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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고기 - 양장본
조창인 지음 / 밝은세상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지금처럼 작정하고 읽지는 않던 시절에, 내가 즐겨 읽었던 책은 집에 있는 큰 책꽂이에 있는 소설책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나면 어떤 책이라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에 그런 소설책은 언제 읽어야 한다는 계획이 이미 세워져 있다. 그런 식으로 책을 읽으면 아무래도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읽을 때보다는 편안하게 책을 즐기기가 좀 어렵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이 없던 그 때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쨌든 그 때 '돼지들', '나도 때론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진달래꽃 피거든', '여자는 죽어야 한다', '제 3의 정사' 따위 여러 가지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지금 그 내용을 기억해서 독후감을 쓰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런데 이 '가시고기'라는 책은 희한하게도 앞에서 말한 책 가운데 읽은지 가장 오래되었는데도 그 때 마음이 움직였던 흔적이 매우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독후감을 쓰기가 쉽다. 훗날 군대에서 '첫사랑'을 읽으면서 두 작품을 견주다 보니까, 내 안에 남아있던 그 흔적이 다시 어떤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반응을 표현하고 싶어서 나는 지금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리고 있다.
'첫사랑'에서는 남녀 사이에서 나타나는 사랑을 다룬 작가는, 이 작품에서는 그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내리사랑인 부성애를 다루고 있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새끼에게 위험이 닥치면 새끼를 입 안에 넣어 보호한다는 고기가 바로 가시고기라는 사실만 알면 말이다.
아무리 많은 보험 상품에 가입한다 하더라도 병을 고칠 방법이 없거나 완치를 보장할 수 없다면 희망을 찾기 힘들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그런데 주인공인 아버지에게는 희망이 아예 없어 보였다. 아이 병원비를 대느라 가정 재정 형편은 파탄에 이르렀으며, 막대한 돈을 써도 아이는 갈수록 숨통을 거세게 조이는 백혈병 때문에 저승사자에게 더욱 가까이 느끼며 무서워한다.
직장 후배이면서 주인공을 사랑하는 여진희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주인공을 도우려고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도움을 주기는 너무 어렵다. 특히 여진희는 주인공을 가장 많이 도우면서도 주인공을 사랑하기에 아이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는 주인공을 더욱 괴롭게 하고 자기도 힘들어한다. 자기는 물론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이, 아버지, 여진희. 세 사람 모두 희망을 찾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쇠약해졌다.
끔찍한 백혈병에서 가련한 아이를 구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골수 이식뿐이지만 골수 이식은 이식 대상자뿐만 아니라 이식 희망자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안기는 따위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에 골수를 기증할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한 일본 여자가 골수를 기증하겠다고 나서 아이를 살릴 길이 열린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하고 아이는 눈에 띄게 건강을 되찾는다. 그러나 작가는 비정하게도 '첫사랑'에서처럼 한 사람을 죽게 했다. '첫사랑'에서는 병에 걸린 여자가 죽지만, '가시고기'에서는 안타깝게도 아이 대신 아버지가 죽는다. 책을 읽어보면 왜 그런지 정확하게 알 수 있지만, 나는 그냥 아버지가 내리사랑을 쏟느라 모든 힘을 써버린 탓이라고 생각하고 넘기고 싶다. 아버지가 묻힌 묘 앞에 서 있는 비석을 만지면서 아빠 어디 갔냐고 여진희에게 묻는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베풀었던 사랑을 먹고 자기가 살아서 땅을 딛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갑자기 요즘따라 표가 나게 나이가 들어보이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예전에는 신경을 덜 써서 그런지 느끼지 못했는데, 군대에 들어간 뒤 이상하게도 아버지 얼굴이 빠르게 변하는 듯해서 겁이 난다. 아버지께서 말없이 나에게 베푸셨던 사랑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생각이 떠오른 김에 기회가 된다면 빨리 아버지를 찾아뵈어야겠다. 소주잔이든 맥주잔이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술을 주고받으면서 그동안 쌓였던 말을 원없이 털어놓아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