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단편선 1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보리스 디오도로프 그림 / 푸른숲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류비셰프를 신처럼 숭배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러시아 역사와 문화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특히 2월 혁명이 성공하여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진 폐허 위에 선 소련 안에서 꽃피었던 문화에 주목했다. 내가 숭배하는 인물인 류비셰프가 눈부시게 활약한 시기이도 하지만, 사실 그 말고도 뛰어난 위인들이 수없이 나타나 활약한 그야말로 러시아 문화사에서 가장 뚜렷한 융성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문화사를 제대로 공부하지는 못했다. 혼자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서 뒤적거리고 러시아 작가들이 쓴 소설을 읽을 뿐이라서 그런지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동안 그나마 쌓은 지식과 생각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보고 싶어도 여의치 않다. 아는 사람들이 여러 단대에 나름대로 널리 퍼져 있지만, 노어노문학과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러시아 역사와 문화에 관하여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읽은 것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어디에서든지 문학이 지닌 힘은 위대하다는 결론 정도는 혼자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막심 고리키,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갚은 위대한 문호들은 로마노프 왕조가 휘두르는 폭정 아래 신음하는 러시아 민중들을 각성시키고 러시아가 처한 암울한 현실을 비판하고자, 온 힘을 쏟아 주옥같은 작품들을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수많은 이들이 그 작품들을 읽고 자기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뜬 뒤, 혁명가가 되어 민중 계몽에 나섰다. 현실에 눈을 뜬 민중들은 폭압을 일삼는 로마노프 왕조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처절한 투쟁 끝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민중들이 열망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탄생했다. 사회주의 비판과 폭력 혁명이 정당한지에 관한 논쟁에는 상관없이, 민중들이 순수한 이상을 찾아 나선 끝에 이루어낸 결과라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비록 사회주의가 실패작으로 판명되고 소련이 역사 뒤안길로 사라지기는 했지만, 러시아 문학이 보여주는 그 위대한 계몽성과 예술성은 빛이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이 책 '톨스토이 단편선'에 나오는 여러 단편만 봐도 알 수 있다. 톨스토이는 민중을 들쳐먹는 거짓된 모리배들과 위선으로 가득찬 지식인들을 비판하고, 오로지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내린 진정한 힘인 사랑으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교훈을 단편 안에 끈질기게 집어넣엇다. 그 때문에 반체제 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까닭으로, 작품이 완성되자마자 출간을 금지당하는 시련을 몇 번이고 겪어야 했다. 톨스토이도 그 무자비한 검열이 난무하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래도 그는 꾸준히 글을 쓰면서 결코 희망과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 결과 톨스토이는 러시아 낳은 가장 위대한 문호 가운데 한 명으로 지금까지 인정받고 있다. 그에 따라 그가 지은 소설들도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문학 작품이자 많은 사람들이 교양을 쌓고자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작품 목록에 이 책도 물론 들어간다.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민중들을 계몽하고자 쓴 단편 소설들이라서, 쉽게 재미있으므로, 읽는데 아무런 부담이 없다. 말에 견주었을 때 내용이 꽉 찼다는 느낌이 저절로 들 것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고자 어떤 가르침을 내렸는지 진심으로 깨닫는 즐거움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반드시 느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읽는 이들이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일단 이 글에는 제 1권에 관한 내용만 적겠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집도 없고 땅도 없는 가난한 구두장이 세몬은 마누라 마트료나가 오랫동안 사고 싶어했던 양가죽 털을 사러,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마을로 나간다. 하지만 농부들이 자기가 빌려준 돈을 갚지 않자, 세몬은 화가 나서 술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가는 길에 미하일이라는 미소년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 뒤, 같이 구두장이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미하일은 원래 천사였다. 한 산모에게서 혼을 거두라는 명을 받고 그녀에게 가지만, 그녀는 남편도 죽고 없는 마당에 자기마저 죽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냐면서 울부짖는다. 마음이 약해진 미하일은 명을 거역하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간다. 그러자 하느님은 혼을 거둬오라고 다시 명을 내리면서 미하일을 인간 세상으로 떨어뜨린다. 그러면서 세 가지 물음에 답을 찾으면 다시 천사가 될 수 있다는 계시를 내린다. 사람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건 무엇인가,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산모를 하느님에게 대려간 뒤 인간 세상으로 떨어진 미하일은 세몬과 마트료나가 자기를 보살펴 주고 걱정해 주는 것을 보고, 사람 안에는 하느님이 내린 사랑이 잇다는 첫 번째 답을 얻는다. 그리고 거만한 부자가 자기 뒤에 사자(死者)가 서 있는 걸 전혀 모른 채 미하일에게 한 해를 신어도 끄덕없는 장화를 만들라고 명령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에게는 자기 몸에 정말 필요한 것에 관한 지식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두 번째 답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미하일이 혼을 거둔 여자가 낳은 두 아이들이 엄마가 없어도 두 자식을 잃은 부인이 그들을 거둬준 덕분에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며, 그리고 자기 아이가 아닌데도 불쌍하게 여겨 눈물을 흘리는 부인을 보며, 사람은 사랑으로써 산다는 세 번째 답을 얻는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뿔뿔이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렇기에 사람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계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야말로 나는 깨달았다. 모두가 자신을 걱정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사실은 사랑으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 속에 사는 자는 하느님 안에 살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람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

 

늘 재료도 좋은 것만을 쓰고 약속도 꼬박꼬박 지키는 솜씨 좋은 구두장이 마르틴 아브제이치는 가족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비판에 잠기며 하느님을 원망하지만, 고향에서 온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노인이 한 충고대로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성경에 깊이 빠져들어, 예전처럼 쓸데없이 빈둥거리는 시간을 없애고, 일과 성경에만 몰두하며 조용하면서도 만족스럽게 살아간다.

 

어느 날 그리스도가 그를 찾아가겠다고 계시를 내린다. 깜짝 놀란 마르틴은 조촐하게나마 부랴부랴 준비를 해서 그리스도를 기다리지만, 그리스도는 오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그는 추위에 떨던 늙은 병사 스테파니치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겨울옷이 없고 목도리도 저당 잡힌 가난한 여인과 아이에게 외투 한 벌과 저당 잡힌 목도리를 찾을 20 코페이카를 준다. 사과장수 할머니에게서 사과를 훔쳐 달아나려던 아이가 그만 할머니에게 붙잡혀 경을 치려는 것을, 마르틴이 나서서 아이는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할머니는 아이를 용서하게 한다.

 

날이 저물고 그는 그리스도가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러나 곧 그는 깨달았다. 낮에 그가 대접한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제 25장 40절)."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

 

어떤 마을에 이반 쉬체르바코프라는 농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은 유복한 살림살이를 꾸려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인 가브릴로 고리제예프라는 사람 집에 자기 집 닭이 날아가서 알을 낳다. 그 달걀 하나 때문에 집안 여자들끼리 싸우기 시작하면서 눈덩이처럼 일이 커져 두 집안이 서로 싸우게 된다. 그냥 싸우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결국 서로 고소까지 하며 험악한 욕을 퍼붓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결국 이반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온힘을 다해 이반에게 담긴 유언을 듣고 가브릴로가 저지른 악행을 용서하는 순간, 모든 반목과 대립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린다.

 

혈기 왕성한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어리석고 하찮은 다툼이 얼마나 큰 재앙을 낳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리고 사람이 싸우는 것은 어느 혼자서 나쁜 짓을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두 사람이 모두 잘못해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상대방이 잘못한 것은 훤히 꿰뚫어 보지만, 자기 잘못은 눈을 아무리 비비고 살펴보아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흔히 지니고 있는 간사한 속성을 고발한다. 그 속성을 억누르고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악에 맞서 이길 수 있는 단 하나뿐인 힘,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 악에 악으로 맞서면 불을 키우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악이라는 불은 절대 놓아두지 말고 사랑으로 꺼야 한다.

 

 

<두 노인>

 

예핌 타라스이치 쉐베료프라는 부자 농부와 예리세이 보드료프라는 평범한 농부가 순례를 다녀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는 두 노인이 보여주는 뚜렷한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핌은 깐깐한 성격으로 무슨 일이든지 빈틈없이 해낸다. 술과 담배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풍족한 살림살이를 일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깐깐한 성격 때문에 인간미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자기 능력을 너무 믿고 있어서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고 화가 난다.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도 그는 집을 새로 짓는 공사에만 몰두하다가, 예리세이가 영혼보다도 중요한 것은 없다면서 그를 설득하자, 마지못해 순례를 나선다.

 

순례를 나서기 전에 예핌은 아들에게 자기가 하던 방식대로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다 지시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는 자기가 지시한 대로 일이 잘 굴러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디기 힘들어하고, 심지어 순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돌아가서 자기가 일을 다 해치우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낀다. 그런 그에게는 진정한 신앙심과 사랑이 스며들 수 없다. 순례를 다녀오는 자체가 중요할 뿐, 순례가 지니고 잇는 뜻을 되새겨 볼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예리세이는 성품이 착하고 명랑하며, 마음 편하게 보드카도 마시고 담배도 피운다.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자기 형편이 닿는 대로 선행을 베푼다. 순례를 떠나기 전에도 집안일은 아내와 아들이 잘 할 것이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새로 생기는 애벌을 이웃집 사람에게 빠짐없이 넘기라는 말만 한다. 순례를 떠나자마자 그는 집안일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예핌과 어떻게 잘 다녀올 것이며 순례 때 어떻게 예배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에게 감사할 것인지만 생각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예핌과 예리세이가 헤어지고, 예리세이가 일가족이 모두 죽어가는 집에 들어가면서 예리세이는 하느님이 내리신 분부를 자기도 모르게 실현한다. 죽어가는 일가족을 살린 그를 하느님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중에 순례에서 돌아온 예핌은 뒤쳐졌던 예리세이가 어떻게 자기를 앞지를 수 있었는지 깨닫고 한숨을 쉰다.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항상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리는 내가 이 책에 실려 있는 여러 이야기 가운데 가장 주목한 이야기이다. 이 세상 어느 가치와도 견줄 수 없는 절대 가치를 지닌 것을 찾아나서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내가 쓰는 시간통계법에는 그 가치가 온전히 반영되어 있는가?

 

"그(예핌)는 깨달았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죽는 날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사랑과 선행으로 다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이 하느님이 하신 분부라는 것을."

 

 

<촛불>

 

농노가 해방되지 않았을 때 지주에게 빌붙어 농노를 등쳐먹는 마름에게 맞서려는 농민들을 말리는 한 농부가 옳다는 결론을 내는 이야기이다. 자기들을 밑도 끝도 없이 수탈하고 짐승처럼 부려먹기만 하는 끝없는 욕심에 사로잡힌 마름 미하일 세묘니치에게 깊은 원한을 품은 농민들은 마름을 죽이겠다고 온갖 험악한 욕을 쏟아내지만, 페트로시카 미헤예프라는 농부는 마름이 저지르는 악에 맞서고자 살인이라는 또 다른 죄악을 저지르는 건 안 된다고 강조한다.

 

"농민들은 하느님의 힘은 악을 악으로 갚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착한 일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보 이반>

 

세계 전래 동화집에서 읽었던 이야기라서 아주 빠르게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강한 권력을 원하는 첫째 세몬,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원하는 둘째 타라스,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고 그저 무식하게 일만 하는 셋째 이반이 나온다. 세몬과 타라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지 얻어내지만, 마귀가 꾸민 흉계에 넘어가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무식하고 일밖에 모르는 이반은 마귀가 어떻게든지 손을 써 봐도 걸려들지 않고, 결국 모든 마귀를 죽여 버린다.

 

지금과 같이 불공정하고 타락한 세상은 한 사람이 꾸미는 흉계에도 너무나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땀흘려가며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만이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이반 왕국(?)이라는 이상을 제시한다. 그 안에서 머리를 써서 일하는 사람은 발붙일 곳이 없다. 권력과 제물에 관한 탐욕은 반드시 무고한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다는 사실도 강조하면서(이반과 세몬이 타라스에게 군사와 돈을 만들어주지 않는 까닭), 폭력에도 비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주장(마귀가 타라칸 왕을 꼬드겨 군사들을 이끌고 이반 왕국에 쳐들어가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빼앗고 불을 지르지만, 사람들은 울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일 뿐 저항하지 않는다. 결국 맥이 풀린 군사들은 싸울 의욕을 잃고 해산해 버리고, 마귀는 망연자실한다)도 드러낸다.

 

이야기 전체에 다양한 교훈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교훈은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서 그런지, 이 이야기에서는 계속 드러나는 교훈이 마음속에 와 닿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너무나도 엄혹한 것이어서 말이다. 실제로 이 이야기도 발표된 뒤에 여러 사람들에게서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민중들을 계몽하기는커녕 오히려 현실을 무시하는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 작은 악마는 빵 조각을 보상하였는가>

 

탈무드에 나오는 '악마가 사람에게 준 선물'이라는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 잔을 마시면 여우처럼 꼬리를 흔들며 교활해져 서로를 속이고, 두 잔을 마시면 심술 사나운 이리처럼 서로 싸우고, 세 잔을 마시면 돼지처럼 이성을 잃어버리고 욕지기가 치밀어오를 정도로 지저분해진다. 술이 일으킬 수 있는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탈무드는 종교전설을 그대로 나타냈지만, 톨스토이는 그를 반박하면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속성을 사람이 스스로 일깨우는 것이 죄악이라고 이 이야기에서 주장한다. 종교전설이 지니고 있는 안개와 같은 환상이 햇빛처럼 뚜렷한 현실로 바뀌면서, 개인이 도덕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개인 책임론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람 안에는 여우와 이리와 돼지가 지니는 속성이 모두 있는데, 하느님이 내리신 은총인 곡식으로 밥과 빵을 만들어 먹지 않고 악마가 유혹하는 대로 술을 빚어 마신다면, 그 속성이 드러나 사람은 사람이 아니게 된다고 경고한다. 시름을 술로 잊으려다가 오히려 알코올 중독에 빠져 너무나도 무기력해지고 열심히 살아갈 가장 적은 의지마저도 잃어버리는 민중들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다. 막심 고리키가 쓴 소설 '어머니'에서도 틈만 나면 술에 취해 아내를 마구 패는 남편이 등장하지 않는가?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예전에 이것과 비슷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여러 다른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톨스토이가 교훈을 드러내고자 각색한 것 같다. 자기가 소작하고 있는 땅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바흠을 본 악마가 계략을 짜고 거기에 바흠이 걸려든다. 악마가 의도한 대로 여자 지주에게서 땅을 산 바흠은 자기 땅이 생기자 땅에 집착하기 시작하고 재산에도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이웃들과 재산 때문에 틈만 나면 싸우고, 악마는 쾌재를 부른다. 아귀 같이 계속 재산을 불려나가던 바흠은 자기 땅이 계속 넓어지기를 바라고, 마침 어떤 나라에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그 나라에서는 땅을 헐값에 살 수 있다는 솔깃한 소문을 듣고, 당장 그 나라로 간다.

 

여기에서부터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가 나온다. 바흠은 어느 지점에서 출발하여 하루 종일 걸은 곳을 경계로 삼아 그 안에 있는 모든 땅을 헐값에 팔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으니, 해가 지기 전에 출발지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된다는 것이다.

 

욕심으로 활활 타오르는 바흠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자 출발점에서부터 멀리 돌아가다가, 시간에 쫓기면서 나중에는 쉬지도 못하고 계속 뛴다. 그렇게 뛰어 간신히 출발점에 도착하지만 바흠은 너무 지쳐 죽어버리고, 그에게 실제로 주어지는 땅은 그가 죽은 자리에 묘지를 만들 땅뿐이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미하일이 얻은 두 번째 깨달음과 이 이야기를 연관하여 생각해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달걀만한 씨앗>

 

인류가 하느님을 경배할 때는 달걀만한 씨앗이 있었고, 그 씨앗에서 난 곡식을 먹은 오랫동안 젊고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인류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자 인류에게 풍요로운 먹을거리를 주고자 하느님이 내린 씨앗도 갈수록 작아졌고, 인류는 더는 예전처럼 그들이 좋아하는 젊음을 오랫동안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젊음 또한 하느님이 내리신 은총이며, 그 은총을 영광으로 여기고 그에 고마워할 줄 아는 이들만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다만 곡식과 땅을 팔고 사는 거래 자체가 죄악이며 오로지 노동만이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은 원론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있을지언정, 이미 공산주의가 불러온 무시무시한 폐해를 뼈저리게 경험한 현대인들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논리이다. 나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뜨악한 기분이 좀 들었다. 아무리 다가가려고 해도 이상은 역시 아상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마지막에 왕이 세 번째 노인에게 지금은 왜 달걀만한 씨앗이 나지 않고, 노인이 손자와 아들보다 왜 훨씬 더 건강한지 묻자 노인이 한 대답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문하신 두 가지 까닭이란, 다름이 아니오라 세상 사람들이 제 품으로 살아가기를 그치고 남의 것을 넘보게 되었기 때문이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의 뜻을 좇아 살았사옵니다. 제 것을 가질 뿐, 남의 계획을 탐내지 않았던 것이옵니다."

 

 

<대자(代子)>

 

대부(代父)에게는 대자(代子)가 있기 마련이다. 이 이야기에서 대부는 하느님과 같은 신비로운 존재로 나오고, 대자는 평범한 소년으로 나온다. 대부를 하느님, 대자를 사람으로 봐도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다.

 

대자는 대부를 찾아가다가 대부를 만나 그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대자는 대부가 들어가지 말라고 지시한 '금단의 방'에 들어가서 온 세상에 죄를 퍼뜨리고 자기 부모와 대모를 망하게 하는 죄를 저지른다. 대부는 대자가 지은 죄를 씻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대자는 그대로 따른다. 몇 번이고 혼란과 회의가 찾아오지만 그는 세 가지를 깨달으면서, 대부가 알려 준 은자가 지시한 대로 냉과리(덜 구워서 연기와 그을음이 나는 숯)에서 사과나무가 자라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1. 아낙네가 걸레를 깨끗이 빨았을 때 비로소 탁자를 깨끗이 닦을 수 있었다. 그처럼 자신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 마음을 맑게 할 때 다른 사람 마음도 맑게 할 수 있다.

 

2. 농민들이 받침대를 탄탄하게 고정시켰을 때 수레바퀴로 쓸 나무를 휠 수 있었다. 그처럼 자기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삶을 하느님 안에 탄탄히 고정시켰을 때 굽힐 줄 모르는 악한 고집도 꺾인다.

 

3. 거간꾼들이 피운 화톳불도 불기운이 강해졌을 때야 비로소 생나무가 탔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마음이 뚜렷하게 타올랐을 때 다른 사람 마음도 타오르게 할 수 있다.

 

 

<머슴 예멜리얀과 빈 북>

 

그야말로 동화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머슴 예멜리얀이 우연히 선녀 뺨 칠 정도로 아름다운 아내를 얻는다. 그 아내를 본 왕이 아내를 빼앗고자 온갖 흉계를 꾸미지만, 아내가 지니고 있는 초능력 때문에 무슨 수를 써도 안 된다. 나중에 왕이 아내도 어쩔 수 없는 기가 막힌 꾀를 짜낸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가서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찾아오라'

 

그야말로 생억지지만, 예멜리안은 나름대로 답을 찾아 돌아온다. 하지만 왕이 억지를 부리자 예멜리안도 억지를 부리면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가져온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두들기자, 왕이 거느리는 군대가 모두 그를 따라가고 그가 그것을 부수자 군대가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책을 읽으면 된다.

 

 

<세 아들>

 

아버지(하느님)가 세 아들(사람)에게 재산과 토지(생명)를 나누어 주며, 자기처럼 살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한다.

 

첫째 아들은 흥청망청 즐기면서 살다가 재산을 탕진한 뒤, 도와주지 않는 아버지를 저주하며 죽는다. 둘째 아들은 첫째처럼 되지 않으려고 재산을 모을 궁리만 하다가 결국 재산은 재산대로 바닥나고 삶은 삶대로 헛되이 보낸다. 그 역시 도와주지 않는 아버지를 저주하며 죽는다. 셋째 아들은 첫째와 둘째처럼 되지 않으려고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본다. 그 결과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좋은 일을 베풀어 주었으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자는 삶은 쾌락이 연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에게 귀의하지 않았으므로 삶이 띠는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허무 속에서 신을 부정하고 저주하며 죽는다(첫째 아들). 어떤 자는 현실 세계에서 열심히 살지만 역시 신에게 귀의하지 못했으므로 공허해진다(둘째 아들). 어떤 자는 신이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남에게도 그같이 하라고 명령하므로, 사람도 신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 따라 산다(셋째 아들).

 

다 좋은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자아실현을 목표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둘째 아들로써 톨스토이가 드러내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