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아버지
이중원 지음, 김홍모.임소희 그림 / 다산북스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멋들어지게 정복을 차려입고 휴가를 나가기 전에 부모님에게 연락해 드리면, 부모님께서는 그때부터 아무 것도 제대로 못하고 집에서 나만 기다리셨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조금이라도 늦는다 싶으면 어머니는 나를 걱정하는 말씀을 몇 번이고 하셨고,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신문이나 TV를 보시다가 몇 번이고 현관문 쪽을 쳐다보셨다.

 

그러다가 내가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얼른 뛰어나와 나를 와락 끌어안고 우리 똥강아지 왔냐면서 등과 엉덩이를 탁탁 두들기며 집안으로 이끄셨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가만히 신문이나 TV를 보고 계시다가, 내가 인사를 드리려고 방으로 들어가면 그때야 푸근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셨다.

 

그 손을 잡고 나는 아버지 얼굴을 쳐다보았다. 흰머리가 눈에 띄게 많이 늘어났고 얼굴에도 주름이 꽤 많다. 내가 그 흰머리와 주름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지금까지 지독하게도 부모님 속을 많이 썩게 한 것이 너무나도 죄송하다. 부모님 가슴에 박힌 굵은 못은 오로지 자식만이 뺄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어떻게 해 드려야 그 못을 다 뺄 수 있을지 방법이 뚜렷하지 않으니, 그저 걱정스럽기만 하다.

 

아버지는 도대체 나에게 어떤 분이셨는가. 외모와 성격을 꼭 닮은 것일 뿐, 그 아상도 그 이하도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도대체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가? 이병 계급장도 없던 훈련병 시절부터 어엿한 병장이 된 지금까지 나는 그에 관해 무던히도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 책 '대한민국 아버지'를 읽으면서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께서 우리 집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가늠해 보았다.

 

6, 70년대 혹독한 개발독재 시대에 아버지 세대는 한창 배우고 일할 젊은이와 중년으로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지키는 주역이었다. 마을을 지키는 듬직한 당산나무와 같은 존재인 아버지를 아내와 자식들은 그만큼 존경하고 대접해 주었고, 사회도 그들을 존중했다. 하지만 저자가 서문에 밝힌 것처럼 대한민국을 이만큼 일으켜 세운 아버지 세대는 요즘은 집안에서나 사회에서나 권위를 잃어가고 있다.

 

이 책 '대한민국 아버지'를 지은 이중원 씨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그동안 든든한 서까래 구실을 거뜬히 해낸 아버지들이 권위를 잃고 방황하면서, 사회를 이루는 근본인 가정이 무너져 사회가 이토록 어지러워지고 혼탁해졌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방황하는 대한민국 아버지들이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들이 다시 가정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초라해진 아버지를 존중해 주면 좋겠다는 소망르 담아서, 자기가 만난 한 가정에서 아버지였던 이들이 살아온 눈물겨운 이야기를 요란하지 않게 풀어냈다. 굵직한 펜으로 투박하고도 거침없이 그린 것 같은 삽화가 이야기와 어우러져 매우 강한 느낌을 전달한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준다고나 할까. 책을 처음 쥐어들었을 때 손에 전해진 그 느낌과 누런 표지까지 한꺼번에 생각하니, 진한 된장 국물과 같은 깊은 맛이 느껴진다.

 

그 깊은 맛은 아버지들이 그동안 얼마나 묵묵히 열심히 일했는지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아버지들은 그렇게 일한만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그저 한 결 같이 고달프고 슬프기만 하다. 한 대기업에서 노동자로 15년 동안 일하다가 위암으로 죽어가면서, 자기가 고통 때문에 울부짖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자식들에게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한 남자. 야구선수인 아들을 둔 대리운전자. 자기를 고아원에 두고 떠난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자식을 놔두고 평생 동안 아버지를 찾아다녔지만, 아들마저 자기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 아내와 아들이 살던 옛집으로 찾아간 한 남자. 아들을 병과 사고로 떠나보낸 남자. 기러기 아빠 신세를 한탄하다가 아내와 자식들이 돌아가겠다는 말 한 마디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남자. IMF 때문에 회사에서 잘려 아내와 자식 눈치를 하루에도 몇 번씩 봐야 하는 남자……

 

우리 아버지 이야기가 이 책에 실린다면, 과연 그 제목이 무엇일까? 지금까지 한 가정을 묵묵히 지켜온 아버지께는 대단히 시례인 말일 수도 있지만, TV나 신문에서 보는 불우한 사람들처럼 가정 형편이 그토록 어렵지는 않았다고 나는 느꼈다. 여전히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호되게 꾸중을 들어도 드릴 말씀이 없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참 많이도 아버지 속을 썩였다는 사실이 더욱 심하게 가슴을 쥐어짠다. 나만 아무 탈 없이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했으면 아버지는 굳이 그토록 근심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그 많은 흰머리와 주름살도 지금보다 절반은 적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남기신 빚은 어떻게든지 돈을 벌어서 갚으면 그만이었겠지만, 자식이 삐뚤어지는 것은 아무리 아버지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손을 써 원하는 방향으로 돌려놓기가 어려운 것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자식 때문에 속이 썩는 아버지'라는 제목을 생각하니 갑자기 심한 발작이 일어나려고 한다.

 

모든 휴가가 다 그렇지만 주말 외박은 특히 짧았다. 부대로 돌아가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는 똥강아지 간다면서 현관까지 따라 나오셨고, 아버지는 조용히 웃음을 머금으며 열심히 하라는 한 말씀만 남기셨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예전에 느꼈던 그 든든함도 그 속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막중한 자리에 앉아 계시는 분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아버지' 가운데 한 분인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런 아버지를 나는 존경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지른 불효를 항상 죄송하게 생각하며, 헛되이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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