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전사 비룡소 걸작선 28
로즈마리 셧클리프 지음, 찰스 키핑 그림, 이지연 옮김 / 비룡소 / 2003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집에는 나름대로 책이 제법 많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책을 많이 읽기를 바랐는지 어린이들이 읽을 만한 책을 제법 많이 사 놓으셨다. 그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는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책을 많이 읽었다. 그 책들은 내가 어릴 때는 거실 책꽂이에 당당하게 꽂혀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베란다인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는 뒷방에 처박혀 있다.

 

나는 나이가 어느 정도 든 뒤에도 가끔씩 그 방에 들어가서 책을 뒤적거렸다.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겨울에는 무진장 추웠지만, 여름에는 제법 서늘해서 책을 읽기에 딱 좋았다. 어렸을 때 읽은 책 말고도 부모님께서 읽으셨던 책이 제법 있었는데, 나는 그 쪽을 주로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제목에서 강한 인상을 받고, 책꽂이에서 바로 뽑아 읽은 책이 '태양의 전사'이다. 책을 읽어보니 부모님께서 읽으려고 사 놓으신 것이라기보다는, 어린 나를 위한 것이었는데 내가 안 읽었던 것 같았다.

 

주인공인 드렘은 한 쪽 팔을 못 쓴다. 어느 날 그는 할아버지가 전사가 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자기를 손자로 인정하지 않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드렘은 한 팔을 못 쓰지만 당당하게 전사로 살았던 태로어를 찾아가서 창 던지기를 연습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창술을 열심히 익힌 드렘은 전사 자격 시험인 늑대 사냥에 처음에는 실패하고 친구인 보트릭스가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늑대를 죽여 간신히 살아남는다. 결국 드렘은 양치기로 살아가려고 집을 나오지만, 나중에 양을 공격하려는 늑대 무리를 이끄는 회색 늑대를 죽여 당당한 전사가 되고, 할아버지에게도 제대로 인정을 받는다.

 

좋은 친구와 피우는 우정(보트릭스), 소년만이 할 수 있는 풋풋한 사랑(브라이), 훌륭한 스승이면서 길잡이에게서 배우는 많은 것(태로어)……이 모든 것들이 책을 읽는 나를 즐겁게 했다. 추악한 음모 따위는 이 소설에서 발을 붙여야 할 필요가 없었다. 남들보다 조건은 좋지 않지만 떳떳하게 멋진 전사가 되고 싶어하는 드렘을 보면서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드렘을 그런 모습으로 잘 그려낸 로즈마리 서트클리프에게도 고맙다고 한 마디 하고 싶다. 다시 소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하지만 마냥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나는 얼마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사람인가? 나에게 부족한 것이 있는가? 박사 학위와 안정된 직장도 있는데 도저히 생각할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한탄하는 학자에게 류비셰프는 어떤 경고를 내렸는가? 이런 반성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하는가? 이제는 끝낼 때도 되지 않았는가?

 

게다가 이야기가 진행되는 배경을 생각하다가 그 생각이 쓸데없이 발전하는 바람에 더욱 열이 뻗쳤다. 한 마디로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인 남아메리카이다. 태양신을 믿으며 철로 만든 칼이 최신식 무기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때는 부족끼리 싸우기는 했지만, 무자비한 제국주의 세력 아래 짓눌렸을 때와 견주어 보면 훨씬 더 평화로운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드렘은 전사가 되고 브라이와 결혼한 뒤, 가정과 나라를 지키려고 거대한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십 세대에 걸쳐 찬란하고 독특한 문명을 이룩한 드렘의 후손들은, 진정으로 야만스러운 서양 제국주의에 제물이 되어야 했다.

 

탐욕과 우월감에 물든 제국주의자들에게 태양신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전지전능한 신이고, 그를 섬기는 자기들이 세운 문명이야말로 인류가 본받아야 할 바람직한 것이었다. 자기와 다른 것들은 모두 천하고 가치 없는 것, 심지어 세상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서 사라져야 했다.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찬란한 고대 문명을 철저하게 파괴한 제국주의자들은 아직도 그 위세를 자랑하며 세계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들을 막는데 나는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 왜 이런 즐거운 소설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가? 이런 내가 어리석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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