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좋은생각
김미숙 외 좋은님들 지음, 김동화 그림 / 좋은생각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내가 처음 중대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그 무섭다는 해병대 실무 부대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될 지 몰라,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도대체 왜 혼나는지 알 수도 없으면서 그저 계속 욕먹고 때때로 얻어맞기도 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서, 내가 선임들이 가르치는 것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 되새겨보고 행동하느라, 후반기 교육 기간에 한창 타오르던 학구열을 일단 숨겨야 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병 6호봉 때부터 마음대로 책 읽고 공부할 수 있다면 호봉제 때문에, 그저 선임들 눈치만 보며 벌벌 떨던 나는 공부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틈틈이 중대 안에 책이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만 엿봤다. 그러다가 당직분대장에게 처음으로 책을 읽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뒤, 나는 허락을 받고 시간이 날 때마다 중대 안에 잡지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허락받고 책을 읽는다고 해도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고, 일병 선임들 눈치를 계속 봐야 했기에, 꼼꼼하게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하는 책은 사실 읽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일단 가볍고 읽기 쉬운 잡지들부터 읽기 시작했다. '좋은 생각', 'Newsweek', '세아이(세상사는 아름다운 이야기)', '샘터' 따위 온갖 잡지는 나름대로 많이 있었다. 그 모든 잡지를 대대 인사과에서 한 달마다 꼬박꼬박 지원해 주고 있어서, 실무 부대에서 병들고 지친 내 마음을 달래는데 정말 좋은 양식이 되었다.

 

그런 잡지는 매우 얇아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잡지를 읽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나는 내가 읽은 모든 것을 어떻게든지 기록해 놓는 버릇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군대에서는 그런 잡지들을 읽고 나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뒤늦게 기록하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맺힌 눈물을 느낀 뒤 집어치워버렸다.

 

너무 갑작스럽고 난데없는 일이었다. 마음 속에서 누군가 나에게 묻고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가. 그 가운데 살기 팍팍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이야기로 가득한 책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그런 물음을 던지다 보니까 그 기록이 아무 뜻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 책은 몇 권을 읽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몇 십 권을 읽어도 그에 관해 각자 다른 독후감을 쓸 능력이 없을 뿐더러, 설사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 때 느낄 수 있는 진한 감동과 그 글어귀와 정감 넘치는 그림이 내 영혼에 배여 그 일부가 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갑자기 몰려온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너무 놀랐다. 존재가 지닌 어두운 면을 바라보는데 극도로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그 느낌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 정도를 측정하고 싶어서 양자의학과 소립자 물리학에 관한 서적과 자료를 찾아 뒤적거렸지만, 이런 때는 그런 것이 정말 부질없다고 느끼면서 다 집어치우고 싶다. 그런 기준은 차라리 찾아내지 않는 것만도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그렇게 몰라야 하는 것이 있고, 알아도 모른 척 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왜 내가 굳이 그것을 알아내려고 공부해야 하는가. 그 기준을 알아내는 순간 인류는 파멸할 것이 뻔한데.

 

부질없는 짓은 그만두겠다. 굳이 내가 지금까지 읽은 아름다운 글로 한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감상 방법론이고 예술 사조고 뭐고 생각하지 않고 감상한(?) 좋은 그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좋은 음악……이 모든 것이 얼마나 내 영혼을 고양했는지 돌이켜 보면서, 그 느낌을 내 열 손가락에 담아 이 글을 쓴다. 그렇기에 이 글에는 상당히 특별한 뜻을 주고 싶다. 당신에게 특별한 뜻이 있는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 김춘수처럼 나도 그러고 싶다.

 

한 가지 엉뚱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지금이야 웅진주식회사에서 해군과 해병대 장병들에게 10만 권이 넘는 많은 책을 기증에서, 우리 중대에도 겉표지가 매우 세련되고 내용도 알찬 책이 많이 들어와 있기에, 나름대로 많은 자유 시간에 책을 마음껏 읽으면서 군대 안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달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가끔씩 잡지를 정신없이 읽던 이병 시절이 가끔씩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여인 가운데 한 명인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세상은 너무나도 끔찍하지만, 또한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했다.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 같은 괴물 같은 자본주의에 도전한 수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사회주의가 현실에 나타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모순이 생기는 과정을 바라보며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그 당시 가장 뛰어난 사회주의 이론가로 칭송받으면서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여전사처럼 보였던 그녀도, 아늑한 가정과 아이를 같고 싶어했고, 세상에 사소한 아름다움을 바라볼 줄 알았던 아름다운 한 여인이었다.

 

그녀도 '샘터'나 '세아이'와 같은 소박하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잡지들을 분명히 읽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가 그런 잡지를 읽는 모습을 떠올렸다. 공산당 대회에 참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좌파 지식 체계를 공부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으면서도, 여러 대회와 모임과 투쟁판에 내 의지 반 남 의지 반으로 돌아다녔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노래를 불렀던 김윤아에게 빠져들던 때도 생각났다.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나 나에게나 결국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삶은 그저 이상으로만 남아있어야 했던 것인가. 치열한 논쟁과 이상과 현실이 멀어지는 현실에 좌절하고 지쳐버린 이들은, 자기를 잠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불안을 물리칠 방법을 이런 풍요로운 잡지를 읽으면서 찾아야 했던가. 그런 시절이 내가 이등병일 때였기에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이라고 봐야 하는가. 여전히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고,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상주의자이며 감상주의자이니까 말이다. 갑자기 '자본축적론'을 읽기가 싫어졌다. 지금은 그저 '좋은 생각'을 읽으며 '좋은 생각'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따뜻하고 뜻깊은 인물이 되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