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어릴 때 읽었던 위인전에서는 이순신이야말로 진정한 무인이며 온 국민이 본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했다.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와 윤리 교과서에서도 그랬다. 대학교 2학년 때 읽은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박노자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 체제를 굳히면서 이순신을 신과 같은 위치로 끌어올렸으므로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래 사람이 지닌 이성이란 이중성을 무시하지 않으면 절대 온전할 수 없는 법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서 드러나는 이중성을 끊임없이 살피면서 나는 차츰 지쳤다. 22년 동안 얻어낸 변변찮은 지식마저도 그토록 나를 괴롭히는데, 지식이 갈수록 많아지면 나중에는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가지고 해병대에 들어간 뒤 나는 충무공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를 정말 지겹게도 들었다. 수요일마다 정훈 교육이라고 해서 세 가지 큰 주제(군인 정신, 국가관, 안보관)에 포함된 18가지 교육 과제에 관한 자료를 읽고 국군방송을 보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도 이순신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하긴 대한민국 정부와 해군과 해병대가 이순신을 그토록 칭송하는 까닭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순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으며, 불가능을 모르는 군인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줬다. 해병대에서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상승불패의 정신'을 그토록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임진왜란 때 그 어떤 것도 이순신을 돕지 않았다. 책에 나온 표현에 따르면 이순신은 자기 몸이 적장과 임금이 합쳐진 듯했으며 둘 다 자기를 괴롭히는 탓에 너무 아프고 괴롭고 피곤했다. 임금은 멀리서 수려한 어구로 빨리 왜군을 없애라고 잔뜩 보채기나 했고, 사직을 보존하고자 무고한 죄를 뒤집어씌우고 트집을 잡아 이순신을 고문하고 죽이려고 했다. 임금 주위에는 세태를 제대로 파악할 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신하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행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운 권율 장군도 이순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나라 바깥에도 명나라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진린은 철저하게 정치 논리에 따라 움직여서 전투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틈만 나면 전공을 증명할 수족이 필요하다면서 부하들을 닦달하며 술잔을 들이키고, 여의치 않으면 묵묵히 전투에만 신경 쓰는 이순신에게 어린아이처럼 보챘다. 

 

그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적들에게 유린당한 조국 산하를 바라보는 애국심이 불타올랐던 그는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을지는 짐작할 필요도 없다. 이 책에 나오는 표현에 따르면 이순신은 항상 찬 정한수를 마시고 싶어했다. 찬 정한수가 마음 속에 있는 모든 한을 녹여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김훈은 이 소설에서 이순신이 겪었던 그런 고뇌를 대놓고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던 듯 하다. 술을 마시다가 뒤통수에 뜨끔한 느낌이 오더니 코피를 쏟고, 추운 날에는 어깨가 쑤시고 잘 때는 거의 항상 땀이 흘렀다는 그런 표현으로 그가 겪었던 고통을 드러내고 있다. 그 고통이 단순히 의금부에 불려가서 당한 고문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소설을 찬찬히 읽다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설 전체에 나오는 임진왜란이 휩쓸고 지나간 조선을 묘사한 표현은 정말 끔찍하다. 그리고 너무 담담하게 사실을 표현하고 있어 끔찍하다는 수사만으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흔히 말하는 '탐미적 허무주의'가 단어와 문장에 묻어나, 고구마맛탕을 집었던 젓가락에 묻은 꿀처럼 뚝뚝 떨어진다.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조선 수군을 다시 육성하여 명랑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노량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조용히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저 담담하게 이어진다. '일식'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차분한 문체를 지켰다.

 

전란이 가져온 참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쓴 효과는 뭐라고 뚜렷하게 설명하기가 힘들다. 책을 읽으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있었지만 너무 처참하면서도 격렬한 흐름이 심장을 뚫고 사지를 갈가리 찢어놓는 듯 했다. 왜구들에게 도륙당한 원혼들이 내 안에서 울었다. 밤마다 땀을 흘리며 뒤척이던 이순신이 느낀 고뇌가 내 혈관을 사정없이 쥐어짰다.

 

오랜만에 참으로 대단한 소설을 만났다. 문학이 지닌 힘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으며, 왜 그렇게 김훈이 유명한지도 알았다. '칼의 노래'라는 제목을 빌어서 이순신이 찬 장검이 울었다. 이순신은 장검을 차고 한산도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책을 다 읽은 뒤에 이순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는 싫었다. 그저 책에서 전하는 대로 담담하게 조선 수군을 재건하며 왜놈들에게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한없이 불태우고 떠난 이순신 앞에서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 의지가 전혀 걸러지지 않고 완벽하게 드러난 장계 마지막 부분을 보자. 

 

 

……신의 몸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한에는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삼도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이 책에는 부록이 두 가지가 있다.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 '선조실록', '연려실기술', '장계', '유시', '고서', '행장'에서 필요한 부분만 골라 짜맞춘 '충무공 연보'는 정치 권력 관계에 따라 흐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인물지'는 이 소설에 나오는 역사 속 인물에 관한 정보를 담았다. 둘 다 소설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라는 역사 속 사실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체계를 갖추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만 읽고 끝내지 말고 부록도 꼭 챙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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