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 프랑스라는 거울을 통해 본 한국 사회의 초상, 개정판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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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랬지만 시작이 반이다. 무슨 글을 쓰려고 하든지 일단 쓰기 시작하는데 성공하면, 그 뒤에는 어떻게든지 쓰게 된다. 지금까지 이 두 문장을 썼으니 이제 이 글 한 편은 어떻게든지 완성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글 한 편 쓰지 못하던 나에게는 정말 기쁜 일이다.

물론 글을 아무리 많이 쓰고 내가 올곧은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고 아무리 선언해 봐야, 결국 본질이 혼돈인 자연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미물로서 스스로 끝없는 혼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천명한 이성에 따라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으로서 최소한 존재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조건이 있을 것이며, 나는 그 조건을 글쓰기로 여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지 뭐라도 쓰려고 애쓴다.


하지만 몇 자도 쓰지 않아 바로 키보드 위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춘다. 벌써 지쳐버린 것이다. 지난달에 '우리는 예비교사입니다 - 자살한 교육학과 학우를 추모하며'를 쓰면서 밝혔듯이, 언제까지 사회를 비판하는 글만 쓰면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나를 더욱 힘들게 한다. 아무리 사회를 비판해 봤자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며 민중을 힘들게 하며, 사회를 좀 더 많이 알아갈수록 사회에 비판이라는 칼날을 들이대는 내가 실제로는 난도질당해야 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런 현실은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나를 괴롭히며,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고민으로 자리 잡은 채 나를 꽁꽁 옭아맸다. 거대한 괴물 문어가 휘감은 여객선이 아무리 동력 장치 출력을 높여도 문어에게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고 바다 속으로 잠겨드는 것과 같다.


에미넴이 'If I Had'에서 주절거린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자면 글 쓰는 것 말고도 어딘가에 지쳤다는 말을 도대체 얼마나 많이 반복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살고 있다. 너무 많이 지쳐서 몸과 마음이 모두 내 실제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늙어버린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젊게 살아보려고 한다.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지치고 힘들다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힘을 낸다. 그렇게 낸 힘은 온몸을 타고 돌면서 구석구석을 칼로 벤다. 거악에 맞서 싸우는 인물이 겪는 좌절과는 전혀 다른 좌절이 나를 휘감는다.


침묵과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에 저항하다 지쳤다고 해서 사랑을 할 힘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지친 나머지 몸과 마음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노쇠해져 버렸다. 사랑하는 그녀에게는 나이가 나보다 겨우 두 살밖에 많지 않으면서 늙었다고 한탄하지 말라고 간절하게 다그쳐 놓고, 정작 그런 나는 몸과 마음이 모두 수 십 년을 평지풍파 속에서 보낸 볼 장 다 본 늙은이와 같다고 봐도 좋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도 찾아보기 드물다. 제발 상처가 많지만 정말 고운 그 마음을 나에게 열어달라고 부탁해 놓고, 정작 나는 그녀에게 내가 마음을 닫고 있는 까닭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것도 기가 막히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 어이없는 일도 전부 내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산다.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회피하는 비겁한 짓일 뿐이라는 비난을 애써 무시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 모든 비난이 내가 만든 방어 막을 뚫고 들어와 가슴을 후벼 판다.


그런 고통을 잊으려고 나는 온갖 책을 찾아 읽었다. 그러면서 온갖 현실 속 이야기를 하나하나 알아가다 보면, 나는 정말 기구한 운명에 휘말려 삶이 어딘가 모르게 이상해진 이들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책 '쎄느 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쓴 홍세화도 그 앞에서 내가 명함을 내밀지 못할 그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남민전 사건(1979년에 남민전 조직원 74명이 검거되고 4명이 수배된 사건. 정부는 '폭력으로 정부 전복을 노린 최대 규모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 적발'(1차 발표), '북괴와 관련된 무장간첩단'(2차 발표)이라고 서슬 시퍼렇게 발표했지만, 재야에서는 유신 말기 상황에서 공안당국이 필요에 따라 조작한 사상범 조작사건이라고 불렀다)'에 휘말려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 뒤, 프랑스에서 20여 년 동안 이방인으로서 삶을 이어갔다. 2002년에 귀국한 뒤에도 여전히 일제 시대와 군사 독재 정권이 남겨놓은 온갖 부조리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이방인으로서 남아야 했다.


알베르 카뮈가 '이방인'에서 그려낸 인생 근본에서부터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조리에 싫증을 느끼고 인간 전체와 대립하는 이방인과, 온갖 다양한 사회 가운데 대한민국이라는 일그러진 국가이자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남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둘 다 매우 힘든 일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 세계 전체에서 이런저런 까닭 때문에 이방인으로 남는 사람보다는, 대한민국과 같은 배타성이 강한 사회에서 특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인 홍세화에게 주목하고 싶다.


근대 민족 국가가 드러낸 여러 가지 문제란 문제는 모두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한민국에서, 열 세 자리 주민등록번호와 황인종다운 피부와 모국어로서 구사하는 한국어라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이방인들이 얼마나 많은 차별에 시달려 왔는지는, 어느 정도 양식이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위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순수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해서 그 차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같은 국민들끼리 서로 도우면서 살기에도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 현실인데, 차별을 당하고 기본권을 침해당하는 순수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러면서도 영어 쓰는 분명한 이방인인 백인들 앞에서 굽실거리며 사족을 못 쓰고, 그들이 쓰는 영어를 모국어와 같은 위치로 격상시키겠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한민국 권력층, 사람이 아닌 훈장을 숭배하는 인간 상실이라는 비극, 후안무치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속담을 누구보다도 현실에서 더 잘 증명하는 기득권층, 가난한 사람들이 배제된 채 추구되는 국가 경쟁력, 양비론을 즐겨 쓰면서 상아 욕조에 푹 잠긴 채 정작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는 응답하지 않는 기회주의 지식인들……


일일이 쓰다 보니까 머리 뒤끝이 뻣뻣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도저히 더는 못 쓰겠다. 그 모든 부조리가 모여 있는 곳이 내가 먹고 살고 있는 이 나라 대한민국이다. 온갖 부조리가 판치는 대한민국 안에서 최소한 인간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권리도 온갖 이해관계에 따라 아주 쉽게 침해당하기 십상인 현실을 바라보며, 이방인 홍세화는 그가 느낀 것을 이 책에 담았다. 전문가로서 온갖 사회학 개념을 동원해 깊게 파고들지는 않지만, 이방인으로서 그가 대한민국 사회를 다른 거울로 비춰볼 수 있다는 그 점 하나만으로도 그가 쓴 글에는 색다른 힘이 넘친다. 박노자가 쓴 '당신들의 대한민국 1,2' 같은 여러 책을 읽을 때 받았던 그런 느낌을 여기에서도 받을 수 있었다.


뜬금없이 글을 시작할 때 쓴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을 다시 끄집어내자면, 대한민국은 과연 시작이 어떠했는가 생각해 볼만하다. 물론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근본이 잘못되었다. 쎄느 강은 좌우를 갈랐지만 '똘레랑스'가 몸에 배여 있는 프랑스 사람들은 쎄느 강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강은 남북을 갈랐고, 한강 하구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남한군과 북한군이 서로를 바라보며 적으로 간주하듯이, 대한민국 국민들은 나와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앵똘레랑스'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는 국가라는 괴물과 그 괴물에게 쫓기다가 자기도 모르게 미쳐버린 사람들이 서로 피 터지게 싸워가며 희생시킨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홍세화 또한 일그러진 대한민국에서 원하지 않는 이방인이 되어야 했던 대한민국에 희생당한 인물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에서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에게 공감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대한민국에서 판치고 있는 '앵똘레랑스'가 '똘레랑스'로 바뀌는 시기 또한 현재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그는 그 날을 항상 꿈꾸면서 온갖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열심히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있다.


그런 그를 나는 2008년 5월에 부산대학교에서 처음 봤고, 그 당당한 모습에서 강렬한 인상을 느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그렇게 부조리가 판치는 사회에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으니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많이 빠져 있던 기운을 다시 살리려고 발버둥치는데, 마침 내가 교육실습을 나가고 있는 연제고등학교에 그가 강연을 하러 온다고 한다. 다시 그를 보러 가겠다. 그리고 그가 하는 강연을 열심히 듣는 연제고등학교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암울한 대한민국 사회를 비추는 희망을 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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