. 더는 움직이지못하도록 막아둔 뒤, 시위대가 다녀간 자리에 남은 것들을 텔레비전이나 사진으로 대중에게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파손된 차벽과 도로에 널린 깨진 유리조각들을 부서진 재물, 재산을 운동이 아닌 관리자의 방향으로 대중의 공감이나 이입이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되도록 하는데에 재산 손괴 만큼 효과적인 광경도 없을 거라고 서수경은 말했다. 재산 손괴 장면은 종종 인명 손실 장면보다도 효과가 강하지. 왜냐하면 그 장면에 대한 이입이 훨씬 쉬우니까.
- P188

그렇지.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툴을 쥐지 못한 인간 역시 툴의 방식으로......
- P189

첫 장을 읽는 동안 아무런 매력을 발견할 수 없어 책장에 꽂아둔 채로 오래 묵은 책들,
흥미진진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어도 두번 세번 읽고 싶은 문장이 없는 책들, 저자의 말투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인문사회학서들, 그런 책들은 이 방 바깥으로 밀려나가 현관에 놓였다가 사라진다.
- P206

어떤 책을 남기고, 어떤 책을 버릴 것인가. 기준은 한가지다. 두번 읽고 싶은가? 간단한 질문이지만 대답에 이르는과정은 그다지 간단하지 않다. - P207

언제고 내가 내 책꽂이에 꽂을 이야기 한편을 완성할 수있을까.
- P208

어쨌거나 어머니가 모성을 말하고 아버지가 금기를 말하는 이야기는 싫다. 그런 이야기를 도취된 채로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어른도 싫다. 정진원은 그것보다는 좋은 이야기를 읽고 자랐으면 좋겠어. 왜냐하면독서의 경험이란 앞선 삶의 문장을, 즉 앞선 세대의 삶 형태들을 양손에 받아드는 경험이기도 하니까. 이 생각과유사한 문장을 나는 최근 어떤 책에서 보았고 그 책의 저자는 아마도 롤랑 바르뜨였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민음사 2015) - P211

한나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본 글에서 "아이히만에게서 서로긴밀히 연결된 세가지의 무능성을 언급" 한다. "말하기의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그것이다." (김선욱,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역자 서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한길사 2006)에서 ‘평범성‘으로 번역된 banality는 김학이 선생이 지적했던 것처럼 ‘평범성‘보다는 ‘상투성‘에 가까운말인 듯하다.("한국의 학자들 대부분은 ‘banality‘라는 단어를 ‘평범성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 아렌트는 1965년 증보판의 후기에 그 개념을 무사유‘로 해석했다. 여기서 무사유란 상투어만을사용하기에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하는, 그래서 얄팍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뻔하다는 것이다."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The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rs 1권 역자 서문, 개마고원 2008)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악의 어떤 측면은 평범성이라기보다는 상투성에 그 기원이 있을 것이다.
- P219

아버지는 이제 칠십대에 접어들었고 누군가가 식사를 차려주지 않으면 곤경에 빠지고, 어느 서랍에 자기 양말이와 노동자 혐오가 동시에 있고, 그보다 더 근본에는 약함을 혐오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고,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분노나 혐오에 종종 등장하곤 하는 말이 ‘권위도며 바지가 들었는지를 잘 모르고, 잘 씻지 않고, 아파도 시스로를 돌보지 않아서 어머니를 안달복달한 상태로 밀어넣고, 자신을 내버려둔다고 딸들을 원망하며 누군가를,
무언가를 혐오하는 데 전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젊음도 늙음도 혐오하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노조활동과 폭로와 노무현인데, 파업은 빨갱이 활동이고 삼성의 수십억원대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는 비열한 배신자이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당찮은 자리까지 올라간 범인이다. 막노동에 나보다 많이 버는 것들이 무슨 노조며 파업이냐,라는 그의 불쾌에는 노동 혐오 뭣도 없다‘라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노동자, 김용철, 노무현을 향한 그의 혐오는 같은 물줄기가 아닐까,라고 김 소리와 나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권위 없음을혐오한다. 그는 힘없음無力을 혐오한다. 그는 약함을 혐오한다.
아버지에게 힘이란 무엇이고 권위란 무엇일까. - P220

이렇게 가정해볼까. 아버지가 말하는 권위는 곧 힘이고힘이란 곧 누군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누가 들을까 두려워 급하게 자식의 입을 틀어막게 만든 힘, 그는 그런 힘을 경험했고 그것이 힘이라는 것을 알며 힘이란 곧 그게 되었다. 그게 없음을 그는 혐오한다. ‘권위 없음‘을 혐오한다. 누구도 ‘권위없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으므로 그는 자신의 권위 없음상태를 두려워한다. 그가 누군가의 ‘권위 없음‘을 비난할때 그에게는 그것을 하는 ‘권위‘가 있으므로 그는 힘없음을 힘껏 혐오한다…… - P222

딸들과의 관계에서 최근에 아버지가 가장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은 딸들이 자신을 더는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는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김소리와 내가 사회적 사건들에마음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마음을 못마땅해하면서 배덕과 배반을 말한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 탑승자들과 그 유가족들과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김소리와 내가 마음 쓰는 것을 두고 그는,
그는 우리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한다. 생판 남인 그 사람들에겐 그렇게 신경을 쓰면서 네 부모는 왜 돌보지 않냐. 도덕적으로 그건 문제, 이율배반, 배반 아니냐. 너희들 앞마당부터 쓸어라.
그가 말하는 앞마당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당신의 앞마당이라는 점을 우리가 눈치챘다는 것을 그에게 말해야 할까? 아버지는 자신의 농담에 일일이 정색을 하고, 아빠 불쌍하지,라는 물음에 더는 대답하지 않고, 다정하지 않고,
자주 화를 내곤 하는 딸들에게 이제 화가 났으며 어머니를 통해 그 화를 주기적으로 통지한다. 너희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가 말했다.
지만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나 그의 용서가 ….… 우리에겐 그의 용서가 이미 필요하지 않다. 그가 그것을 모른다.
는 것과, 알아도 인정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 이렇게 앉아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할 때,
김소리나 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종종 서글프다.
- P224

그는 김소리에게 부끄러움을가지라고 말했지만 당시에 김소리가 가진 것은 수치심이었고 경멸감이었지. 그는 김소리에게 어른을 요구했지만그 자신도 김소리에게는 어른이었으면서, 그는 김소리의아무것에도, 김소리의 어른 됨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비난만 하고 갔어. 그의 어른 됨은 김소리를 관찰하고김소리를 판단하고 사후에 다가와 비난할 때에만 유용하게 작동했는데, 어른 됨이 그런 것이라면 너무 편리하고 야비하지 않나? - P240

그 아이들이 김소리에게 받은 것과 김소리가 그 수학선갱에게 받은 것이 다를 바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수치심. 모멸감, 자신을향한 남의 경멸감, 어른의 재료가…… 그런 것일 수 있지.
하지만 ‘나를 목격하고 있는 이 사람이 빨리 내 눈앞에서사라졌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는 계기라는 것을 그런 감정과 우연한 경험의 조합으로 받곤 하는 삶에 나타나는 어른이란 어떤 인간일까……를 생각하느라고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아니야 실은 하필 그런 일을 겪고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이 김소리, 내 동생이었다는 점이 속상해 나는그 선생을 도저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고.
- P241

"산다는 것은 말하는 것입니다. (…) 산다는 것은 (...)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것입니다." 나는 이 문장들을 롤랑 바르뜨의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La Préparation du roman / et II에서 발견했고그 아름다운 문장들을 발견한 뒤로 읽는 속도를 늦추고늦춰 일년째 같은 책을 읽고 있다. - P242

나는 궁금하다. 그렇게 묻는 우리의 이웃은 그것이 정말너희가 무슨 관계인가.
궁금할까? 그 궁금함‘의 앞과 뒤에는 어떤 생각이 있을까, 그것은 생각일까? 예컨대 너희가 무슨 관계냐는 질문을 받을 때 서수경과 나는 우리의 대답으로 (우리가 대답을 하건 하지 않건) 우리가 또는 우리 각자가 대면할 수 있는 위협을 생각하고, 질문자와의 관계 변화를 생각하고, 그 질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대답 이후까지를 찰나에 상상하는데 우리에게 질문한 이웃도 그 정도는 생각했을까?
- P262

‘상식적으로‘ 에서 상식은 뭘까? 그것은 생각일까? 사람들이 자기 상식을 말할 때 많은 경우 그것을 자기 생각이라고 믿으니 그것은 생각일까. 아니야 common sense 니까 세계에 대한 감이잖아, 그것이 그러할 것이라는 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해제를 쓴 정화열 선생은 상식을 ‘사유의 양식‘이라고 칭하며 그것을 감각에 바탕을 둔 사유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상식, 또는 공통감sensus communis 이란 아무래도 ‘생각‘인 모양이고, 다시 그를 인용하자면 서수경에게 적용되었다는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본래의 상식, 즉 사유의 한 양식이라기보다는 그 사유의 무능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가 상식을 말할 때 어떤 생각을 말하는 상태라기보다는 바로 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역시 생각은 아닌 듯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다가,라고 말하는 순간에 실은 얼마나 자주 생각을…… 사리분별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지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상식,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건 상식이지, 라고 말할 때 우리가 배제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너와 나의 상식이 다를 수 있으며 내가 주장하는 상식으로  네가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가정조차 하질 않잖아. 그럴 때의 상식이란 감도 생각도 아니고.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는 것이고 저 이야기는 저렇게 그저 끝나는 것이라는 관습적 판단일 뿐 아닐까.
- P264

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는 그가 생각하지 않는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당신은 방금 너무 적나라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그렇지. 적나라赤裸裸, 그 광경은 마치 투명한 창을 통해 보이는 남의집 베란다처럼…… 우리는 왜 때때로 베란다를 청소하듯 그것을 점검해보지 않는 것일까. 모조리 끄집어내서 거기뭐가 쌓였는지도 확인을 좀 해보고 먼지도 털어보고 곰팡이 끼거나 망가진 것은 닦거나 내다버리고 하면서 정리도다시 해보고 새로운 질서로 쌓아보거나……… 하지를 않는걸까 좀처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 P266

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
나는 그 태도를 묵자墨字의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 P267

서수경과 나는 그런 질문을 가진 뒤에야 비맹인이 사용하는 글자를 일컫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맹인이 사용하는 글자를 점자라고 칭하는 것처럼 비맹인이 사용하는글자를 일컫는 말이 있으며 그 말이 묵자墨字라는 것을 그때에서야.  - P273

서수경과 나는 사십여년을 사는 내내 그 말을 몰랐던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를 둘러싼기록문자들, 우리가 보는 언어들이 전부 묵자인데 그것을묵자라고 칭한다는 것을 우리는 왜 몰랐을까.
- P273

우리는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묵자의 상태가 상식이라서 그걸 부를 필요도 없어, 그것이 너무 당연해 우리는 그것을 지칭조차 하지 않는다.
- P274

토요일 오전 열한시라는 묵자의 세계를 사는 사람은 묵자를 읽지 못하는 누군가가 용산역 1번 플랫폼에도 있을 수있으며 그가 동행인 없이 홀로 서서 열차를 기다릴 수도있는 상황을 가정하지 않는다. 보는 이는 보지 못하는 이를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는 이가 왜 거기 있는가? 그는고려되지 않는다. 용산역 1번 플랫폼의 상식에 그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거기 없다…… 나는 아직 그것을 볼 수있었으므로 거기 있었지만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상식의세계라는 묵자의 플랫폼에서, 다시 한번.
- P275

 공중변소를 나오는 길에누군가 그에게,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그들이, 그러니까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우리가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라고 울직하게 묻자 토슨트는 완고하고도 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위 캔트, 저지 뎀We can‘t judge them.
그 말은 내게 주문처럼 들렸다.
아마도 그는 그 장소에서 그 대답을 반복해왔을 거라고서수경은 말했다. 사람들이 자꾸 물을 테니까. 거길 방문하는 세계인들이. 그렇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즉시 대답할 수 있었겠지. 우리는 그들을 재단할 수 없어.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 몇번이고 반복된 질문에 훈련되고준비된 표정과 어조, 그런데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상투어가 아닐까? 2013년의 비르케나우에서 우리가 들은 대답은 한나 아렌트가 "두려운 교훈" 이라고 한 그것, 말과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상투성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두었을까...
- P282

매번 집회의 평화적 측면을 강조하는 분위기도 나는 불편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평화적 시위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은 서수경과 내게 거의 강박처럼 보였다. 광장이나 여론이 모이는 곳에서 종종 보이곤 하는,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착한 시민이라는 자부가 우리는 불편했다. 착한 시민의 정상적 시위와 착하지 않은 시민의 비정상적 시위가 이렇게 나뉘는 것일까세월호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들은 지난 3년 내내 착하지 않은 시민이었다는 말인가......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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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현대인이 성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문화적 참여에 스스로 각주를 다는 능력 덕분이라고 월러스가 말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즉문화적 참여를 결정하거나 그것을 변경 또는 취소하는 능력 덕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에게 가장 성스러운 참여는 참여를선택하는 자유이다. 그리고 이미 선택한 것을 다시 선택하지 않는자유이다.
- P54

칙릿과 전위문학 사이에는 측정하기 힘든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버트가 글쓰기에 매달리게 된 동기는 월러스가 가졌던 것과 동일한 인간적 욕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렇게 설명한다.
"글쓰기는 언제나 인생을 번역하는 나만의 특수한 방법이었습니다.
스쳐가는 것으로부터 경험을 찾아내고 그것을 소화시켜 현실로 만드는 나만의 방법이었습니다. - P58

우리가 사는 세계는 하루 250개의 광고와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오락거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저는 꽤 많은 대중적인 소재를소설에 이용해 왔지만, 그것을 통해 제가 전하려는 의미는, 다른 사람들이 나무나 공원에 대해 글을 쓰거나 100년 전 물을 뜨러 강에 가면서 생각하던 것과 아무것도 다를 게 없습니다. 그저 내가 사는 세계의 직조를 보여주려는 거죠.
- P59

아마 우리 대부분은 이 시대가 어둡고 어리석은 시대라는 점에 동의할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얼마나 어둡고 어리석은지를 그저 극화해서 보여주는 그런 소설이 필요할까요? 어두운 시대에서 좋은 예술에 대한 정의는, 시대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고빛을 내는 인간적이고 마법적인 요소들에 대해 심폐소생술을 가해주는 그런 예술일 겁니다. 어떤 소설이든 하고 싶은 대로 어두운 세계관을 가질 수 있지만, 정말로 좋은 소설이란 이런 세계를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살아있는 인간 존재를 위한 가능성에 빛을 비춰주는 소설일 겁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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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를 만난 이후로는 dd가 d의 신성한 것이 되었다. dd는d에게 계속되어야 하는 말, 처음 만난 상태 그대로, 온전해야 하는 몸이었다. d는 dd를 만나 자신의 노동이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d를 이따금 성가시게 했던 세계의 잡음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행복해지자고 d는 생각했다.
더 행복해지자. 그들이 공유하는 생활의 부족함, 남루함,
고단함, 그럼에도 주고받을 수 있는 미소, 공감할 수 있는유머와 슬픔, 서로의 뼈마디를 감각할 수 있는 손깍지, 쓰다듬을 수 있는 따뜻한 뒤통수…… 어깨를 주무르고, 작고 평범한 색을 띠고 있는 귀를 손으로 감싸고, 따뜻한 목에 입술을 대고, 추운 날엔 외투를 입는 것을 서로 거들며,
dd의 행복과 더불어, 행복해지자.
- P18

그것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dd는 잠시 외출한 것 같았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혹은 며칠 뒤, 아무렇지 않게 이 공간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것은 언제일까. 지금이 아니고 아직은 아니지만 다음에서 다음으로 건너가는 지금이자 다음. d는 매 순간 벅차게 그 순간을 실감했고 매 순간 그 실감을 배반당했다.
사물들은 그런 착각을, 나중에 몇배나 되는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돌아오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d는 물건을 버리며 그 기만적인 기대와 거짓된 실감을 버렸다.
- P23

오디오 팔던 사람들, 부품상들, 도란스 기술자, 스피커 제조업자, 진짜와 똑같이 로고 라벨을 만드는 기술이 있던 노인들, 다른 기술자들. 그와 같은 공간에서 한 시절을 겪은 사람들. 그들이 다 어디갔느냐고? 여소녀는 그 질문을 돌이킬 때마다 그들의 부재와 자신의 잔여와 이제 닥쳐올 자신의 부재를 한꺼번에생각했다. 그렇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여소녀는 머쓱하게외로워졌다. 내내 고장 난 기계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가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그의 수리실은 세상 적막한 곳에당도해 있었다. 인기척 없는 황무지 기슭에.
- P54

그러나 여기 이렇게 균열들이 있다. 멀쩡하다는 것과 더는 멀쩡하지 않게 되는 순간은 앞면과 뒷면일 뿐. 언젠가는 뒤집어진다. 믿음은 뒤집어지고, 거기서 쏟아져 내린것으로 사람들의 얼굴은 지저분해질 것이다. - P69

여소녀는 일주일 전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구조물을생각했다. 수요일이었다. 출근하고 보니 5층 홀에 기묘한것이 있었다. 모니터며 선풍기며 낡은 전화기, 구멍 뚫린스피커 같은 고철과 고물이 홀 중앙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 이끼와 꽃나무 가지가 그 사이사이를 장식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용 전구를 단 줄들이 천장 어딘가에 연결된 채 구조물 위로 늘어져 있었고 높고 투명한 천장이 그것 위로 뿌연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여소녀는 즉시서낭당을 떠올렸다. 정체불명의 거대한 생물이 고물상을 삼킨 뒤 밤새 싸둔 똥 무더기 같기도 했다. 저것이 무엇인가…... 떼를 입힌 것을 보니…… 만들다 만 무덤 같기도했다. 남의 마당에 저런 것을 만들어두고 뭘 하자는 것인가...... - P95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번 것을 비롯해 도시의 이름으로계획되는 프로젝트는 여소녀에겐 음모이자 꿍꿍이일 뿐이었다. 공적 기관의 예산이 책정되고 집행되는 프로젝트일 뿐, 나와는 무관한, 어디까지나 내가 소외된 상태로 전개되는, 언제나와 같이. 그 상징물에 여소녀라는 맥락이없었다. 564호와 568호, 531호, 540호, 536호의 맥락도 없었다. 그들은 그 맥락을 몰랐다. 그러니 남의 마당에 서낭당 같은 것을 만들어두는 것 아닌가…… 귀신을 쫓듯. 내가 귀신이여?
- P97

d는 박조배를 돌아보았다. 매연 때문에 눈이 몹시 빽빽했다. 유사시라는 말은 비상한 일이 벌어지는 때라는 뜻인데 비상한 일은 늘 일상에서 조짐을 보이게 마련이라고박조배는 말했다. 갑자기……라는 것은 실은 그다지 갑자기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불시에……라는 것은 내 생각에.…… 우리가 모르는 척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 일상을 말이다.
일상에 조짐이 다 있잖아. 전쟁을 봐라. 맥락 없는 전쟁이없고……… 방사능도 마찬가지, 원전이라는 조짐이 있으니까 유출도 있는 거잖아, 지금도 그렇다. 내게는 언제나 지금이 그래…… 지금은 꼭 전간기 같다. 1차대전과 2차대전, 두개의 거대 전쟁 사이에 조짐이 아주 충만했지. 그런조짐을 느껴. - P129

모르겠다고 d는 대답할 수도 있었다. 모르겠는데 실은 모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왜 함께 오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너무 하찮기 때문이라고,
나도 dd도 그리고 당신도, 우리가 너무 하찮아서, 충돌 한번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 P139

d는 눈을 뗄 수가없어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너무 쉽게 깨지거나 터질 수있는 사물, 그 진공을 통과한 소리들에도 잡음이 섞여 있었다. d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얇은 유리 껍질 속 진공을 들여다보며 수일 전 박조배와 머물렀던 공간을 생각했다. 그 진공을, 그것은 넓고 어둡고 고요하게 정지해 있었으나 이 작고 사소한 진공은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져있었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선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愛人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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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렇다고 알고 살았던 사람이 ‘원래‘라는 것은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 P273

우미의 가슴속에는 분노로 키운 맹수 한 마리가 있다. 언제든 표적이 나타나면 급소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 단박에 숨을 끊을 수 있도록 거칠게 단련시켰다. 발톱은 금세 날카로워졌고 가두어 놓기 어려울 정도로 공격성이 자랐다. 안에서 종종 우미를 할퀴기도 했다. 그런데지금, 그 사납던 짐승이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린다. 우미는 맹수를 키운 힘이 분노가 아니라 외로움이었다는것을 알았다.
- P277

"선생님은요?"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리 없더라고요. - P283

봄이 아련한 줄 몰랐고 여름이 반짝이는 줄 몰랐다. 가을이 따사로운 줄 몰랐고 겨울이 은은한 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이렇게는, 살았다고 할 수 없겠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겠지. 진경은 혼자 중얼거렸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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