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지기
조창인 지음 / 밝은세상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부모님 살아계실 때 꼭 해드려야 할 45가지'를 읽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나는 지금까지 몇 가지나 해드렸는지 확인하고, 못 해 드린 것을 어떻게 해 드릴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책에 나오는 대로 반드시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은 곧 접었다. 부모님마다 원하시는 것이 다를 것이며, 내가 어떻게 부모님을 속상하게 했는지 잘 알고 있는 만큼, 내가 부모님 가슴에 박은 못을 어떻게 빼드릴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님 연세가 올해에 벌써 50대 초중반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흘러간 시간은 절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어서, 그토록 나와 부모님 사이에 갈등이 많았던 10여 해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부모님 속을 썩였는지는 추산할 수조차 없고, 내가 걸어야 할 길도 아직 제대로 닦지 못했기에 해야 할 일은 태산처럼 쌓여 있다. 그런 형편에서 과연 내가 얼마나 부모님에게 효도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부모님이 만약 일찍 세상을 떠나실 수도 있다는 걱정까지 머릿속을 어지럽게 한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할 시간조차 없다. 지금 이 순간에 온 힘을 기울여 집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여러 책에서 읽고 깨달아 놓고도, 부모님이 돌아가실 날을 생각한다는 것은 아는 바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모님이 바라시는 대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서 세상 앞에서 떳떳해지자고 마음먹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도, 부모님에게서 차츰 늘어나는 흰 머리카락과 꼬불꼬불한 주름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버린다. 나 때문에 얼마나 속이 상하셨으면 저렇게 되셨을까……군대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조직'이라는 정훈 교육 내용 때문에 나도 모르게 모든 가능성, 특히 안 좋은 일이 벌어질 확률을 염두에 두는가 보다.

 

특히 이 책 '등대지기'에 나오는 어머니처럼 부모님이 치매(알츠하이머 병)에 걸리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하면, 그저 한숨밖에 안 나온다. 기억을 없애고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가장 기본인 품위마저 지키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치매는, 그 병에 걸리지 않은 주위 사람들을 너무나도 지치고 힘들게 한다. 치매에 걸린 부모님 때문에 한 가정이 파탄에 이르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보고 들었다. 그런 부모님도 지극히 모시는 이야기는 전래설화에서나 볼 수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요즘같이 인간미가 없는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라고 해서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기가 힘들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 세상을 부정하기만 한다는 지적도 하기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세상이 그렇게 살벌하고 메마르지많은 않다고 가르쳐 주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이 책 '등대지기'를 쓴 조창인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이미 '가시고기'와 '첫사랑'을 읽으면서 조창인이 쓴 소설이 지닌 매력에 푹 빠졌던 터라, 중대 사무실에 있는 낡은 나무 서랍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작가를 확인하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당직을 서면서 소설을 읽는 편안한 기분은 꽤 즐길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그 편안한 기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불편한 느낌이 메우기 시작했다. 이건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 부분까지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구명도에서 등대지기로 일하는 주인공 재우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 죽도록 미워한다. 재우가 어머니와 형제들이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숱한 괴로움과 좌절 그 자체였다. 그를 누구보다도 사랑해 주고 보듬어 줘야 할 가족들이 그에게 너무 큰 고통을 안겼다. 재우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억 속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재우가 그토록 좋아했던 난희네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어머니는 난희를 좋아하면 안 된다고 그토록 심하게 그를 말렸으며, 그런 그런 어머니가 싫고 창피했다. 형과 누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무엇이든지 어중간한 재우에게 어머니는 결코 잘 대해주지 않았다. 형이 재우를 심하게 패는데도 어머니는 옆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말리지는 못할망정 심지어 거들기까지 했다. 어머니 대신 누나라도 재우를 잘 챙겨줄 수도 있었지만, 누나나 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형은 매우 큰 회사에 취직해 잘 나가는 직장인이 되었고, 누나는 정치인에게 시집을 가서 남편이 권력을 잡기만을 바라며 나름대로 팔자가 잘 풀렸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어중간하기만 했고 가정에서마저 편안함을 찾지 못해 어떻게든지 발전하지도 못한 재우는, 고만고만한 말단 공무원이 되어 등대지기가 되었다. 형제끼리 서로 연락을 끊은 지는 꽤 오래 되었다. 형과 누나는 재우를 너무나도 창피하게 여겼고, 그런 형과 누나를 재우는 증오했다. 그런 그들이 모시고 있는 어머니에 관한 애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족이 아니라 남남과 같았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맡기 싫은 형과 누나가 떠올릴 사람은 재우밖에 없었다. 어머니에 관한 좋은 기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재우는 당연히 어머니를 맡기 시작한다. 하지만 형과 누나는 이런저런 까닭을 들이대면서, 심지어 재우를 속이기까지 하면서 결국 어머니를 재우가 있는 구명도에 보낸 뒤 연락을 끊어버린다. 한 달만 부탁한다고 눈물을 보이면서까지 재우를 설득했던 형수는 구명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형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고, 누나는 어머니 때문에 남편이 선거를 치르는데 해를 입을 까봐 연락을 끊는다.

 

그토록 미워했던 어머니, 게다가 치매에까지 걸려 가는 곳마다 동물처럼 행동해 모든 사람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어머니를 모시게 된 재우는 극한까지 치밀어 올라버린 증오와 그래도 어머니라는 자식 된 도리에서 나오는 생각 사이에서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방황한다. 어머니가 그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공부 잘 해서 나중에 어머니를 잘 모실 줄 알았던 큰아들과 딸이, 막상 다 자라자 나 몰라라 하면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대 놓고 야멸차게 대할 줄이야.

 

소설 초중반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느릿느릿 이어나갔다. '가시고기'와 '첫사랑'에서도 그랬듯이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등대지기로 일하다가 형과 누나에게 속아 어머니를 모시게 되는 현재와 난희와 가족에 대한 애증이 수도 없이 엇갈리는 과거를, 뒤섞어서 차분하게 썼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작가가 '가시고기'와 '첫사랑'과는 다르게 이 소설을 썼다고 봐야겠다. 앞에서 말한 두 소설에서는 눈물겨운 부성애와 연애를 처음부터 분명히 드러냈다. 그 뒤 다정다감하면서도 치밀한 느낌을 문체와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 책 '등대지기'에서는 100여 쪽을 넘겨도, 모성애와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100여 쪽을 읽으면서 나는 너무 괴로웠다. 차분하게 느리게 흐르는 이야기는 읽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편안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부모님과 거의 항상 대립하면서 눈에서 불꽃을 튀기기만 했던 시절이 떠오르자, 머리카락을 모조리 쥐어뜯어내고 싶을 정도로 온몸에 심한 발작이 일어나려고 했다. 모두 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생긴 일이다. 터무니없는 망상에 잠겨 있던 내가 부모님 가슴에 칼을 박은 것이다.

 

그런 내가 나이를 좀 더 먹은 그제야 효도를 좀 해 보겠다고 할 때 이 책에서처럼 부모님을 증오하게 된다면, 그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나는 그런 죄악에 물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재우처럼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런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나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중반부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간신히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 때문에 등대 직원들과 상사들에게 하루에 몇 번씩이고 잔소리와 호통을 들어가며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재우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다. 하지만 퇴직한 뒤에도 재우와 등대를 찾아오는 정 소장에게서 모성애와 자식 된 도리에 관해 나지막하지만 엄한 충고를 수시로 듣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게 어머니가 재우에게 지니고 있던 진심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결국 모성애는 위대했다. 치매도 본능과 같은 모성애를 막지 못했다. 재우는 그 모성애 덕분에 죽음에서 벗어나면서 그동안 이해하지 못한 모성애를 가슴 깊이 새기고, 등대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정 소장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배를 타려는 재우를 보면 매우 안타깝다. 사랑도 떠나고 형과 누나와는 계속 연락하지 못하고 하반신이 마비되는 주인공을 보며 어찌 안타깝고 쓸쓸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그 결말에 내 마음이 영향을 받아 침울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벅찬 가슴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그 느낌은 '가시고기'와 '첫사랑'을 읽으면서 느낀 것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다. 세 가지 다른 느낌이 내 안에 모였다. 그리고 하나가 되었다. 그 순간 삼색 비빔밥(?)과 같은 세 가지와는 또 다른 풍요로운 감정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작가가 드러내려고 했던 세 가지 사랑이 지닌 위대한 힘, 곧 부성애, 모성애, 연애를 모두 가슴 깊이 느끼면서 나오는 것이리라. 이런 다채로운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작가에게 그저 깊이 고마워할 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내 안에 스며들었다고 해서 그저 감동만 하고 있을 까닭이 사실 전혀 없다. 나는 여전히 부모님과 나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계속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불쾌한 기분이 나중에 현실이 될까봐 여전히 걱정한다. 앞날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며, 지금 내가 한 것이 모여 앞날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는 것이 행동에 반영되지 않는다.

 

이런 일은 원래부터 지니고 있기는 했는데 군대에서 더욱 강해진 나쁜 습관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것이다. 나쁜 습관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쓴 뒤에는 그런 재수 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 그저 부모님이 살아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위기의식을 항상 되새기고,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 내가 박은 굵은 못을 빼드리고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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