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감옥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야시]로 강한 인상을 준 신진 작가 쓰네카와 고타로의 두번째 단편집이다.

   세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가을의 감옥] 외 [神家沒落], [환상은 밤에 성장한다] 라는 제목이다.

   가을의 감옥 :: 루프를 소재로 드라마에 촛점을 둔 전기담


   이것은 11월 7일 수요일의 이야기다.

   라는 한줄로 시작한다. 과연 그런 이야기다.
   평범한 여대생 '아이'는 어느날 정체모를 오한을 느끼고 잠이 든다. 이튿날 눈을 떠 보니 어제인 11월 7일이 계속되고 있다.
   그 이튿날도, 모레도,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11월 7일.
   [사랑의 블랙홀] 같은 영화에서의 루프는 '사랑을 성취한다'는 목표가 있었지만 아이에게는 딱히 해야 할 일이 없다.
   무료하고 고독하게 문자 그대로 반복되는 나날을 보내던 아이는 자신과 같은 날에 갇힌 사람들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루프를 되풀이하는 횟수는 각자 다르지만, 대부분 나름대로 낙관적인 태도로 사태에 대처하고 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만나 삶의 활력을 찾은 아이는, 어느날 루프에 갇힌 동류의 눈에만 보이는 "북풍백작"이라는 것에 대해 듣는다. 북풍백작이야말로 루프를 일으킨 장본인이며, 한편에선 그 정체는 신의 사자로서 자신에게 시련을 주고 있는 거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에선 무언가 사악한 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의혹이 있다.
   그러던 중 루프하던 동료들이 하나 둘 사라진다. 북풍백작의 짓이다. 
   실종자들은 '시련'을 클리어하고 드디어 11월 8일의 세계로 나간 것일까. 아니면 좀 더 무서운 진실이 있는 걸까.
  
   이런 식의 딱 보기에도 전기담스러운 이야기인데, '루프'라는 소재를 빌어 결국에는 '아이'와 그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야기의 완성도도, 분위기도 멋지다.
   쓰네카와 고타로의 문체는 어딘지 오츠 이치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오츠 이치보다 감정의 호소가 좀 더 무겁고 끈적한 느낌이다. 
   불길한 동화와도 같이 몽환적이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로, '가을의 감옥'이라는 제목이 주는 감상과 어울려 여운이 남는다.

   신가몰락 :: 이동하는 집에 갇히다

   주인공 '나'는 어느날 집 근처를 산책하다가 수상한 초가집을 발견한다. 마당 안에 들어가자 "오키나(노인)" 탈을 쓴 남자가 맞이한다. '오키나'는 자기 대신 이 집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더니, 검은 연기가 되어 증발한다.
   나는 당황하여 마당 밖으로 나가려 하나, 보이지 않는 힘이 장벽처럼 작용하고 있다. 나는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자유지만, 나갈 때는 반드시 집 안에 주인 역할을 할 한 사람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집은 일정 주기로 일본 이곳 저곳을 이동하며 출몰한다. '나'는 이동할 때마다 주변이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이는 것을 인식한다. 
   주인공은 자신 대신 집 안에 사로잡혀 줄 누군가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가까이 오더라도 집을 인식하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 
   좀 더 사람들이 잘 들어오도록 "찻집" 간판까지 걸며 기다린다. 그러던 중 가끔씩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나 선대의 '오키나' 와 알던 사람들이 찾아오나, 마음 약한 나는 차를 대접하고 돌려보낸다.
   어느 날, 젊은 남자가 찾아온다. 그의 상쾌하고 낙관적인 태도에 나는 그에게 집을 맡길 결심을 한다. 
   그러나 훗날 나는 어떤 살인사건의 정보를 접하고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게 된다.

   다소의 미스터리 요소가 장치된 전기담이다.
   '움직이는 집'이라는 소재가 왠지 만화 '충사'를 떠올리게 한다. 분위기도 약간은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평온하게 이어지던 전개가 아이러니컬한 결말을 향해 수축하기 시작하는 무렵부터가 마음에 든다. 
   이 소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악한 인간'이 등장한다. 선과 악을 초월한 '신의 집'과 대비되어 기묘한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환상은 밤에 성장한다 :: 씁쓸한 환상이야기

   "환시"의 능력을 가진 여성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리오는 어릴 적 강한 환술 능력을 가진 할머니로부터 능력을 전수받았다. 그것은 작은 조약돌을 살아있는 새나 개구리 따위로 보이게 하는 능력이다.
   리오와 할머니는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같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할머니에게 앙심을 품은 남자중학생들의 방화로 집과 할머니를 잃는다.
   그리고 리오는 '원래 부모'를 찾는데, 그들에 의하면 리오가 할머니라고 알던 인물은 육친이 아니었다고 한다.
   성장하며 리오의 환시 능력은 점점 강해진다. 고등학생이 된 리오는 우연히 어릴 적 할머니 집의 방화에 관계한 아이를 만나고, 환시로 위협하여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묻는다.
   놀랍게도 그때 방화를 실행한 세 명의 남자아이들이 괴한에게 살해당했음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 괴한은 옛날에 할머니와 장기를 두며 친하게 지내던 아저씨였다.
   복수심도 사그라들어, 리오는 조용히 지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빵집에서 일하던 중 미대생 남자친구와 만나, 마을 단위의 환술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그녀가 보인 아름다운 환상에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리오를 떠난다.
   의기소침한 리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어릴 적 할머니의 지인이며 어떤 컬트 교단의 관계자인 모모세라는 남자였다.

   이쯤 되면 이 작품에서 쓰인 메인 아이템이랄지 장치들이 거의 배경 장치의 수준에 머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클라이막스를 연출하는 것과는 큰 연관이 없다.
   중심에 있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관계, 심리, 나아가서 인생 이야기다. 이 마지막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특별하고 싶지 않았던 리오라는 여성의 인생 이야기다.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맛이 나쁜 이야기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작품의 진미라고 할 수 있겠다. 
    
 
   세 작품이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느낌을 주지만 소탈한 문체 때문에 신파스럽지는 않다. 민담이나 동화를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가공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야시]에서의 환상적이고도 인륜을 초월한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이 작품집에서도 비슷한 정서가 연장되고 있다.
   게다가 완급 조절 감각이 굉장히 좋다. 자칫 축축 늘어진 밋밋한 이야기가 될 것들에 우아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솜씨가 절묘하다. 데뷔작으로 큰 상 받은 솜씨가 어디 가는 게 아니구나, 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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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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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컬처
캐서린 스푸너 지음, 곽재은 옮김 / 사문난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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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 분석의 기예
이상하.조관형 지음 / 파워LEET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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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천재로 만드는 독서법
서상훈 지음 / 지상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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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토닉 체인 - 맑음 때때로 여고생, Extreme Novel
와타나베 코지 지음, 오카자키 타케시 그림, 천강원 옮김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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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오, 역시 기대한 만큼은 재밌다.
  연작 단편집인 줄 알았는데, 장편이다. 부제? 인 "맑음, 때때로 여고생"은 알고보면 엄청 끔찍한 의미다. 


   배경은 근미래(?) 시부야. 여고생들 사이에서 시부야의 랜드마크 '스카이튜브 21' 빌딩을 둘러싼 기묘한 소문이 유행한다. 48층짜리인 그 건물이 알고보면 49층이며, 실제로 세어서 진실을 안 사람에겐 저주가 내린다는 것. 전형적인 도시괴담인 '유령 빌딩 괴담'은 '행운의 편지' 식의 휴대폰 체인 메일로 퍼져나간다. 
   여고생 카야노에게 어느날 예의 메일이 도착한다. 호기심을 누르지 못한 카야노는 빌딩의 층수를 세어보고, 그것이 정말로 49층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그때 도착하는 정체불명의 메일에는 "당신은 저주받았다"는 한줄. 그리고 화창한 시부야의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니, 그것은 비가 아니라 갈기갈기 찢긴 시체 조각들이었다. 
   피와 살점의 비가 내린 후 카야노는 실종된다. 카야노의 친구 리카가 행방을 찾기 시작하자, 곧 나루미라는 이상한 소녀가 접근해 온다. 나루미는 모든 컴퓨터 네트워크를 침입하여 어떤 정보든 원하는 이에게 무상으로 제공해주는 천재 해커 '플라토닉 체인'과 접촉할 수 있다. 플라토닉 체인의 정보로 그녀는 통해 '혈우血雨'로 내린 것은 모두 시부야에서 실종된 여고생의 시체이며, 그녀들이 카야노처럼 빌딩 괴담 메일을 받은 후 정체를 감추었음을 알아낸다. '혈우'와 '괴담'은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리카는 친구를 찾기 위해, 나루미는 친구의 귀를 되찾기 위해(!) 이해할 수 없는 엽기(괴기)현상에 도전한다.


   라는 발단으로 꾸려나가는 이야기인데, 역시 만화판 플라체만큼이나 황당하다. 도시전설의 기괴망측함에 하이테크놀러지의 경이감(?)을 여고생스런 즉물적인 감성으로 버무려내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다. 
   나 스스로는 황당한 가운데 핍진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의 숨은 테마는 과도발달된 기술문명에 의해 변화한 인간성과 생사관이다. 플라체가 그려내는 '변화된 인간과 생사'의 모습에서 나는 미래 예측적인 상쾌한 힘을 느낀다.
   와타나베 코지는 원래 게임 디자이너여서 그런지 소위 게임적 리얼리즘에 대한 인식수준이 높은 듯하다. 작품 안에서 막나가는 위기와 마주하는 여고생들은 "어려운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클리어 해 주겠어!" 라는 자세로 임하는데, 이것은 작가의 게임적인 현실인식(리얼리즘)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뭐 잡다한 얘기 해봐야 거시기하니 한마디로 줄이자면 "재밌다". 만화적/게임적 리얼리티에 거부감 없는 분께 추천. 만화판 플라체를 재미있게 본 사람에게는 필구 독촉(...). 하지만 이 재미는 세계관과 기이한 발상이 주는 재미가 많다. 플롯이나 디테일은 매우 단순한 편이고, 이 한 권에서는 미처 설명되지 못한 부분도 있으니 엄격한 소설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추천하기 꺼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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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코지 하악하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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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 장인
유시진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8년 12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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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토닉 체인 1
와타나베 코지 지음, 토노 야마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9월
3,500원 → 3,150원(10%할인) / 마일리지 170원(5% 적립)
2008년 09월 28일에 저장
품절
플라토닉 체인 2
와타나베 코지 지음, 토노 야마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10월
3,500원 → 3,150원(10%할인) / 마일리지 170원(5% 적립)
2008년 09월 28일에 저장
품절
플라토닉 체인 3
와타나베 코지 지음, 토노 야마 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11월
3,500원 → 3,150원(10%할인) / 마일리지 170원(5% 적립)
2008년 09월 28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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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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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블로그 등에서 이 책의 리뷰를 찾는 분은 주의하시길. 아니, 리뷰 보지 마세요(...). 저 막 리뷰 찾아 다니다가 스포일러 막 당했습니다. 이 책의 클라이막스인 반전은 물론 이중반전이고 뭐고 다 까발리면 어쩌자는 건지.
물론 제 리뷰는 믿으셔도 됩니다! 안심 안심!

 

   생소한 이탈리아 작가의 86년작이라는 사실만 놓고 보면 그다지 매력이 없다. 이 책을 선택하게 만드는 동인은 이야기의 모티프가 된 [데카메론](혹은 [천일야화]) 이나 "사형 전날 밤의 진실 게임" 이라는 상황설정에 있을 것이다.
   왕의 폭정에 시달리는 19세기 초의 이탈리아. 민중 선동과 국왕 암살 미수라는 죄목으로 수감된 네 명의 죄수가 사형일을 하루 앞두고 하나의 제안을 받는다. "총잡이"라는 별명을 가진 왕당파 콘살보 데 리티스 사령관이 그들의 감방에 상자와 네 장의 종이를 놓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여기에 너희 지도자인 '불멸의 신'의 정체를 쓰면 너희는 사면될 것이다. 너희 중 한 명이 털어놓아도 모두 사면이다. 그러나 모두가 침묵을 지킨다면 예정대로 아침에 참수형이 집행될 것이다."
   남작 콜라도 "디디모" 인가푸, 자칭 시인 살림베니, 군인 아제실리오, 그리고 학생 나르치스는 교묘한 덫이 장치된 리티스 사령관의 제안에 신념과 죽음의 공포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것은 역시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같은 방에 수감된 '대 도적' 치릴로 수도사. 그는 남작이 문득 "[데카메론]처럼 우리도 각자 하나씩 자기 이야기를 해 보자"고 제안하자 한번 해 보라고 그들을 부추기고, 현란하고도 박학하며 냉소적인 논평으로 그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윽고 그들의 짧은 밤은 각자의 스타일을 가진 네 가지 이야기로 채색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일까. 그 안에서 언뜻 존재감을 비추는 왕가의 적이자 선동자들의 우두머리 "불멸의 신"이란 어떤 인물일까? 그리고 가장 아름다웠던 삶의 시간을 추억하는 그들은 결국 신념을 배신하고 명예롭지 못한 삶을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 승자와 패자가 엇갈리는 "이야기의 로망". 19세기 이탈리아 정치 상황이라는 배경 속에서 열정적이면서도 기만적이고, 고결하면서도 저속했던 인물들의 역정 이야기가 귀착하는 곳은 결국 그곳이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이 책의 리뷰를 찾다가 싸그리 몽땅 네타당해 버렸다. 뭐, 그건 그거대로 차분하게 읽어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역시 이 책은 정보가 적은 상태에서 보는 게 가장 좋다. 
   이야기 구조의 도식적 아름다움만 보자면 완전 내취향이라고 하겠지만, 번역의 한계 때문일까. 이 책의 문체는 딱 번역투랄까, 기계적이고 다소 과장되어 있어서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철학과 고전문학, 오페라의 네타가 함유되어 있는데, 이것은 나의 교양 부족으로 이렇다할 감흥을 느끼지 못해서 아쉽다.
   네 명의 죄수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인생의 사랑 이야기라고 할 만하다. 학생 나르치스는 풋내 나는 첫사랑에 대해 고백한다. 남작은 세콘디노라는 이름의 자신의 쌍둥이 동생에 대한 질투와 동경의 역사를 털어놓는다. 병사 아제실리오의 이야기는 이색적으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 이야기인데, 그 고백에는 어릴 적 남자들만의 수도원 생활에서 눈떴던 성적 쾌락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시인 살림베니는 무려 미망인과 그 아들 두 명을 낚는다(...).
   암울한 시대의 그림자를 상징하는 누추한 감옥의 벽. 불도 밝히지 않은 감방 안에서 인물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황금과 주홍빛의 무늬를 그린다. 로맨틱하다. 여러 겹으로 장치된 복선은 고결함을 저속함으로, 진실을 거짓으로 뒤집으며 아이러니와 위트의 감각을 부여한다. 마지막 장에 배치된 리티스 사령관이 왕에게 올리는 편지를 읽으면, 과연 가장 불쌍한(...) 건 누구일까, 하는 냉소가 떠오르게 된다. 끝까지 읽은 후에야 드러나는 함정과 함정의 교묘한 자리바꾸기.
   요즘 감각으로 썼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일말의 아쉬움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랬더라면 고전적인 로맨틱함은 줄어들더라도, 스마트함과 잔인함이 배가되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이 책의 기계적인 문체를 매끄럽게 바꾸고 제멋대로 어레인지해 본다. 이 책은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여러가지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도 높이 살 만 하다.
   현대 이탈리아 소설은 거의 읽은 적이 없는데, 간만에 그럴듯한 독서를 했다. 이런 종류의 테마에 혹하시는 분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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