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를 만난 이후로는 dd가 d의 신성한 것이 되었다. dd는d에게 계속되어야 하는 말, 처음 만난 상태 그대로, 온전해야 하는 몸이었다. d는 dd를 만나 자신의 노동이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d를 이따금 성가시게 했던 세계의 잡음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행복해지자고 d는 생각했다. 더 행복해지자. 그들이 공유하는 생활의 부족함, 남루함, 고단함, 그럼에도 주고받을 수 있는 미소, 공감할 수 있는유머와 슬픔, 서로의 뼈마디를 감각할 수 있는 손깍지, 쓰다듬을 수 있는 따뜻한 뒤통수…… 어깨를 주무르고, 작고 평범한 색을 띠고 있는 귀를 손으로 감싸고, 따뜻한 목에 입술을 대고, 추운 날엔 외투를 입는 것을 서로 거들며, dd의 행복과 더불어, 행복해지자. - P18
그것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dd는 잠시 외출한 것 같았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 혹은 며칠 뒤, 아무렇지 않게 이 공간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그것은 언제일까. 지금이 아니고 아직은 아니지만 다음에서 다음으로 건너가는 지금이자 다음. d는 매 순간 벅차게 그 순간을 실감했고 매 순간 그 실감을 배반당했다. 사물들은 그런 착각을, 나중에 몇배나 되는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돌아오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d는 물건을 버리며 그 기만적인 기대와 거짓된 실감을 버렸다. - P23
오디오 팔던 사람들, 부품상들, 도란스 기술자, 스피커 제조업자, 진짜와 똑같이 로고 라벨을 만드는 기술이 있던 노인들, 다른 기술자들. 그와 같은 공간에서 한 시절을 겪은 사람들. 그들이 다 어디갔느냐고? 여소녀는 그 질문을 돌이킬 때마다 그들의 부재와 자신의 잔여와 이제 닥쳐올 자신의 부재를 한꺼번에생각했다. 그렇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여소녀는 머쓱하게외로워졌다. 내내 고장 난 기계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가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그의 수리실은 세상 적막한 곳에당도해 있었다. 인기척 없는 황무지 기슭에. - P54
그러나 여기 이렇게 균열들이 있다. 멀쩡하다는 것과 더는 멀쩡하지 않게 되는 순간은 앞면과 뒷면일 뿐. 언젠가는 뒤집어진다. 믿음은 뒤집어지고, 거기서 쏟아져 내린것으로 사람들의 얼굴은 지저분해질 것이다. - P69
여소녀는 일주일 전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구조물을생각했다. 수요일이었다. 출근하고 보니 5층 홀에 기묘한것이 있었다. 모니터며 선풍기며 낡은 전화기, 구멍 뚫린스피커 같은 고철과 고물이 홀 중앙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 이끼와 꽃나무 가지가 그 사이사이를 장식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용 전구를 단 줄들이 천장 어딘가에 연결된 채 구조물 위로 늘어져 있었고 높고 투명한 천장이 그것 위로 뿌연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여소녀는 즉시서낭당을 떠올렸다. 정체불명의 거대한 생물이 고물상을 삼킨 뒤 밤새 싸둔 똥 무더기 같기도 했다. 저것이 무엇인가…... 떼를 입힌 것을 보니…… 만들다 만 무덤 같기도했다. 남의 마당에 저런 것을 만들어두고 뭘 하자는 것인가...... - P95
드문 일은 아니었다. 이번 것을 비롯해 도시의 이름으로계획되는 프로젝트는 여소녀에겐 음모이자 꿍꿍이일 뿐이었다. 공적 기관의 예산이 책정되고 집행되는 프로젝트일 뿐, 나와는 무관한, 어디까지나 내가 소외된 상태로 전개되는, 언제나와 같이. 그 상징물에 여소녀라는 맥락이없었다. 564호와 568호, 531호, 540호, 536호의 맥락도 없었다. 그들은 그 맥락을 몰랐다. 그러니 남의 마당에 서낭당 같은 것을 만들어두는 것 아닌가…… 귀신을 쫓듯. 내가 귀신이여? - P97
d는 박조배를 돌아보았다. 매연 때문에 눈이 몹시 빽빽했다. 유사시라는 말은 비상한 일이 벌어지는 때라는 뜻인데 비상한 일은 늘 일상에서 조짐을 보이게 마련이라고박조배는 말했다. 갑자기……라는 것은 실은 그다지 갑자기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불시에……라는 것은 내 생각에.…… 우리가 모르는 척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 일상을 말이다. 일상에 조짐이 다 있잖아. 전쟁을 봐라. 맥락 없는 전쟁이없고……… 방사능도 마찬가지, 원전이라는 조짐이 있으니까 유출도 있는 거잖아, 지금도 그렇다. 내게는 언제나 지금이 그래…… 지금은 꼭 전간기 같다. 1차대전과 2차대전, 두개의 거대 전쟁 사이에 조짐이 아주 충만했지. 그런조짐을 느껴. - P129
모르겠다고 d는 대답할 수도 있었다. 모르겠는데 실은 모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왜 함께 오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너무 하찮기 때문이라고, 나도 dd도 그리고 당신도, 우리가 너무 하찮아서, 충돌 한번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 P139
d는 눈을 뗄 수가없어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너무 쉽게 깨지거나 터질 수있는 사물, 그 진공을 통과한 소리들에도 잡음이 섞여 있었다. d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얇은 유리 껍질 속 진공을 들여다보며 수일 전 박조배와 머물렀던 공간을 생각했다. 그 진공을, 그것은 넓고 어둡고 고요하게 정지해 있었으나 이 작고 사소한 진공은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져있었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선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愛人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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