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스타크래프트 1
박민서 지음 / 경성라인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중학교 1학년 때 스타크래프트를 처음 만났다. 그 때가 1998년이니까 확장판인 '브루드워(BroodWar)'가 처음 나타난 시기이다. 그 때까지 컴퓨터 오락이라고 해 봐야 테트리스, 고인돌, 슈퍼마리오, 헥트리스 따위 오락밖에 모르고 있던 나는 스타크래프트를 하자마자 푹 빠져 버렸다. 스타크래프트 열풍이 불면서 온 나라에 PC방이 마구 생겨났다. 그 당시에는 PC방 요금이 1시간에 1500원이었는데, 새벽에는 1000원이었다. 그래서 주말마다 3000원을 들고 새벽같이 일어나 PC방에 달려가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를 즐겼던 기억이 난다. 아침잠이 매우 많은 편인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신기할 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 게임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많고 크다. 그런데 그것을 다 이야기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그 가운데 한 가지만 일단 이야기하겠다. 공상 과학 소설을 쓰는데 푹 빠졌다는 것이다. 내 소설은 그럭저럭 유명한 편이었는데, 그래서 학교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나는 그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 다녔다. 물론 공부도 안 하고 그런 짓이나 하는 나를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매우 못마땅해 하셨지만 말이다.

공책 10여 권에 3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는데, 나름대로 온갖 정성을 쏟았다. 과학책을 읽고 좀 더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설명하려고 애썼고, 평가가 좋은 소설을 읽으며 좀 더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생각했다. 그리고 영어를 좀 쓰고 싶어서 영어를 나름대로 공부했다. 하지만 지금 읽어보면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내가 쓴 글을 보고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쓴 스타크래프트 소설을 많이 읽었다. 그 가운데 '머린의 꿈', '소설 스타크래프트', 그리고 지금 내가 소개하려는 책인 '소설 스타크래프트 저그전'이 가장 인상 깊은 책이었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스타크래프트에서 나오는 종족으로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했다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들은 내용이야 작가가 다채롭게 꾸몄지만, 한결같이 기본 가정은 게임과 다르지 않다. 테란, 프로토스, 저그. 이 세 종족이 살아남으려고 코프룰루 섹터가 있는 은하계에서 벌이는 전쟁 속에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지만 '소설 스타크래프트 저그전'은 다르다. 원래는 고대 종족 젤 나가가 프로토스와 저그를 창조했지만, 여기에서는 프로토스는 아예 나오지 않으며 저그도 '안전협의회'라는 군부가 만들어 낸 괴물로 나온다. 주무대도 코프룰루 섹터가 있는 은하계가 아니라 지구가 개척한 자원 채취 행성이다.

행정부이며 사법부인 지구사령부와 군부인 안전협의회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뒷날. 지구에 있는 모든 자원이 거의 바닥나고 인류는 살아남으려면 우주로 진출해야 했다. 하지만 우주 진출 계획에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명령에 잘 따르는 군부를 이용하려고 했지만, 군부는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지구사령부는 죄수 부대를 이용하여 우주를 개척했고, 자원 채취 행성을 개척하여 다시 인류 문명을 유지한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주는 혜택에서 자원 채취 행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차단당했다. 행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지구에 사는 사람들과 대 볼 때 매우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들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친다. 안전협의회가 몰래 만들어 낸 저그라는 괴물이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란을 일으킨 군부, 곧 안전협의회는 정치계에서 힘을 크게 잃었고, 전쟁이 없는 사회에서 군부 폐지론이 차츰 커지자 위기를 느끼고 엄청난 음모를 꾸민다. 인류 문명을 지탱하는 자원 채취 행성 여섯 곳 가운데 자원 생산량이 가장 많은 테란 행성에 괴물을 나타나게 하여 자원 채취를 어렵게 하고, 자원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을 때 그들이 괴물을 막아서 인류 문명을 유지하는데 힘쓰고 있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 계획대로 잘 나갔다. 지구사령부와 안전협의회가 힘을 다투는 동안 테란 행성 사람들은 극한까지 내몰렸다. 하지만 주사위가 잘 굴러가다가 멈춰버린다. 테란 행성 총사령관인 커먼이 그 음모를 알아채고, 치밀어오르는 화를 지구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연결한다. 독립 운동은 결국 성공한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 안전협의회 의장 앨런 앰브리의 부관 숀 브리슨이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고 앨런이 자기를 신임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자, 그를 감옥에 가두고 커먼에게 빌붙는다. 커먼은 지구로 가서 인류가 모두 잘 살 수 있는 길을 닦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이래나 저래나 정치는 더럽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영웅은 위대하다는 느낌은 이 소설에서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소설에서든지 볼 수 있는 구조가 여기에도 다 나타나 있다. 사실 음모, 저항, 배신 따위로 이루어진 구조를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다고 지루해 할 필요는 없다. 얼마나 많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확실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그 관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각 양자 과정은 우주를 나눈다. 그 때문에 우주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서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한다.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기에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끝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렇기에 한 가지를 가지고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내 마음에 가장 들지 않는 부분을 제시하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지구는 모든 국가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어 단일 통치체제가 이루어졌으며, 정치체제는 기능에 의해서 행정을 맡아보는 지구사령부와 군사적 사안을 관장하는 안전협의회로 이원화되어 있었다.

민족이나 이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졌으며, 전 인구의 90% 이상이 혼혈이 되었다. 정치적 이슈가 사라졌으며, 각 민족 고유의 역사는 과거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철학적 사고는 따분한 것이 되어 기피되었다. 인류는 추구해야 할 이상을 잃어버렸고 오직 개인적인 행복만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 발달된 과학기술이 가져다 주는 안락한 문명에 젖어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쓴 공상 과학 소설을 뒤적여 보면 반드시 맨 처음에 이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나타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 내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글을 써 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계 정부가 나타나고, 영어가 공용어가 되며,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 문명을 누리는데 푹 빠지고, 민족이 사라지고, 철학이 사라진다……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제법 많은 공상 과학 소설에서 한결같이 그 가정이 나타나고, 이 소설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는 생각도 하지 않는가 보다. 이런 세상을 글로 쓰는 사람들은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 글을 썼을까?

이는 신자유주의가 몰고 오는 끔찍한 흐름과 잘 연결된다. 인류에서 2할밖에 안 되는 가진 자들이 나머지 8할을 지배하는 사회를 당연한 것처럼 몰아가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민중을 위한 철학, 역사, 민족 의식 따위는 필요없다. 영향력을 넓히는데 큰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무식한 것들은 그저 자기들이 주는 것이나 받아먹고 자기 말만 잘 들으면 그만이다. 얼마나 역겹고 치졸한 생각인가! 이 소설에서도 지구사령부와 안전협의회가 지구 지배력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동안 그저 자원을 쓰면서 즐거움을 좇기에 바쁜 사람들이 나온다. 자원이 제대로 공급되기만 하면 그만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없다. 철학? 역사? 사회학? 그런 것을 뭐하려고 알아야 해? 이렇게 편안하고 좋은데 그런 것이 왜 필요해?

그런데 요즘 신자유주의자들이 원하는 바가 예전보다 훨씬 더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판치고, 인문학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우리나라를 바라보라. 건실한 생각과 철학을 확립하기는커녕 그런 고민도 제대로 하지 않으려는 사람과 나라는 가능성이 없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뇌를 단련하다'를 읽고 감상문을 쓸 때 제기했던 문제, 곧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이상하다고 간단하게 무시해 버리는 정말 이상한 풍토가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어찌나 사람들이 고민을 안 하고 그저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지 알 수 있으니, 그저 한심할 뿐이다.

이래서는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클럽'에서 지만원은 시스템클럽 회원들은 정신 귀족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물론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헛소리만 늘어놓는 정신 귀족이기에 그 말도 헛소리가 되어 버렸지만,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는 충분하다. 우리는 깨어나서 생각해야 한다. 생각도 하지 않는 바보가 되면 안 된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바보가 되어 버렸지만, 다행히 그들과 견주어 볼 때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다. 여전히 그 크고 잘못된 흐름에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점에서 특히 그 모습을 잘 볼 수 있으며, 행동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부끄럽다. 아직 갈 길이 험하고 멀다.

비록 이 소설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고민하고 있던 한 가지 주제를 풀어내는데는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상당히 이야기도 짜임새 있고 재미있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산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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