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을 파는 가게 - 아시베 다쿠 연작소설
아시베 다쿠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ー또 사고 말았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고서점을 나온 '나'에게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고서와의 만남으로 비롯된 기이한 이야기 여섯 편을 엮은 '고서괴이담'. 

옛날 서적을 복각해놓은 듯한 레트로한 책표지가 주는 인상을 배반하지 않는 내용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슬슬 보기 힘들어진 정통 환상기담 장르. 저자 아시베 다쿠는 미스터리 소설계에서 알려진 사람으로, <홍루몽 살인사건> <열세 번째 배심원> 같은 장편이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다. 저자의 이력 때문인지, 특히 앞쪽 단편일수록 미스터리적인 장치가 눈에 띈다. 각 단편들이 똑같은 대사와 상황에서 시작한다는 점은 쓰쓰이 야스타카의 <노크 소리>나 온다 리쿠의 <방문자>를 연상케 한다.

수록 단편의 제목이 그대로 등장한 고서의 이름인데, 목차만으로도 어떤 취향을 노리는지 딱 감이 잡힌다. 


『제도 뇌병원 입원안내』 

『기어오는 그림자』

『여기는 X 탐정국 / 괴인 유귀박사의 권』

『푸른 수염 성 살인사건  영화화 관계철』

『시간의 극장 ・ 전후편』

『기담을 파는 가게』

저자 후기 - 혹은 호사가를 위한 노트


저자 후기는 문고판과 전자책판에만 들어갔다. 후기에도 나름대로 기담 장치(?)가 되어 있는 점이 좋다.


읽다 보면 "작가 자신의 얘기 아냐?"싶은 느낌이 든다. 저자 후기를 보니 정말 약간 사소설 요소들이 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이 기이한 이야기들이 묘하게 생생하고 친근하다. 환상기담 장르의 이야기를 읽으면 허실의 경계를 헤매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는데, 이 책 같은 경우는 그 경계가 좀 더 피부에 와닿는다. 


문장 쪽을 보면 소위 "전설의 환상소설작가"로 일컬어지는 경우들이 곧잘 그렇듯 문장력 자체에서 주는 압도감이나 현기증 같은 효과는 없다. 다소 연배가 있는 작가가 템포를 흐트러트리는 일 없이 정중하게 써 내려갔다는 느낌. 굳이 말하자면 평이한 편이다. 그래서 압도적인 독서체험을 원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기묘한 이야기> 같은 꽁트 드라마를 감상한다는 감각으로 접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이 책의 외견과 제목, 목차에 이끌려 읽기 시작했다면 무난하게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이야기집의 전반적인 정서는 역시 레트로함, 1930년대풍 에로그로 기괴취미에 대한 향수다. 단편들의 주인공 '나'가 만나는 고서점과 고서들은 흘러간 옛시절의 정서를 가득 품고 주인공을 유혹한다. 결코 떳떳하게 드러낼 수도 없고 드러난다 해도 이제는 이해받기 어려운 취향. 그런 수상하고 괴상한 '감각'을 결코 부담스럽지 않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잘 엮어낸 점이 이 책의 추천 포인트다. 


모든 단편이 내게는 베스트로 만족감을 주었지만, 굳이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꼽자면 <푸른 수염의 성 살인사건  영화화 관계철>과 마지막 에피소드이자 셀프타이틀 <기담을 파는 가게>. <푸른 수염>같은 경우는 알기 쉬운 반전의 묘가 빛나는 소품으로 일본의 독자들도 베스트로 꼽는 경우가 많다. <기담을 파는 가게>는 각 연작들을 하나의 이야기로서 묶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가장 강렬한 환상감을 전달한다.


평하자면 환상기담을 좋아하고, 결코 경험해본 적 없는 시대의 기괴취미에 대한 야릇한 환상을 품고 있는 독자라면 일독할 가치가 있는 가작.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국내에 번역되어 나오길 희망한다. 만약 나온다면 책의 장정은 일반적인 소설보다는 에세이, 특히 언더그라운드 출판 쪽에서 참고해서 만들었으면 좋겠다. (라고 옛날에 썼는데 떡하니 번역판이 나왔음..ㅇ0ㅇ)


아래로는 각 에피소드에 대한 소개와 감상.


<제도 뇌병원 입원안내> : 고서점에서 메이지시대에 개관한 '제도 뇌병원'의 입원 안내 책자를 산 '나'는  그 안에서 아름다운 소녀의 사진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된다. 함께 실린 전개도를 보고 병원의 디오라마를 만들고, 거기서 한 의사가 불가사의한 죽음을 당한 사실을 조사하는 등 여러모로 병원에 매혹되던 나. 그러던 중 디오라마 안에서 있을 리 없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게 되고...... 가장 미스터리적인 장치가 사용된 작품. 


<기어오는 그림자>: 고서점에서 충동구매한 <기어오는 그림자>라는 사가판. 1940년대부터 잡지 등에 연재된 어떤 작가의 추리소설을 게재지 그대로 엮어낸 조잡한 만듦새로, 혹시나 하여 읽어보았지만 역시나 처참한 망작뿐. 그러나 나는 추리소설의 역사에서 깨끗하게 사라진 이 실패한 작가에 대해 흥미가 솟는다.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던 중, 반세기 전에 활동했을 작가가 극히 최근에도 작품을 투고했다는 정황이 포착된다. 그리고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그림자'...... '창작'이라는 마성에 사로잡혀 귀신이 되고 만 삼류작가의 비참하면서도 어딘가 웃기고, 여하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 처음에는 '크툴루물인가...'했지만 결이 달랐다. 이 연작들에 사소설적인 면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뭐라 말하기 힘든 묘한 감상이 든다.


<여기는 X 탐정국 / 괴인 유귀박사의 권>: 어릴 적 몰두했던 만화가 연재된 잡지를 고서점에서 발견한 '나'. 단행본화되는 일 없이, 제대로 된 완결편조차 나가지 못하고 흐지부지된 그 만화에 관해 조사하고 연재지를 모아 나가던 나는 자신이 기억하던 만화의 설정과 실제 연재판이 다른 것을 발견하고 의구심을 갖는다. 분명 이 이야기는 어른 탐정이 주인공이고 소년탐정이 보조하는 형식이었을 텐데, 실제 연재본에서는 어른 탐정의 그림자가 거의 비치지 않는다. 그리고 연재 중단 직전의 에피소드에서 소년탐정은 연기처럼 밀실에서 사라져 버린 채 트릭이 밝혀지지 않는 점도 신경 쓰인다. 궁금해하던 끝에 내가 얻은 해답은........ 이것도 상당히 미스터리적인 장치가 활용된 단편으로, 일본 독자들에게선 '베스트'로 꼽히는 경우가 많다. 연재 만화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 있을 작품. 상쾌하면서도 씁쓸한 라스트가 여운을 남긴다.


<푸른 수염의 성 살인사건   영화화 관계철>: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관계로 영화 스튜디오에 자주 드나드는 작가 '나'는 고서점에서 환상의 일독 합작 영화에 관한 내부자료를 발견한다. 비록 중단되었으나 무척 화려한 캐스팅, 특히 주연 여배우 시치조 쇼코의 아름다움이 눈길을 끈다. 스튜디오에 발걸음한 겸 영화 제작 관계자에게 이 영화과 여배우에 관해 아느냐고 물어보려던 나.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내 원작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된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와 대면하게 된다. 시치조 쇼코와 판박이처럼 닮은 데다 이름도 '쇼코'인 그녀. 그러나 시치조 쇼코는 50년도 전의 사람인데...... 우아하고 알기 쉬운 트위스트가 사용된 작품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일본의 독자들에게도 베스트로 손꼽히는 가작.


<시간의 극장 ・ 전후편>: '나'는 정체불명의 스토커에게 쫓기던 중 영락해 보이는 고서점으로 도망친다. 거기서 발견한 <시간의 극장>이라는 책. 전후편으로 나뉘어진 그 책의 전편을 손에 쥐는 찰나 스토커가 가게로 들어오고, 나는 당황하여 몸을 숨긴다. 스토커가 가게를 떠난 후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서가로 가지만, 책의 후편은 사라지고 없다. 할 수 없이 전편만을 계산하고 나온 나는 몇 대에 걸친 가족 이야기가 전개되는 전편이 바로 자신의 가계 이야기임을 알아차린다. 전편은 '주인공'의 탄생에서 끝나고,  후편이 '주인공'인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확신한 주인공은 인터넷 옥션과 고서시장을 돌며 후편을 손에 넣으려 분투한다....... 묘하게 신변 이야기처럼 읽혔는데, 작중의 고서 경매나 인터넷 옥션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 아시베 다쿠의 체험담이었다. 리얼리티와 페이소스(?) 면에서 만점을 주고 싶은 이야기. 나도 절판본을 찾으려 노력해본 적 있기에 더욱 아픈 공감이 갔다. 완성도와 재미 면에서도 수작.


<기담을 파는 가게>: 한산하고 좀스러운, 시간을 역행한 듯한 고서점에서 나는 <기담을 파는 가게>라는 책을 만난다. 묘한 끌림에 계산하고 돌아선 나. 책에는 '제도 뇌병원 입원안내' 팜플렛을 산 후 일어난 기이한 이야기, '기어오는 그림자'라는 사가판 잡서에 들러붙은 삼류작가의 망집, 잊혀진 소년 탐정 만화에 얽힌 미스터리... 등등 일인칭 화자를 주인공으로 한 기담이 엮여 있다. 어째서인지 읽어서는 안 될 책을 읽게 되었다는 불길함에 사로잡힌 나는 책을 반품하기 위해 다시 고서점을 찾지만......  셀프타이틀 괴기담. 허실의 경계가 모호한 메타픽션 식으로 되어 있는 게 '응당 그래야지'싶으면서도 정취가 있다고 할까. 이 작품집에 딱 어울리는 그럴듯한 폐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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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 2018-06-19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훌륭한 리뷰 감사합니다. ‘압도적인 독서경험‘ 가능했던 작품들은 어떤 게 있으셨는지 여쭤보고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