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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지음, 천경록 옮김 / 책갈피 / 2004년 11월
평점 :
2007년 12월 19일에 벌어진 이명박 후보 대통령 당선이라는 엄청난 비극이 벌어진 뒤 아직도 2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허황된 공약을 온갖 미사여구로 그럴 듯하게 치장할 줄만 알았지 실제로는 나라를 위해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만천하에 폭로했다. 그러면서 그를 비판하는 모든 세력을 폭도로 몰아가며 무능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어떻게든지 감추고자 애쓰고 있다.
지금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는 시국 선언문에서 몇 번이고 강조하듯이, 정말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없다. 정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 위기를 빌미로 대한민국은 정부에서 잘 대처하고 있어서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끊임없이 선전한다. 하지만 경제 현상을 어느 정도 비판하면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대한민국 경제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설명할 때, 세계 경제를 탓하기보다는 정부가 내놓는 그릇된 경제 정책을 더 많이 탓하게 될 확률이 높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강만수 전 장관이 무리하게 고환율 정책을 쓰고 환율을 안정시키는데 적극으로 개입하는 바람에, 쓸데없이 몇 천 억 달러를 국제 투기꾼들 손에 쥐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앞에서 내가 이야기한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얻는다.
진정한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을 줄인 말로서 2007년에 조중동 같은 수구 언론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난하고자 만든 신조어이다)라고 볼 수 있는 이명박 대통령은, 애당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민에게 도움이 되는 경제 여건을 가꿔나갈 생각은 전혀 없으며, 오로지 개인 영달과 권력에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너무나도 생생하게 증명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그 친위대는 선량한 시민들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좌익 폭도'로 몰아붙이면서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러면서 위대한 민주 항쟁인 6월 항쟁 기념사에서 대놓고 시민들이 일궈 놓은 민주주의를 모독하는 극도로 뻔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 분노는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새롭게 조명하는 움직임이다. 2009년 5월 23일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게이트에 휘말린 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서거하면서, 정국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애당초 이명박 정부가 저지르는 실정을 바라보면서, 시민들은 수구 언론이 항상 보도했던 것과 다르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얼마나 국정을 잘 운영했는지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 움직임은 지난 한 해 동안 꾸준히 고조되었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폭발하듯이 활발해졌다.
그에 관해서 내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민중은 어리석어서 영웅을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아서, 노무현 전 대통령 같은 위대한 인물이 죽고 난 뒤에야 그 진가를 깨닫는다고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는 막연한 사명감을 지니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지만, 그들 가운데 과연 진정으로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이다.
이런 말을 귀에 못이 박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듣다 보면, 과연 '역사는 되풀이된다'라는 명제가 항상 들어맞는 것 같기도 하다. 수많은 명군들이 나타나지만 민중은 항상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수구 세력에게서 그런 명군을 지켜내는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이 지닌 속성은 다음 아고라에서 처음으로 제안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고 있는 '집단 지성'이라는 좋은 개념이 아닌 '중우 정치'에 이용되는 어리석음이라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으로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해서 설치고 있는 자체가 '중우 정치'가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막상 좀 더 자세하게 역사를 알아보면 그렇지도 않다. 어떤 이는 '천재 수학자는 이론을 제시하고 실력 있는 수학자는 그 이론을 증명한다'는 말을 남겼다. 앞에서 한 이야기에서 천재 수학자와 실력 있는 수학자 가운데 과연 누가 더 중요한지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가? 물론 이론 자체를 제시하는 천재 수학자가 당연히 그 이론을 증명할 뿐인 실력 있는 수학자보다는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겠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둘 다 수학이 발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주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와 민중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 그리고 역사 속에서 영웅(?)과 민중이 지닌 속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제시된 비유를 다시 되새겨 보자. 영웅을 천재 수학자, 민중을 실력 있는 수학자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시도를 주저하지 않고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일단 경계하고 봐야 한다. 현명한 몇몇 영웅들이 모든 역사를 창조하며, 무지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민중들은 그저 그 흐름에 따를 뿐이며 때로는 그 흐름을 거부해 역사를 퇴보시킨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서슴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공교육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주로 왕, 황제, 장군, 귀족 따위 위대한 인물을 중심으로 배운다. 그들은 대개 역사가 기록되는 전형에 따라 인류가 지니고 있는 본성인 이기심을 극복하고 이타성을 발휘한 '성인'이자 '영웅'들로 그려진다. 그들은 무지한 민중들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그에 실패하면 처참한 비극을 맞이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문화와 문명이 싹트고 진보가 이루어진다. 그 뒤 새로운 영웅이 나타나 예전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개혁을 시행하고 민중을 계몽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역사란 그런 것이었다. 그 속에서 민중들은 그들도 모르게 잘못된 사회 구조를 개혁할 주체가 아닌, 항상 가르침을 받아야 할 수동 객체로 전락해 버렸다.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이미 연구 대상을 선택하는 데서부터 연구자, 곧 역사가가 특정한 관점을 도입해서 해석하면서 객관성을 잃어버린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고착된 사회 질서와 계급 구조에서 권력과 부를 거머쥔 지배 세력은 항상 중립과 객관을 부르짖으면서, 민중을 교묘하게 역사 속에서 힘없이 떠밀리기만 하는 객체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그들과 관련이 없거나 그들에게 불리한 역사 사실들은 일부러 자취를 없애버렸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역사란 그런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민중들은 그들도 모르게 지배 세력이 원하는 것만 배웠고 그것만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도록 길들여졌다.
민중들을 그렇게 만드는 역사 서술 방식에 반기를 든 책이 바로 이 책 '민중의 세계사'이다. 저자인 크리스 하먼은 이 책에서 민중을 자기도 모르게 역사 앞에서 수동인 객체로 만들어 버리는 틀에 박힌 역사 서술 방식 따위는 집어치우고, 투철한 사회주의자로서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역사 서술 방식에 따라 민중을 역사 앞에 주체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과감하게 보여준다. 민중은 도도하면서도 격렬하게 흐르는 역사 속에서 절대 무기력하게 떠밀리고 있지만 않았다. 누구보다도 더 격렬하게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 싸웠다. 그것들은 초기에는 주로 천재지변이었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천재지변보다는 같은 인류에게 천재지변보다 더 크고 일상인 고통을 강요하는 이상한 사회 질서와 제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강요하며 개인 영달을 추구하는 데만 혈안이 된 지배 세력이었다.
사람이 하는 모든 활동은 삶을 기본으로 한다. 자기가 살아있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아무 뜻도 없다. 그렇기에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역사관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노동과 그에 따른 인류 발전 과정을 철저하게 규명하고자 힘쓴다. 그러고자 저자는 유럽 중심, 좀 더 넓게 이야기하자면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미국으로 이어지는 유럽과 아메리카 중심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중국, 인도, 서남 아시아, 아프리카와 같은 지금까지 잘 다루어지지 않거나 설사 다룬다고 하더라도 비중이 낮았던 지역사를 서양과 대등하게 다루면서, 인간과 노동이 발생한 근원을 심도 있게 서술하고자 힘쓴다.
896쪽이라는 방대한 내용을 읽어 나가는 게 솔직히 매우 힘들었지만, 어떻게든지 차근차근 읽으면서 민중이 움직이는 거대한 역사를 두꺼운 책이 주는 느낌만큼이나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영웅이 존재한다면, 영웅은 그들 자체만으로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민중이 지지하지 않는 영웅은 역사 안에서 아무 뜻도 없다. 특히 지금까지 지배 계층에서는 영웅이라고 칭송했지만, 실제로 민중들에게는 재앙만을 안겨 준 폭군이 인류사에서는 쉴 새 없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21세기 초기에 대한민국에 대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폭군 이명박을, 대한민국에서 모든 권력을 창출하는 주체인 민중이 단결해서 몰아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지금 이렇게 책으로 나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집필되고 있는 '민중의 세계사' 안에, 자랑스러운 투쟁 기록을 당당하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