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보급판 문고본)
정재승 지음 / 동아시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대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생각기술'과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에 깊이 빠져, 르네상스 정신에 걸맞은 지식인이라는, 어쩌면 대단히 황당한 목표를 세우고 목표를 이루는데 필요한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정신이 매우 불안했기에 그 때 써 놓은 글을 분석해 보면 고등학생 때보다도 더 앞뒤가 맞지 않고 논리도 허술했다. 목표를 이루기 전에 내가 그때까지 부족하나마 쌓았던 것들을 허물어야 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목표를 세우다 보니까 과학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자연스레 생각했다. 일단 그때까지 나는 과학에 완전히 흥미를 잃고 있었다. 수능을 치려고 잠깐 과학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과학은 나한테는 이상할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대학교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과감하게 교양물리학 수업을 신청했다.

 

교양물리학 수업인데도 진도를 따라잡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수업 시간이 오후 1시라서 맨 앞에 앉았는데도 정신 없이 졸았다. 그러나 그 때 그 수업을 하셨던 안정근 교수님은 학생들이 무엇을 하든지 말든지 진도 나가는데만 열중하셔서, 교수님에게 별다른 지적을 받지는 않았다. 학점도 B+로 그럭저럭 잘 받았는데, 돌이켜 보면 한편으로는 참 고맙고 한편으로는 매우 죄송하다.

 

어쨌든 그 때 수업 교재로 쓰겠다고 교수님이 사라고 말씀하신 책 가운데 한 권이 바로 이 책이다. '물리 이야기'와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라는 책도 주문하셨는데, '시인을 위한 물리학'은 아예 사지도 못했고 '물리 이야기'는 읽다가 머리가 너무 포기했다. 지금 읽어보면 내용은 별로 차이가 없는데도 그때는 희한하게도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가 더 읽기 편했다.

 

그런 것이 바로 대중성인가 보다. 정재승이라는 물리학자가 왜 데이비드 보더니스와 같은 걸출한 대중 저술가로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일단 사람들 머릿속에 굉장히 어려운 것으로 박혀있는 '과학'을 쉽게 풀어내는 재주가 그에게는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교양 과학책을 나름대로 많이 봤지만, 그 가운데 정말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만한 책은 별로 없었다. 내용 자체가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이라도 요리하는 방법에 따라 사람들이 흥미롭게, 그리고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다. 그건 당연히 책을 쓰는 사람 몫이다.

 

정재승 교수는 이 책을 쓰고자 사람들에게 친숙한 영화를 소재로 선택했다. 그런 덕분인지 책표지부터 예사롭지 않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가운데 한 명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명성이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인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야기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스필버그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과학이 발견한 성과에 비추어 볼 때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아인슈타인이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어보면 내가 한 생각이 제법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를 고른 기준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수많은 영화가 나와 있다. 그 많은 영화를 얼마나 봤느냐에 따라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달라질 듯 하다. 물론 영화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가도 책을 쓸 때 작가가 충분히 고려했을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영화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글을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떤 것에 알맞은 상상은 머릿속에 그와 관련된 확실한 기억이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법이다.

 

필자는 그 많은 영화에 나오는 것들이 과학으로 비추어 볼 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낱낱이 밝힌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문제점만 따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름대로 느꼈던 것들도 다채롭게 적어 놓았으며,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제시하고, 나름대로 사람들을 웃기려고 힘쓴 흔적도 남겼다. 너무 문제점만 파고들었다가는 글 쓰는 방식이 약간 독특할 뿐 어차피 지루하기는 똑같은 보통 과학책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앞으로도 이런 책이 많이 나와서 사람들이 과학에 좀 많은 관심을 가지도록 했으면 좋겠다. 그 관심을 토대로 과학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토양을 기르고, 그 위에서 응용, 실용과학뿐만 아니라 기초과학도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제대로 싹텄으면 좋겠다. 그러면 예비 과학도들도 희망을 품을 수 있고,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신바람이 날 것이다.

 

진정한 과학 강국은 국민들이 과학을 깊고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어야 하며, 그렇게 사회를 바꾸는데 이 책과 같은 재미있는 교양 과학책이 단단히 한몫을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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