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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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에게 두 가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 가지는 감정 영역(affective domain)이 인지 영역(cognitive domain)에 미치는 영향을 둘러싼 논란 가운데 감정이 이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는 편에 좀 더 기울었다는 것이다(임용고시를 준비한답시고 공부한 내용을 이런 곳에 써 먹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내가 부경 아고라에서 활동을 중단한 뒤, 그토록 애정을 쏟았던 부경 아고라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세력이라고 칭하는 이들을 더욱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둘 다 특별한 일이라고 볼 필요까지는 없다. 항상 그랬듯이 모든 일에서는 무슨 요소든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모호함 때문에 오는 짜증과 불안을 없애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차피 이성과 감정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라고 확고한 결론을 내린 마당에, 한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 봤자 뚜렷한 차이는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약 넉 달 동안 열심히 활동했던 부경 아고라를 내가 무조건 감싸고 돌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부경 아고라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 요소와 헛점들을 내 나름대로 열심히 비판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는, 나름대로 그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면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프고 쓰리더라도 인정하고 가자고 강조했다. 한 마디로 '내부 비판자'로서 구실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맨 첫 문단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일이 특별하다고 굳이 강조한 까닭은 분명히 있다. 촛불 예비군 카페에서 부경 아고라로 일터를 옮긴 뒤 부경 아고라에서 추진하는 일에 나름대로 열심히 참여하면서, 부경 아고라에 쏟아지는 여러 가지 비판을 반박하고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랬던 내가 갑자기 부경 아고라뿐만 아니라 지금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모든 세력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대전환이 일어난 근본 까닭이 중요하다. 그 근본 까닭을 제대로 설명하자면 매우 길기 때문에 핵심만 말하자면, 맨 첫 문단에서 이야기한 감정 문제이다. 예전에는 그토록 애정을 쏟았던 부경 아고라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경 아고라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판'이라는 개념 속에는 좋아하는 감정과 싫어하는 감정이 모두 들어가 있는데, 내가 지금 부경 아고라에 품은 감정은 싫어하는 감정에 속한다. 

 

이성에 따른 같은 비판이라도, 비판 대상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 보일 수 있다. 심지어 내용이 같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주장하는 사람이 보여준 행적에 따라 비판이 너무나도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토록 거부했던 논리를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받아들일 수도 있고, 그토록 신봉했던 논리를 한 순간에 짚신짝 내팽개치듯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감정이 이성에 미치는 영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 가운데 한 가지이다.

 

일단 다행히 앞 문단 뒤에서 이야기한 그런 극단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내부 비판자'로서 부경 아고라를 비판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렇게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준 뒤 앞으로 내가 내놓는 부경 아고라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외치는 세력 자체에 내놓는 비판은 예전과는 분명히 뭔가 다를 것이다. 내가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부경 아고라 안에서 내가 그렇게 강조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그토록 이성을 신봉하던 나로서는 굉장히 실망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쏟아내는 비판은 객관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동안 쏟았던 애정만큼 상처도 굉장히 컸을 뿐만 아니라 미련을 버리기도 굉장히 어려웠기에, 그런 걱정은 더욱 크다.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어쨌든 간에 부경 아고라에서는 내가 회원들이 이야기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라고 해도, 한 번 상한 감정이 그 사실을 인정하도록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나는 감정이 상해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실천 활동을 그만 둔 것이다. 한 성인으로서 사회에서 자립해야 한다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좋은 핑계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핑계를 댄다고 해서 내가 감정이 상했다는 것을 상쇄시킬 수는 없다. 정말 내가 이성에 철저하게 따른다면 다시 운영진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 부경 아고라를 정말 제대로 개편해 보겠다는 의지에 따라 그 제의를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그토록 비난하던 현실에 무작정 복종하는 대학생이 되어 취업 준비에만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그토록 당당했던 내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 비참함과 굴욕감은 2주 가까이 나를 괴롭혔다. 그 때문에 괴로워한 기간이 그나마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 격렬한 수치심과 굴욕감을 간신히 달랜 뒤에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 덕분에 얻은 장점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부경 아고라뿐만 아니라 지금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모든 세력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필요한 논리를 고안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상황을 좀 더 객관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여러 가지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부경 아고라 종합 분석 & 평가 보고서'를 쓸 때 거기에서도 분명히 밝혔듯이,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그 주장 하나만으로 수구 세력이 주장하는 모든 논리를 헛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광우병 논란에서든 국가보안법 논란에서든 어느 세력이든지 헛점은 지니고 있었고, 그 헛점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지적에는 대개 반박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때는 보통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밀어붙이거나 아니면 당위론을 강조하면서 그 중요성을 흐리게 하는 임시방편을 활용하는 경향이 강했다.

 

나는 그런 것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오로지 논리에 따른 최소한 균형만 추구하는 이론 체계를 만들고자 혼자서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그런 방대한 체계를 제대로 세우기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일한다는 대의명분을 지닌 채 쉴 새 없이 변하는 현실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새로운 것들을 제대로 받아들이기에도 너무나도 벅찼다. 그래서 항상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한 느낌을 감추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나는 다치바나 다카시가 이야기한 '구경꾼'이라는 개념을 대학교 1학년 때는 나름대로 내 삶에 충실하게 적용했지만,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는 대의명분에 강하게 사로잡혀 그에 따라 행동하면서, 분명히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지금까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이때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그 잃어버린 것은 '구경꾼'으로서 바라보는 시선만이 알아낼 수 있는 온갖 모순을 객관으로 파악하고 지적하는 일이었다. 일본에서 그런 구실을 정말 잘 해냈던 인물이 다치바나 다카시였으면서도 나는 지금까지 그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류비셰프도 소련 과학계에서 그런 구실을 맡아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온갖 비판에 맞서 꿋꿋하게 싸워 나갔던 것이다.

 

일단 지금까지 내가 파악한 바로는 한국이 낳은 저명한 경제학자 가운데에서는 장하준이 그런 구실을 하고 있다. 세계 경제학계에서도 폭넓은 실증 연구와 균형 잡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으로써 석학으로 인정받고 있는 장하준 교수이건만, 최근에 와서 매우 크게 주목받고 있기는 하더라도 예전에는 지금만 못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을 말아먹고 있는 수구 세력은 장하준이라는 존재와 그 존재가 뿜어내는 강한 비판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대한민국에서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살리고 수구 세력을 타도하자고 일어선 사람들도 장하준이 제시하는 논리를 모두 인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장하준이 자기는 개혁에 관해서는 분명히 '우파'라고 밝혀서 그런지 몰라도 재벌 개혁 방식에 관한 논란, 박정희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에 관한 논란 따위에 관해서는 내가 지금까지 민주주의 운동 세력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정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인터넷에서 여러 서평이나 독후감을 읽어봐도 앞에서 이야기한 그 정설에 부합하거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리들만을 골라 부각시킨 것이 대부분이었다. '우파'에게 유리한 것은 무시하는 것 같았다. 곧 앞에서 이야기한 '헛점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지적'에 관해서는 반격에 나서기 싫어하거나 미처 반격에 나서지 못하는 바람에 회피하거나 얼버무리는 전술과 유사한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분명히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대한민국에서 흔히 말하는 좌우 논쟁이나 케케묵은 이념 대립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그 틀을 버리고 조금 복잡하더라도 가장 시대상에 잘 들어맞는 유연한 틀을 확립해야 하는 것만이, 쓸데없는 논란 따위는 끝내고 장하준 교수가 이 책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배우려면 가려서 제대로 배우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포장한 논리가 지닌 허구성을 깨닫고', '극심한 대립만 고집하지 말고 타협을 이루려는 자세'를 지닐 줄 알아야 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그것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보호무역을 잘못 써서 실패한 나라는 있어도, 보호무역을 쓰지 않고 경제 성장에 성공한 나라는 없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모든 나라들은 경제 성장을 시도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강력한 보호 무역을 추진하였고, 경제 성장에 성공한 뒤에는 자유 무역을 주장하였다. 이는 모든 나라가 보여줄 수 있는 흔해빠진 위선이다.

 

2.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도 화제가 되고 있는 절대절명 추진 과제인 세계화는 진정한 세계화가 아닌 '영미식' 세계화일 뿐이다. '영미식' 세계화가 불러오는 폐단이 이미 대한민국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므로, '영미식' 세계화가 아닌 '대안적' 세계화를 모색해야 한다.

 

3. 자유 무역을 부르짖는 경제 선진국들은 보호 무역을 강력하게 주창하였던 과거를 일부러 없앴다. 대한민국은 그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세계화'라는 그럴싸한 논리로 포장된 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한국 체질에 맞는 경제 구조를 확립하고자, 영미식 자본주의만이 아닌 여러 가지 대안을 함께 비판하면서 검토해야 한다.

 

4. '작은 정부' 신화는 이미 오래 전에 깨졌다. 시장 만능주의를 버리고 시장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장 실패를 해결하고자 정부가 적극으로 개입해야 한다.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는 강대국들이 다른 나라에서 더 많은 수익을 짜내고자 내세우는 허울 좋은 이념일 뿐이다.

 

5. 세계화 덕분에 국적이 없다는 '초국적 자본'이나 국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외국인들도, 막상 문제가 생기면 관련된 나라들이 손을 쓰게 되어 있다. 엄연히 국적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포장 아래 퍼뜨리는 거짓말을 믿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들 덕분에 국내 제도와 관행이 이치에 맞게 개선된다는 주장도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6. 기존 제도와 관행을 완전히 깨부수는 것이 개혁이 아니다. 기존 제도와 관행이 지닌 좋은 점을 살리고 나쁜 점을 없애는 장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다. 그 진정한 개혁을 이루려면 지금 극도로 대립하고 있는 세력 사이에 대타협이 이루어져야 한다.

 

 

장하준 교수가 주장한 이대로 대한민국이 움직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매우 강한 호기심 또는 극렬한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받을 수 있는 '신비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책 맨 마지막에 나오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한국파의 괴로움'이라는 사설에 장하준은 그 현실을 간결하게 잘 설명해 놓았다. 군대에서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읽으면서 실증 자료에 따른 명쾌한 분석에 저절로 탄성을 내뱉었으면서도, 그 탄성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해 지금까지 내가 잊고 있었던 길을 걷고 있는 자에게서 나오는 하소연이다. 쉽지 않다 하더라도 나도 앞으로 그런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실려 있는 사설은 거의 한 결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흔히 극도로 대립한다고 알려져 있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같은 신문사들과 한겨레, 오마이뉴스 같은 신문사들이 모두 신문에 실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내용이 같더라도 시간 차이가 있다면 사회 맥락이 달라질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 차이라는 것도 김대중과 노무현이 집권하고 있던 1999 ~ 2004년 사이에서 나타날 뿐이니, 정권이 바뀌면서 나타나는 뜻 깊은 변화는 찾아볼 수 없다.

 

한 마디로 어느 신문이든지 앞다투어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는데 장하준 교수가 제시하는 견해를 이용했다는 뜻이다.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저 실증 연구에 충실할 뿐인 객관으로 바라보는 이가 신기하게 비춰지고 온갖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기묘하고 복잡하게 비틀어져 있는 한국 논쟁 지형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지금까지는 그 논쟁 지형을 뚜렷하게 분석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부경 아고라에서 벗어나면서 나는 그를 분석하는데 필요한 객관성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무시하고 있던 온갖 현상과 논리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앞으로 가만히 두고 보고 있기만 하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객관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한들 대한민국이 지금 절대절명인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참담한 현실은 민주주의에 관한 소양을 조금이라도 갖추고 있고 사회 현상에 어느 정도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깨닫지 못할 까닭이 없다. 한 성인으로서 사회에서 자립해야 하는 최소 조건을 갖추고자 일단은 잠시 물러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마저 외면하지는 않겠다.

 

2008년에는 썩어빠진 이명박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벅차 그토록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내 능력과 한계를 깨달았으니, 2009년에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내 능력과 한계에 맞춰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서야 한다. 해야 할 일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 일에 내 모든 것을 걸면 그만이다. 새해에 이런 큰 깨달음을 준 장하준 교수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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