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병 정기 휴가 때 서울에 올라가서 미영이 누나를 만났다. 무려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얼핏 보기에는 둘 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누나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고 나는 군대라는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뿐이었다. 둘 다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정말 다행이었다.
 

서로 해야 할 말이 매우 많을 듯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하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다가는 분위기만 다 망칠 듯 해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말로만 시간을 채웠다. 그러면서 종로 아웃백에서 파스타와 쇠고기 갈비 요리를 먹고, 서울극장에서 '아연'을 보고, 나는 모르지만 누나는 알고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지극히 짧은 몇 시간이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몇 년만에 만났지만 헤어짐도 매우 덤덤했다. 나는 서울역으로 가서 부산으로 가는 고속열차를 탔고, 누나는 종각역으로 가서 의정부로 가는 덜컹거리는 전동차를 탔다. 택시를 타고 서울역으로 가면서 도심 속 야경을 바라보고, 부산에서 집으로 가는 무궁화호 안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보면서 문득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 속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나면 항상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때만큼 그런 느낌이 심한 적도 드물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보면 벌써부터 애늙은이 같은 어이없는 소리 한다고 핀잔을 줬겠지만, 그저 내가 느끼는 대로 이야기할 뿐이니 특별히 무슨 문제는 없을 것이다. 문득 벌써 청춘이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무엇이라도 더 많이 해내고 싶다는 생각에 이곳저곳 찾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건드리고 일하기는 했지만, 막상 생각해 보면 별로 한 게 없어서 항상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간 뒤에는 그런 느낌이 너무 심해져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야간 근무를 설 때마다 정신 없이 졸고 있는 당직분대장을 눈 앞에 두고, 정신이 나름대로 멀쩡할 때는 항상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은 마치 의무 같아서 한 번 사로잡히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겨우 22세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10대가 그리워지고 심할 때는 20~21세 시절이 그리워져 견딜 수 없었다.

 

그런 내가 바라보고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가지, 내가 쓴 글이었다. 그 글 안에는 무엇을 쓰는지도 모르면서 정신없이 손가락을 놀렸던 흔적에서부터 회고록까지 온갖 다양한 것들이 남아 있었다. 몸짓을 하면서 흘렸던 땀이 묻어 있었고, 사랑을 하면서 흘렸던 눈물도 배여 있었고, 좋아하는 이들과 마시다가 흘렸던 맥주도 고여 있었다. 그런 것들은 흐르는 시간이 있었기에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었고, 시간은 즐거움을 주는 척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추억으로 만들어 나를 고독하게 했다. 그러면서 청춘도 빼앗아서 절대 찾아갈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 버렸다.

 

요즘이야 의학이 발달해서 평균 수명을 80세 넘게까지 늘리네 어쩌네 하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지만, 일단 기본으로 70세까지 잡아도 이 책을 쓴 작가 김연수는 어느덧 딱 절반을 넘어섰다. 긴 운동장을 이제 반 정도 돌았는데, 지나온 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에 20대라는 정말 소중한 청춘이 있었고, 그 안에 작가를 사로잡은 문장이 있었다. 머리 끙끙 앓아가며 공부할 필요가 없는 쉬운 문장으로 자기가 겪었던 청춘을 풀어냈다. 읽는이가 글쓴이를 동경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한시와 하이쿠를 즐겨 인용하면서, 청춘을 아쉽게 흘려보낸 작가로서 그 기억을 한사코 놓지 않으려고 한다.

 

작가가 말한 대로 사실 삶을 설명하는데는 한 문장이면 충분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몇 천 만 마디를 해도 내 인생을 완전히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쓴 김연수라는 작가가 부럽다. 나도 청춘을 사로잡은 한 문장을 찾아나서고 싶다. 구구절절 내가 살았던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결국 그런 모든 이야기를 함축하는 그런 문장을 찾아서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지요. 이런 편안한 책을 선물해 주신 미영이 누나. 고맙습니다. 언제나 한없이 고맙기만 한 당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