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1
조창인 지음 / 세상의아침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이제 사랑을 다룬 작품에는 질렸고, 내가 쓰는 글에 사랑을 굳이 다루고 싶지도 않다. 원래 남자와 여자는 하나였는데 제우스가 그 무지막지한 괴물이 신들을 괴롭힐까봐 겁이 나서 벼락을 내려 괴물을 두 쪽으로 쪼개버렸다는 그런 황당한 이야기도 이제는 듣고 싶지 않다. 노래에서든 소설에서든 지겹도록 우려먹는 그 한 가지 주제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요즘에는 책을 읽을 때도 웬만하면 사랑을 다룬 소설은 읽지 않으려고 한다. 노래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책은 분명히 온갖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가시고기'에서 이미 찡한 느낌을 받았던 나는 노드중대 쉼터에 있는 책꽂이에서 여러 가지 책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조창인이 썼다는 그 까닭 하나만으로 주저하지 않고 책을 뽑아들고 말았다. 그리고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다 읽은 뒤에는 '가시고기'를 읽었을 때 느낀 것과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사랑만이 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감동과 슬픔에 휩싸였다.

 

상대가 없으면 정말 못 살 정도로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남자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남겨두고 스코틀랜드 애든버러로 유학을 떠난다. 열심히 공부한 남자는 외과 수술에서 세계 최고 권위자가 된다. 굉장한 성공을 손에 거머쥔 남자는 여자와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정작 여자는 무서운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살리고자 발버둥쳤지만 그가 정작 자기가 지닌 의술로는 여자를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철저하게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는 작가가 얄밉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진우와 해연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너무 끔찍하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는데 정작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진우가 느끼는 모든 것을 생각해 본다. 상심, 고통, 절망……말이 삼라만상을 표현하는데 얼마나 한계가 있는 것인지 제대로 느낀다. 

 

게다가 작가는 의사만이 느끼는 그 번민을 이용하여 진우가 느끼는 온갖 감정을 독자들이 더욱 확실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죄인에게 판결을 내리는 판사도 아니면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사람들에게 사형 선고를 해야 하는 그 기분이 어떨까? 환자들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기에 자기에게 사형 선고를 받고 세상을 등져야 하는가? 일이 고될 때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천직이라는 사명감으로서 버텨야 하는 이들에게, 죽어가는 환자를 자기가 살리지 못한다고 실토해야 한다는 현실은 죽음보다 더 싫을 것이다.

 

의사들이 힘들고 괴로울 때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앞에서 말한 그런 온갖 고민에 휩싸여 방황한다고 한다. 생명을 정의하는 다섯 가지 방법 따위는 필요없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경계는 여전히 모호하며 그런 주제마저 파고든다면 의사는 쓸데없이 더욱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다. 자기가 배운 지식과 현실 사이에 나타나는 괴리를 더욱 분명히 느낄수록 마음 안에서 상처가 더욱 쓰리고 커질 뿐이다.

 

진우도 의사이다. 그런데 진우가 치료할 수 없다고 인정해야 하는 환자가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해연이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자기 전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병리학 논문을 쓰면서까지 해연을 살리고자 발버둥치지만, 결국 해연은 진우에게 사랑해서 행복했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죽기 전에 진우와 해연이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읽으면서 '기억 속으로 걷기'가 저절로 생각났다. 

 

그렇게 해연은 진우를 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그러나 진우에게서 그녀가 완전히 떠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는 실명 위기에 처한 진우의 왼쪽 눈을 살리고자 자기 눈을 기꺼이 기증했다. 수술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성공했고 진우는 다시 의사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써 해연은 진우 안에서 다시 태어나 영원히 그와 함께 있게 되었다. 그들 둘 사이에 꽃피었던 아름다운 사랑은 진우가 소망원을 운영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서글픔과 감동이 서로를 휘감으면서 심장을 정통으로 파고들었고, 곧바로 피에 섞여 온몸으로 퍼졌다.

 

우주를 정복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과학도 사랑이 보여주는 기적과도 같은 일은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종교나 사랑 같은 것들은 과학이 다룰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하지만, 왠지 모르게 너무 궁색해 보인다. 과학에 열광하는 나라서 그런지 저절로 그런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그러나 곧 온몸을 휘감은 가슴을 미치도록 저리게 하는 사랑만이 가져다 주는 애틋한 감정에 다시 온몸을 다시 맡기면서,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 무섭다는 해병대 선임이 부르는 소리마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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