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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 블로그 등에서 이 책의 리뷰를 찾는 분은 주의하시길. 아니, 리뷰 보지 마세요(...). 저 막 리뷰 찾아 다니다가 스포일러 막 당했습니다. 이 책의 클라이막스인 반전은 물론 이중반전이고 뭐고 다 까발리면 어쩌자는 건지.
물론 제 리뷰는 믿으셔도 됩니다! 안심 안심!
생소한 이탈리아 작가의 86년작이라는 사실만 놓고 보면 그다지 매력이 없다. 이 책을 선택하게 만드는 동인은 이야기의 모티프가 된 [데카메론](혹은 [천일야화]) 이나 "사형 전날 밤의 진실 게임" 이라는 상황설정에 있을 것이다.
왕의 폭정에 시달리는 19세기 초의 이탈리아. 민중 선동과 국왕 암살 미수라는 죄목으로 수감된 네 명의 죄수가 사형일을 하루 앞두고 하나의 제안을 받는다. "총잡이"라는 별명을 가진 왕당파 콘살보 데 리티스 사령관이 그들의 감방에 상자와 네 장의 종이를 놓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여기에 너희 지도자인 '불멸의 신'의 정체를 쓰면 너희는 사면될 것이다. 너희 중 한 명이 털어놓아도 모두 사면이다. 그러나 모두가 침묵을 지킨다면 예정대로 아침에 참수형이 집행될 것이다."
남작 콜라도 "디디모" 인가푸, 자칭 시인 살림베니, 군인 아제실리오, 그리고 학생 나르치스는 교묘한 덫이 장치된 리티스 사령관의 제안에 신념과 죽음의 공포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것은 역시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같은 방에 수감된 '대 도적' 치릴로 수도사. 그는 남작이 문득 "[데카메론]처럼 우리도 각자 하나씩 자기 이야기를 해 보자"고 제안하자 한번 해 보라고 그들을 부추기고, 현란하고도 박학하며 냉소적인 논평으로 그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윽고 그들의 짧은 밤은 각자의 스타일을 가진 네 가지 이야기로 채색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일까. 그 안에서 언뜻 존재감을 비추는 왕가의 적이자 선동자들의 우두머리 "불멸의 신"이란 어떤 인물일까? 그리고 가장 아름다웠던 삶의 시간을 추억하는 그들은 결국 신념을 배신하고 명예롭지 못한 삶을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 승자와 패자가 엇갈리는 "이야기의 로망". 19세기 이탈리아 정치 상황이라는 배경 속에서 열정적이면서도 기만적이고, 고결하면서도 저속했던 인물들의 역정 이야기가 귀착하는 곳은 결국 그곳이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이 책의 리뷰를 찾다가 싸그리 몽땅 네타당해 버렸다. 뭐, 그건 그거대로 차분하게 읽어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역시 이 책은 정보가 적은 상태에서 보는 게 가장 좋다.
이야기 구조의 도식적 아름다움만 보자면 완전 내취향이라고 하겠지만, 번역의 한계 때문일까. 이 책의 문체는 딱 번역투랄까, 기계적이고 다소 과장되어 있어서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철학과 고전문학, 오페라의 네타가 함유되어 있는데, 이것은 나의 교양 부족으로 이렇다할 감흥을 느끼지 못해서 아쉽다.
네 명의 죄수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인생의 사랑 이야기라고 할 만하다. 학생 나르치스는 풋내 나는 첫사랑에 대해 고백한다. 남작은 세콘디노라는 이름의 자신의 쌍둥이 동생에 대한 질투와 동경의 역사를 털어놓는다. 병사 아제실리오의 이야기는 이색적으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 이야기인데, 그 고백에는 어릴 적 남자들만의 수도원 생활에서 눈떴던 성적 쾌락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시인 살림베니는 무려 미망인과 그 아들 두 명을 낚는다(...).
암울한 시대의 그림자를 상징하는 누추한 감옥의 벽. 불도 밝히지 않은 감방 안에서 인물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황금과 주홍빛의 무늬를 그린다. 로맨틱하다. 여러 겹으로 장치된 복선은 고결함을 저속함으로, 진실을 거짓으로 뒤집으며 아이러니와 위트의 감각을 부여한다. 마지막 장에 배치된 리티스 사령관이 왕에게 올리는 편지를 읽으면, 과연 가장 불쌍한(...) 건 누구일까, 하는 냉소가 떠오르게 된다. 끝까지 읽은 후에야 드러나는 함정과 함정의 교묘한 자리바꾸기.
요즘 감각으로 썼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일말의 아쉬움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랬더라면 고전적인 로맨틱함은 줄어들더라도, 스마트함과 잔인함이 배가되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이 책의 기계적인 문체를 매끄럽게 바꾸고 제멋대로 어레인지해 본다. 이 책은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여러가지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도 높이 살 만 하다.
현대 이탈리아 소설은 거의 읽은 적이 없는데, 간만에 그럴듯한 독서를 했다. 이런 종류의 테마에 혹하시는 분께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