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 담백 군대 이야기
주호민 지음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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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한 나는 찬장에 남아 있던 라면 두 개를 신 김치와 함께 삶아 먹고 한숨 푹 잤다. 그리고 깨어나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이상 관련 논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포스트 모던의 입장에서 본 이상의 시>, <일제의 식민지 문화 정책과 이상>, <이상, 그의 이상과 실체> 등 보기에도 숨이 막히는 제목들이 책상 위를 점령하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마지막 남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렵게 논문 제목을 정하고 나서 막상 집필에 들어가려 하니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 가야 할 지 막막했다.

 

 

장용민, 김성범 지음. '무한육면각체의 비밀' 83쪽

 

 

2008년 9월 29일. 힘겹게 눈을 떴더니 어머니에게서 전화 두 통이 와 있었고, 이부자리는 온몸을 자반고등어처럼 뒤집으면서 자는 나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서둘러 이불을 개고, 근질근질한 온몸에 비누거품을 묻힌 뒤 찬물로 씻어냈다. 정신이 어느 정도 맑아지니 온 방이 지저분해 보여서 도저히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약간 남아 있던 밥 먹다 그대로 놔 둔 그릇도 씻어서 찬장에 올려놓고, 화장실에 낀 녹도 솔로 긁어서 없앴다.

 

갑자기 힘이 쭉 빠져서 다시 이부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멍하니 책상과 책꽂이를 바라봤다. 꽉꽉 들어차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책꽂이와 온갖 잡다한 것들이 널부러져 있는 책상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책상과 책꽂이에 걸맞게 나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글을 썼는지 반성해 보면, 결과가 마음에 들 까닭이 절대 없기 때문이다. 그토록 짜증나고 무덥던 여름이 가고 책 읽고 글 쓰기에 가장 좋다는 가을이 왔지만,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어서 그냥 이래저래 시간을 때우고 있다. 2008년 9월을 맞이하면서 새롭게 부풀어 올랐던 벅찬 가슴은 어느새 나를 냉정하게 버린 그녀만큼이나 싸늘해져 버렸다.

 

지난 여름에 제본한 군 복무 결산 자료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2007년 9월, 곧 병장 1호봉 때는 그 어떤 때보다도 더 많은 성과를 올렸다. 2006년 9월에는 일병 2호봉이었기에 글을 쓴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책 읽는 데도 여전히 눈치를 봐야 했지만, 병장이 된 뒤 내 손에 들어온 권력은 막강 그 자체였기 때문에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개인 업무에 몰두할 수 있었다. 2006년은 너무나도 힘들고 서러웠던 시기였기에, 그 시기에 쌓인 설움을 풀고자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썼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운동도 열심히 했다. 막상 상병 6호봉이 되고 나니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7~8월이 그냥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동안 체계를 나름대로 잡아서 그런지, 9월부터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무조건 대대 간부들과 축구를 하면서 체력을 기를 수 있었다. 대대 간부들은 온갖 훈련에 오랜 시간 동안 단련이 된 사람들이라서, 원래 체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나는 그 사람들과 축구를 하면 어김없이 파김치가 되곤 했다. 그런데도 그 파김치를 끌고 체력단련장으로 가서 근육을 키웠다. 대대장 님에게 누구보다도 군 복무를 더 열심히 한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렇게 힘들고 서러웠던 군 복무 때도 그렇게 열심히 자기 개발에 몰두했는데, 막상 그렇게 그리워하던 전역식 뒤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했는가? 결산을 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숱한 망언과 망동으로 얼룩진 지난 2008년보다 왜 2006~2007년이 더 알차게 느껴지는 걸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그런 회의가 끝도 없이 이어지다 보니까 어이없게도 그렇게 싫던 군 복무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는 차원을 넘어서서 생각이고 말이고 모두 멈춰 버린다. 지나간 시간을 내가 어떻게 보냈는지 그대로 드러내는 시간통계라는 객관 자료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현실과 진실은 항상 모순투성이다. 그토록 예전에 대한민국 국군을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던 내가 막상 군인이 되고 난 뒤에는 정훈 교육 모범 사례로 인정 받기까지 했다. 군대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기만 하면 못할 일이 없을 것처럼 기세등등했던 나는, 지금 형편없이 나약해져 버린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며 흐느끼고 있다. 해병대 문화에 진저리를 치던 내가 예비군에 편성되지도 않았는데도, 군복을 입고 거리로 뛰쳐나가 선임들에게 거수 경례를 붙인다.

 

그런 모순 때문에 찾아오는 혼란은 나만 괴롭히는 것일까? 대한민국에서 군대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기억을 남기는 걸까? 자기가 복무한 중대가 있는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군대에서 보낸 시간에 진저리를 치는 이들이, 술자리에 모이기만 하면 군대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그것은 순수한 향수인가, 아니면 떼어낼 수 없는 애증인가?

 

그런 물음은 논리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이며, 설사 대답한다 하더라도 정답이라고 볼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그저 그 평가하기 모호한 시절을 회상하게 해 주는 것, 그리고 좋았던 때를 생각하면 웃고 열을 받을 수밖에 없던 때를 생각하면 화를 내며 육두문자를 퍼부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만화책이 나온 뒤 수많은 누리꾼들이 열광했다. 아마 앞에서 이야기한 그런 조건을 만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에 날카로운 비판을 퍼붓기로 유명한 '한겨레'에서도 '애국적 과잉이 없는 솔직한 복무담'이라는 평을 내릴 정도로, 이 책은 솔직담백하다. 군대에 관한 좋다 나쁘다 같은 이런저런 평가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예비역들이 느꼈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

 

물론 예비역들이야 다 알다시피 어디에 복무했느냐에 따라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은 천지 차이이지만, 그래도 예비역으로서 느낄 수 있는 공통인 요소 또한 이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느낄 수 있는 감동은 예비역들에게는 한 결 같을 것이다. 예비역들뿐만 아니라 군대에 가기 전인 현역 대상들에게는 재미있는 군 복무 안내서로, 군 복무를 하는 아들을 둔 부모님들에게는 고생하고 있을 아들 생각하면서 웃고 울게 만드는 책으로,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낸 여자들에게는 남자친구가 보낸 다정하고 솔직한 편지와 같은 책으로. 모두에게 나름대로 뜻이 있다.

 

주호민 예비역 육군 병장은 군 복무 결산을 이 책 '짬'으로 끝냈다. 그 뒤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를 신나게 그리고 있다. 나는 예비역 해병대 병장으로서 간신히 나름대로 군 복무 결산을 끝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몇 번이고 다시 마음 먹지만 매일 같이 되풀이되는 방종에 몸과 마음이 지쳐서, 내가 나 같지 않다는 환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러고 있기에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는 걸 알면서도 이러고 있으니, 더욱 힘들다.

 

벌써 2008년 9월이다. 돌아가자. 힘들지만 풍요로웠던 2007년 9월로. 시간을 거슬러 그 때 보여주었던 놀라운 열정과 의지를 다시 불러 일으키자. 모든 확률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에, 희망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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