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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1 - 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장용민 지음 / 시공사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2학년 때 문학교과서에서 이상이 쓴 '오감도'를 배웠다. 글쎄 개성이 없는 아이들이 도로를 달리는 것은 개성 없고 암울한 사회를 나타낸다나, 작가가 어떤 인물인지 생각해 볼 때 광기가 스며들어 있는 작품이라나,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을 독특하게 묘사한 작품이라나 뭐라나. 이런저런 설명을 많이 듣기는 했지만 귀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흔히 나를 좀 아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원래 언어 영역만큼 내가 싫어하는 시험도 드물었다. 수능 자체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내가 보기에 언어 영역은 여러 영역 가운데에서도 다양하게 생각하는 능력을 가장 심하게 망치는 시험이다. 곧 시험이 실력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실력을 팍팍 떨어뜨린다. 자기가 느낀 바대로 답하는 것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만약 반항하면 점수는 깎이고, 부모님과 선생님이 학생을 비난한다. 이런 형편에서 어떻게 학생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글을 쓰면서 독특한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하고 있던 나는 심하게 투덜거렸다.
수업은 재미없었지만 작품 자체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수업과 별도로 나름대로 이상에 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때는 책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 전집'을 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문학 전집을 뒤져가며 '날개', '권태', '거울', '가정', '이상한 가역반응' 따위 작품을 읽었다. 그 여러 가지 작품에서 한결같이 상식과 어긋나고 뒤틀려 보이는 생각과 시선이 제대로 드러났다. 어릴 때부터 삐딱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 반골 기질이 뚜렷했던 나는 그런 생각과 시선이 듬뿍 배여 있는 작품들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도 그런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쓴 장용민과 김성범도 심상찮은 사람이다. 소설 주인공인 장덕희와 정건우도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으킨 사건은 너무 충격이 커서 나는 완전히 얼이 빠져 버렸다. 문제아(?)이며 반역자(?)인 이 두 사람이 얽힌 일과 그 속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말 그대로 상식에 도전하는 것이며 진실과 허구를 알 수 없는 혼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반역은 흥미로운 일이다. 세상을 심하게 못 믿어 항상 반역을 꿈꾸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읽으면, 극도로 불안하여 물질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없애버리는 반물질이 떠오른다. 차이점이 있다면 반물질은 물질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반역하려는 사람은 사회보다 너무 형편없이 약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물리학과 다르게 사회학은 굉장히 많은 변수가 있다. 이상에 가까운 조건이 성립되기 너무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승리하여 세상을 뒤흔드는 일을 많이 봤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이상에 미쳤고(MAD: 소설 속에서 장덕희가 인터넷에서 쓰는 이름이다), 이상처럼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을 뒤집어버리고 싶어하는 장덕희와, 다니던 대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세상에 복수할 방법을 꿈꾸는 정건우가, 인터넷에서 우연히 만난다. 장덕희를 실제로 만난 정건우는 장덕희가 제안하는 바에 끌려 그가 짠 계획에 동참한다. 그들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라는 소설을 지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다. 연재한 소설이 크게 성공하자 그들은 나중에 안기부 비밀 자료실에 침투하여 자료를 빼내오고, 그 자료로 새로운 소설을 지어 올린다. 그 뒤 상상도 하지 못한 엄청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장덕희와 정건우는 자기들이 쓴 소설과 똑같은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자기들이 쓴 소설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조사한다. 그러면서 결국 그들은 조선총독부 아래에 있는 비밀을 알아낸다. '건축무한육면각체'는 조선총독부 아래에 있는 민족 정기를 억누르는 건축물이었다. 그리고 천재 건축가 이상이 그 건물을 설계한 것이다. 단단히 미친 정신병자가 지껄인 헛소리로밖에 보이지 않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은 그 건축물로 가는 길을 몰래 알려주려고 이상이 남긴 암호문이었던 것이다. 비밀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수록 그들은 더욱 위험해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과 그들 사이에 숨막히는 대결이 벌어진다.
상식에 도전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고 바람직한 일이다.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인 '천사와 악마'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도 도대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 혼란을 적절하게 불러일으키는 정교한 이야기 구조(물론 이것은 읽는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전혀 다를 수 있다), 상식으로 알고 있는 역사를 벗어나는 이야기 따위가 많이 나와서 읽을거리가 꽤 풍부하다. 단 그 이야기를 포함한 이 소설을 다 읽은 뒤에 찾아올 충격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저 일본 쪽발이들이 이런 찢어죽여도 시원찮은 짓을 해서 우리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펄펄 뛰든,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면서 기를 찾으려고 하든, 당장 조선총독부 터를 찾아가서 그 건축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든, 무엇을 하든 자기 마음대로다.
일제가 민족 정기를 완전히 없애려고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주요 명당에 쇠말뚝을 박고 바위를 깨고 땅을 파서 쇳물을 붓는 기가 막힌 일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건물, 곧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을 허물고 땅을 파헤치자 그 아래에 박혀 있는 말뚝 9388개가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철저하게 민족 정기를 없애려고 한 일본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땅을 파헤쳐 말뚝을 뽑는 포크레인을 보며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건축무한육면각체'는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다. 단지 '건축무한육면각체'뿐인가? 여전히 숨겨진 진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진실을 파헤칠 용감한 젊은이들, 곧 장덕희와 정건우와 같은 젊은이들이 현실에서 나타나기를 작가들은 꿈꿨던 것이 아닐까? 그저 현실 속에 깊이 파묻히기에 바쁜 겁쟁이들에게 통쾌하게 한 방을 날린 것이 아닐까? 갑자기 주먹으로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아찔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겁쟁이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